진료가 끝나갈 무렵, 어떤 분들은 문고리를 반쯤 잡은 자세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묻습니다.

"저… 괜찮아질까요?"

그 순간 제 안에서 가장 먼저 튀어 오르는 말이 있습니다. "그럼요, 당연히 괜찮아지실 거예요." 이 문장은 이미 제 목젖 근처까지 올라와 있어요. 입만 벌리면 나올 자세로요.

그런데 저는 그걸, 자주 삼킵니다.

왜 삼키는지, 그리고 삼킨 다음에 대체 뭐라고 하는지. 3분짜리 진료로는 도저히 못 하는 이야기라 여기에 길게 적어봅니다. 이건 제가 진료실에서 매일 지는, 아주 작지만 매번 무거운 승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먼저 고백부터 하겠습니다. "괜찮아질 거예요"는 제가 세상에서 제일 하고 싶은 말입니다. 동시에 제일 조심스러운 말이기도 하고요. 이 두 가지가 한 문장 안에 같이 들어 있다는 게, 이 직업의 이상한 점입니다.

하고 싶은 이유는 단순합니다. 앞에 앉은 사람이 지금 아프고, 그 아픔의 한가운데엔 "이게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다"는 공포가 있으니까요. 그 공포에 대고 "괜찮아질 거예요" 한마디를 얹으면, 그 순간 그분의 어깨가 조금 내려갑니다. 눈에 보여요. 그러니 안 하고 싶을 리가요. 저도 사람인데, 앞사람 어깨가 내려가는 걸 보고 싶지 않은 의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조심스러운 이유는 좀 더 깁니다.

그 말이 지금 이 방 안에서는 완벽한 위로거든요. 그런데 이 말에는 유효기간이 없습니다. 제가 오늘 뱉은 "괜찮아질 거예요"는 다음 달에도, 그다음 계절에도 그분 마음속에서 살아 있습니다. 힘든 밤이 오면 그분은 그 말을 꺼내서 다시 읽어볼 겁니다. 부적처럼요. 그런데 만약 그때, 아직 안 괜찮으면요?

그러면 제 위로는 배신으로 바뀝니다.

"선생님이 괜찮아진다고 했잖아요. 근데 왜 아직도 이래요." 이 문장을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제가 옛날에 너무 쉽게 뱉었던 안심 하나가, 시간을 건너와서 그분의 신뢰를 갉아먹고 있다는 걸 봅니다. 당장의 위로를 위해 미래를 담보로 잡은 셈이었던 거죠. 그리고 그 담보는, 안 괜찮은 날이 오면 여지없이 청구서로 돌아옵니다.

재미있게도 — 아니, 재미있진 않지만 — 이건 정신과만의 이야기가 아니더군요. 다른 진료과에서도 성급한 안심의 역효과는 꽤 연구된 주제입니다. "별거 아니에요, 걱정 마세요" 식의 두루뭉술한 안심은 생각만큼 걱정을 줄여주지 못하고, 때로는 오히려 불안을 키우기도 한다는 겁니다. 정작 사람을 안심시키는 건 막연한 다독임이 아니라, 상황을 함께 이해시켜 주는 설명 쪽이었고요1.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좀 뜨끔했습니다. 제가 좋은 뜻으로 던진 "괜찮아요"가, 실은 그렇게 잘 듣는 약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으니까요.

그럼 반대로 가면 되지 않느냐. 정직하게,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면 되지 않느냐.

그것도 해봤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건 잔인했습니다.

정직과 냉정은 다른 겁니다. 이걸 저는 한참 뒤에야 배웠어요. "모르겠습니다"는 사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저는 정말로 이분의 6개월 뒤를 모르니까요. 예후라는 건 확률의 언어지 예언의 언어가 아니고, 저는 점쟁이가 아니라 의사입니다. 그러니 "모르겠습니다"는 학문적으로는 100점짜리 정답이에요.

그런데 그 100점짜리 정답을, 지금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 앞에서 그냥 툭 내려놓으면. 그건 정직이 아니라 방치가 됩니다. 정직하다는 핑계로, 실은 제가 책임을 회피한 것일 때가 있었어요. "확답을 안 하는 게 양심적인 거야"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사실은 나중에 틀릴까 봐 몸을 사린 거죠. 정직의 가면을 쓴 자기 보호. 이게 제일 부끄러운 종류의 실패입니다.

그러니까 제 앞에는 늘 두 개의 함정이 나란히 놓여 있는 겁니다. 한쪽엔 달콤한 거짓 확신, 다른 쪽엔 정직을 빙자한 냉정. 둘 다 쉽고, 둘 다 틀립니다.

의대에서 이런 건 안 가르쳐 줍니다.

정말입니다. 저는 항생제 용량은 배웠고, 심전도 읽는 법도 배웠고, 응급 상황에서 뭘 먼저 하는지도 배웠습니다. 그런데 "나을까요?"라는 질문에 뭐라고 답해야 하는지는, 어느 교과서에도 없었어요. 국가고시에도 안 나왔고요. 그건 그냥, 매번 앞사람 얼굴을 보면서 그 자리에서 만들어 내야 하는 문장이었습니다. 시험 범위에 없던 걸 실전에서 매일 마주치는 기분. 십몇 년째 이 일을 하는데도 저는 아직 이 문제의 모범답안을 못 찾았습니다. 어쩌면 모범답안이란 게 애초에 없는지도요.

솔직히 초년 시절의 저는 이걸 몰랐습니다.

그때의 저는 "괜찮아질 거예요"를 참 후하게 나눠줬어요. 반사신경처럼요. 누가 아프다고 하면 곧장 괜찮아진다고 대꾸했고, 그렇게 말하고 나면 제가 뭔가 좋은 의사가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위로를 준다는 건 원래 기분 좋은 일이니까요. 값싼 낙관을 나눠주면서, 저는 제가 인자한 줄 알았습니다.

그 착각이 깨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제가 그렇게 안심시켜 보낸 분이, 한참 뒤에 훨씬 지친 얼굴로 다시 앉아 이렇게 말했거든요. "그때 괜찮아진다고 하셔서 믿고 버텼는데, 저 아직도 이래요." 그 말에 담긴 건 원망이 아니라 지침이었습니다. 그게 더 아팠어요. 제 가벼운 한마디가 그분에게는 몇 달을 버티게 한 밧줄이었다가, 어느 순간 툭 끊긴 밧줄이 되어 있었던 겁니다. 안 돌아오시는 분들 생각도 그때 같이 났습니다. 끝내 다시 오지 않은 분들 중 몇은, 혹시 제 성급한 안심에 실망해서 발길을 끊은 건 아니었을까 하고요. 알 길은 없지만요.

그날 이후로 저는 그 말을 다르게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 함정 사이에서, 제가 겨우 찾아낸 자리가 하나 있습니다. 확실한 정답은 아니고, 그냥 제가 서 있기로 한 자리요.

거짓 확신 대신 정직한 희망을 드리는 것.

무슨 말이냐면요. "괜찮아질 거예요"라고 미래를 장담하는 대신,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오늘 이후를 장담해 드릴 수는 없어요. 그건 솔직히 저도 몰라요. 그런데 이건 압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처음엔 지금 같던 분들이 조금씩 나아지는 걸 정말 많이 봤어요. 그러니 지금 당장 괜찮아진다고 약속은 못 해도, 괜찮아지는 쪽으로 같이 방법을 찾아가는 건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제가 약속할게요."

이건 거짓말이 아닙니다. 한 글자도요. 나아지는 분들을 많이 본 것도 사실이고, 같이 방법을 찾아가겠다는 것도 제가 지킬 수 있는 약속이니까요. 미래를 담보 잡지 않으면서도, 절망은 남기지 않는 문장. 저는 이 좁은 길을 찾느라 늘 반 박자씩 늦게 입을 뗍니다. 그 반 박자 동안 제 머릿속에서는 저 두 함정 사이로 외줄을 타는 곡예가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여기서 딱 하나는 분명히 해두고 싶습니다. 완치를 장담 못 한다는 게 절대 "희망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 이건 제가 완치와 회복은 다르다는 이야기에서 따로 길게 적기도 했는데, 정신과 치료로 나아지는 사람은 정말 많습니다. 다시 웃고, 다시 밥맛이 돌고, 다시 내일을 기다리게 되는 분들을 저는 매주 봅니다. 제가 장담을 아끼는 건 희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희망을 함부로 다루고 싶지 않아서예요. 소중한 걸 조심스럽게 드는 것과, 그게 없다고 말하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니까요.

그런데 — 이 글이 무슨 도 닦은 사람의 깨달음처럼 읽히면 곤란합니다. 그래서 미화는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저는 이 균형에 자주 실패합니다.

어떤 날은 진이 다 빠져서, 앞사람이 "괜찮아질까요" 물으면 저도 모르게 "그럼요, 괜찮아질 거예요" 하고 그냥 뱉어버립니다. 성의 없이 던진 사탕 같은 안심이요. 뱉고 나서 아차 싶은데 이미 말은 나갔죠. 또 어떤 날은 반대로, 너무 사려 깊은 척하다가 결국 아무 위로도 못 하고 그분을 빈손으로 돌려보냅니다. "신중한 의사" 코스프레를 하다가, 정작 그 사람이 오늘 밤 붙들고 잘 문장 하나를 못 쥐여준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매일 이 사이에서 흔들립니다.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갑거나. 딱 맞는 온도를 찾는 날은 생각보다 드뭅니다. 이 흔들림에 대해서는 저도 자주 흔들린다는 고백을 따로 해둔 적도 있어요. 확신에 찬 의사처럼 보이고 싶지만, 사실 제 안쪽은 늘 좀 젖어 있습니다.

그래도 요즘 제가 붙들고 있는 문장이 하나 있긴 합니다.

장담은 못 해도, 곁은 지킬 수 있다는 것.

"괜찮아질 거예요"는 결과에 대한 약속이라 제가 어기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여기 있을게요, 같이 가봅시다"는 과정에 대한 약속이라, 이건 제가 안 어길 수 있어요. 지키는 게 전적으로 제 몫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요즘, 미래를 장담하는 대신 현재의 곁을 약속하는 쪽으로 조금씩 옮겨가는 중입니다. 완전히 옮겨간 건 아니고요. 아까 말했듯 저는 아직도 자주 미끄러지니까.

가끔 이런 상상을 합니다. 언젠가 제가 "괜찮아질 거예요"를 아무 두려움 없이, 정확히 맞는 순간에만 골라서 말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런 경지가 있긴 할까.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 조심스러움을 영영 못 벗는 게, 이 직업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일지도 모르겠어요. 그 말이 너무 쉬워지는 순간, 저는 아마 나빠진 의사가 되어 있을 테니까.

그러니 오늘도 저는, 목까지 올라온 그 말을 반쯤 삼키고, 대신 조금 더 정직한 문장을 고르느라 반 박자 늦게 입을 뗄 겁니다. 앞으로도 종종 실패하면서요.

혹시 진료실에서 저를 만나 "저 괜찮아질까요" 물었는데, 제가 곧장 "그럼요"라고 안 하고 잠깐 뜸을 들인다면. 그건 제가 무성의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예요. 그 말을 함부로 하기엔 당신이 너무 소중해서, 저는 지금 외줄을 타는 중인 겁니다.

혹시 지금 "괜찮아질 리 없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해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부디 그 판단을 혼자 내리지 마세요. 정신건강 위기상담전화 ☎ 1577-0199(24시간)나 가까운 정신건강의학과의 문을 두드려 주세요. 지금은 안 보여도, 같이 찾아볼 방법이 남아 있습니다.


이 글은 정신과 의사가 진료실 밖에서 쓰는 개인적인 에세이이며, 특정한 진단·처방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글 안의 상황과 대화는 특정 환자의 사례가 아니라, 여러 장면에서 받은 인상을 신상이 드러나지 않게 각색·일반화한 것입니다.

함께 보면 좋은 글

이 글에 은근히 기댄 자료

  • 두루뭉술한 안심(affective reassurance)은 걱정을 잘 줄이지 못하고 때로 늘리기도 하는 반면, 상황을 이해시키는 설명(cognitive reassurance)이 더 효과적이라는 리뷰: Traeger 등, Brazilian Journal of Physical Therapy, 2017. PMC

참고문헌

  1. Traeger 등, 안심에 관한 리뷰,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