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부터 하나 하겠습니다. 저는 제 마음이 힘들 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상담을 받은 적이 있고, 한동안은 약도 먹었습니다. 이 문장을 쓰는 지금도 손끝이 조금 간지럽습니다. 정신과 의사가 정신과 도움을 받는다는 건, 왠지 이발사가 남의 가위에 머리를 맡기는 것보다 훨씬 큰일처럼 느껴지거든요. 사실 이발사는 매일 그렇게 하는데도요.

진료실에서는 이 얘기를 좀처럼 못 합니다. 앞에 앉은 분이 어렵게 여기까지 오셨는데, "저도 실은 얼마 전에…" 하고 제 사정을 풀어놓으면 그건 위로가 아니라 짐을 하나 더 얹는 일이 되니까요. 그래서 진료실에서 삼킨 말을, 오늘은 여기에 조금 풀어놓습니다.

먼저 흔한 오해 하나를 정리하고 싶어요. 아는 것과 낫는 것은 다릅니다. 완전히 다릅니다.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정신과 의사는 마음의 작동 원리를 아니까, 자기 마음쯤은 알아서 잘 다스리겠지. 반은 맞고 반은 순진한 기대입니다. 저는 우울이 어떤 신경회로에서 어떻게 굴러가는지 설명할 수 있고, 인지가 어떻게 뒤틀리는지 칠판에 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새벽 세 시에 이유 없이 눈이 떠져서 천장을 노려보고 있을 때, 그 지식은 놀랄 만큼 쓸모가 없습니다. 소화기내과 의사도 체하고, 정형외과 의사도 삐끗합니다. 뇌의 생리를 안다고 그 뇌가 저를 봐주는 건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아는 게 발목을 잡을 때도 있습니다.

우울감이 슬며시 찾아오면, 보통 사람은 "요즘 왜 이렇게 힘들지?" 하고 걱정을 합니다. 저는 다릅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저를 진단해 버립니다. "음, 흥미 저하 있고, 수면 초반 각성 있고, 이게 2주째면 기준상…" 이렇게 스스로를 차트에 적어 넣는 순간, 이상하게도 그 고통은 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례처럼 멀어집니다. 편리한 재주 같지만, 실은 위험한 습관입니다. 내가 나를 진단해 서랍에 정리해 넣으면, 그걸 남에게 이야기할 필요가 사라지거든요. 혼자 진단하고 혼자 축소하고 혼자 버팁니다. 의료인이 도움을 늦게 청하는 첫 번째 이유가 이겁니다. 우리는 감별진단은 잘하는데, 정작 "나 좀 힘들어"라는 한 문장은 지독하게 서툽니다.

의료계에는 오래된 격언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치료하는 의사는 바보를 환자로 둔 셈이라는 말이요. 처음 들었을 땐 그냥 우스갯소리인 줄 알았는데, 나이가 들수록 이게 뼈아픈 진담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나를 진료하는 나는 객관적일 수가 없거든요. 봐주고 싶은 마음과 몰아세우고 싶은 마음이 한 사람 안에서 싸우니, 제대로 된 판단이 나올 리가요. 남의 마음은 그렇게 조심스럽게 다루면서, 유독 제 마음에는 "엄살 부리지 마"라고 툭 내뱉는 저를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환자에게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요.

두 번째 이유는 더 현실적이고, 그래서 더 씁쓸합니다. 걱정이 되는 겁니다. 이걸 인정하면 내 경력에 흠이 되지 않을까. 동료들이 나를 다르게 보지 않을까. 환자를 보는 사람이 자기 마음도 못 챙긴다는 게 알려지면 어쩌지. 이 걱정은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아서 더 질깁니다. 실제로 의료계에는 오래된 침묵의 문화가 있고, 여러 연구가 의사들이 마음의 문제 앞에서 도움을 덜 청한다고 지적합니다. 그 이유로 꼽히는 게 정확히 이거예요. 경력에 대한 걱정, 그런 걸 내색하지 않는 직업 문화, 그리고 "나쯤은 알아서 한다"는 뿌리 깊은 자기의존1.

그 습관이 얼마나 이른 시기부터 시작되는지를 보여주는 숫자가 하나 있습니다. 저는 이 숫자를 처음 봤을 때 한참을 멍하니 있었어요.

전 세계 의대생 12만여 명을 모아 분석했더니, 네 명 중 한 명 이상, 그러니까 27.2%가 우울이나 우울 증상을 겪고 있었습니다. 일반 또래보다 훨씬 높은 수치죠.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그렇게 우울 선별검사에서 양성이 나온 학생들 가운데, 실제로 도움을 청한 사람은 15.7%뿐이었습니다2.

여섯 명이 아파도 다섯 명은 그냥 견딘다는 뜻입니다.

이 학생들이 게을러서일까요. 정보가 없어서일까요. 아닙니다. 이들은 우울증에 대해 시험을 봐서 통과한 사람들이에요. 진단 기준을 외우고, 치료 지침을 배우고, "이럴 땐 병원에 가야 합니다"라고 환자에게 말할 준비를 하는 사람들. 그런데 정작 그 지식이 자기를 향할 땐 작동하지 않습니다. 지식은 방패가 아니었던 겁니다. 그리고 이 학생들이 자라서 저 같은 의사가 됩니다. 진단은 잘하지만 도움은 못 청하는 습관을, 흰 가운과 함께 물려받은 채로요.

이 대목에서 조금 무거운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피하고 싶지만, 피하면 정직하지 않은 것 같아서요.

의사의 자살에 관한 통계는 오랫동안 우리 안에서 조용히 회자되던 이야기입니다. 최근 20개국 자료를 모은 대규모 분석을 보면, 다행히 남자 의사의 자살률은 이제 일반 인구와 큰 차이가 없는 수준까지 내려왔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전반적으로 낮아지는 추세이기도 하고요. 다만 여성 의사의 자살 위험은 여전히 일반 인구보다 높게(약 1.76배) 남아 있었습니다3. 좋아지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고, 아직 다 괜찮지는 않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이 두 문장을 다 말하고 싶습니다. 어느 한쪽만 말하면 거짓이 되니까요.

제가 이 숫자를 꺼내는 건 겁을 주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예요. 우리 중 누구도, 흰 가운을 입었다고 해서 이 이야기에서 면제되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도 된다는 것. 그 말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자, 그래서 저는 어떻게 했느냐.

한동안은 저도 위의 다섯 명처럼 굴었습니다. 스스로 진단하고, 스스로 처방을 상상하고, "이 정도면 그냥 지나가겠지" 하며 버텼죠. 남에게는 그렇게 쉽게 "혼자 견디지 마세요"라고 말하면서, 정작 저는 혼자 견디고 있었습니다. 이 모순을 어느 날 문득 깨달았을 때가 아마 전환점이었던 것 같아요. 나는 매일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권하는 사람인데, 그 조언을 스스로에게는 단 한 번도 적용하지 않았구나.

그래서 결국 저는, 늘 제가 앉던 자리 말고 반대편 의자에 앉아 봤습니다.

그 경험은 겸손하게 만드는 데가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잘 알았지만,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 그렇게까지 어려운 줄은 미처 몰랐거든요. 첫 문장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헤맸고, 별것 아닌 걸로 시간을 뺏는 건 아닌가 눈치를 봤고,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제가 딱 제 환자들이 하던 그 행동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 방의 반대편은, 생각보다 훨씬 춥고 훨씬 용기가 필요한 자리였습니다.

그때 배운 게 있습니다. "치료를 받으세요"라고 말할 자격은, 나도 그 의자에 앉아 본 사람에게서 조금 더 단단해진다는 것.

물론 아파 봐야만 좋은 의사가 되는 건 아닙니다. 그런 낭만은 경계하고 싶어요. 다만, 도움을 청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몸으로 아는 사람은, "그냥 오시면 됩니다"라는 말을 조금 다르게 하게 됩니다. 그 한마디를 꺼내기까지 상대가 몇 개의 밤을 넘겼을지 상상이 되니까요. 이건 의사도 자주 흔들린다는 이야기와 결이 닿아 있습니다. 흔들려 본 사람이 흔들리는 사람 옆에 앉을 수 있듯이, 도움을 받아 본 사람이 도움을 권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꼭 짚고 싶은 게 있어요. 도움을 청하는 건 약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상하게도 이 부분에서만 논리가 무너집니다. 혈압이 높으면 약을 먹는 게 당연하고, 다리가 부러지면 깁스를 하는 게 상식인데, 마음이 무너지면 갑자기 "의지로 이겨내야지"가 됩니다. 저는 약을 권하는 마음에 대해 쓰면서도 같은 이야기를 했지만, 이번엔 제 이야기로 다시 말하겠습니다. 제가 한동안 약의 도움을 받은 건 제가 약해서가 아니라, 그게 그 시기의 저에게 필요한 도구였기 때문입니다. 구명조끼를 입은 사람을 두고 수영을 못한다고 비웃지 않잖아요. 저는 잠깐 숨을 쉬어야 했고, 그래서 조끼를 입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덧붙이자면, 그 조끼를 입기로 결정하는 것조차 제겐 쉽지 않았습니다. 매일 남에게 권하던 바로 그 결정이요. 그러니 진료실에서 처방전을 받아 들고 며칠씩 약봉지를 못 뜯는 분들의 마음을, 저는 이제 조금 다른 각도에서 압니다. 머리로가 아니라, 식탁 위에 봉지를 올려두고 노려봤던 사람으로서요.

이 글을 미화된 결말로 끝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건 이 섹션답지도 않고, 무엇보다 사실이 아니니까요.

저는 완전히 극복했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지금도 어떤 계절엔 마음이 얇아지고, 남의 고통을 하루 종일 받아내고 나면 저녁에는 텅 빈 사람처럼 앉아 있곤 합니다. 남의 슬픔을 매일 만지는 직업은, 아무리 조심해도 손끝에 그 물이 조금씩 뱁니다. 이걸 우리는 공감 피로라고 부르는데, 이름이 있다고 해서 덜 지치는 건 아니더군요. 그래서 저는 여전히, 필요하면 도움을 청합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게 제가 이 일을 오래 하는 방법이고, 동시에 제가 여러분께 "도움을 청하세요"라고 계속 말할 수 있는 자격의 일부입니다.

어쩌면 좋은 치료자와 나쁜 치료자를 가르는 건 얼마나 안 아프냐가 아니라, 아플 때 어떻게 하느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직 그 답을 다 알지 못합니다. 다만 한 가지는 압니다. 반대편 의자에 앉아 본 뒤로, 제가 앉던 원래 자리가 조금 덜 외로워졌다는 것.

혹시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이라면, 혹은 "나쯤이야"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반대편 의자를 떠올려 주세요. 그 자리는 약한 사람이 앉는 자리가 아닙니다. 자기를 오래 데리고 살 줄 아는 사람이 앉는 자리입니다.

저도 오늘, 그 의자를 비워두지 않았습니다.


이 글은 정신과 의사가 진료실 밖에서 쓰는 개인적인 에세이이며, 특정한 진단·처방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여기 인용한 통계 외에 구체적 사례가 있다면 신상이 드러나지 않도록 각색한 것입니다.

마음이 많이 무겁거나 위급하게 느껴진다면, 부디 혼자 견디지 마세요. 정신건강 위기상담전화 ☎ 1577-0199(24시간)나 가까운 정신건강의학과의 문을 두드려 주세요. 도움을 청하는 그 한 걸음이, 이미 충분히 용감한 일입니다.

함께 보면 좋은 자료

  • 전 세계 의대생의 27.2%가 우울·우울 증상을 겪지만, 그중 도움을 청한 사람은 15.7%뿐: Rotenstein 등, JAMA 2016. PMC
  • 여성 의사의 자살 위험은 여전히 일반 인구보다 높지만(약 1.76배), 전반적 추세는 시간이 지나며 낮아지고 있다(20개국): BMJ 2024. PMC
  • 의사들은 경력 걱정·직업 문화·자기의존 탓에 마음의 도움을 덜 청한다: JAMA Psychiatry 2020. PMC

참고문헌

  1. JAMA Psychiatry 2020, 의사 자살 메타분석
  2. Rotenstein 등, JAMA 2016
  3. BMJ 2024, 20개국 메타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