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명함에는 이름 옆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라고 적혀 있습니다. 진료실 문패에도 그렇게 붙어 있고요. 그 직함은 은근히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 앉은 사람이 저기 앉은 사람을 고쳐 준다고. 화살표가 저에게서 당신에게로 흐른다고.

오늘은 그 화살표가 실은 반대로도 흐른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아니, 정직하게 말하면 — 반대 방향이 훨씬 굵습니다.

이런 말을 진료실에서 하면 좀 이상해집니다. 처방전을 건네면서 "사실 오늘도 제가 선생님께 한 수 배웠습니다" 하면, 다들 저를 겸손 떠는 이상한 의사쯤으로 보실 거예요. 그래서 그 말은 늘 삼킵니다. 삼킨 말을, 여기에 풀어 놓습니다.

먼저 오해 하나부터 걷어내고 싶어요. 저는 사람 마음을 다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의대와 수련을 거치면서 저는 참 많은 걸 배웠습니다. 어떤 증상이 모이면 무슨 병인지, 어떤 약이 어느 수용체를 건드리는지, 재발 신호가 뭔지. 그런데 그 두꺼운 교과서 어디에도 안 적혀 있던 게 하나 있습니다. 병을 안고도 그냥, 계속, 살아가는 법. 그건 시험에 안 나왔거든요. 그리고 그건 책이 아니라 사람이 가르쳐 주더라고요. 정확히는, 제 앞 의자에 앉은 분들이요.

한 분이 기억납니다. 신상은 다 바꿔 적으니 누구인지는 신경 쓰지 마시고요. 오래 우울을 앓던 분이었는데, 어느 날 진료실에 들어오시더니 그냥 툭 이러시는 거예요. "선생님, 저 오늘 아침에 화분에 물 줬어요." 그게 다였습니다. 화분에 물을 줬다. 저는 차트에 뭘 적어야 할지 몰라 잠깐 멈칫했어요. 이건 무슨 척도로도 안 잡히는 이야기거든요. PHQ-9 어디에도 '화분' 칸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그날, 회복이 뭔지에 대해 강의 열 개보다 많은 걸 배웠습니다. 회복은 거창한 게 아니었어요. 죽어 가던 무언가를 다시 살려 보고 싶어지는 마음. 아침에 몸을 일으켜 물뿌리개를 드는 그 별것 아닌 동작. 저는 그걸 가르쳐 드린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저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런 순간이 쌓이다 보면, 누가 선생이고 누가 학생인지 슬슬 헷갈립니다.

가장 크게 흔들렸던 날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그 무렵 제가 좀 지쳐 있었습니다. 남의 슬픔을 매일 만지는 직업이라는 게, 아무리 조심해도 손끝에 그 물이 뱁니다. 겉으론 티를 안 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요. 진료를 마무리하려는데, 오래 봐 온 환자분이 나가시다 말고 문고리를 잡은 채 저를 돌아보시더니 이러셨습니다. "선생님도… 요즘 좀 힘드시죠?"

저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저는 그분을 위로하려고 앉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게 제 일이에요. 그런데 정작 그날 위로받은 건 저였습니다. 그것도 제가 돌보고 있다고 믿었던 바로 그 사람에게서요. 저는 뭐라고 답했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납니다. 그냥 "아이고, 제 걱정을 다 해 주시네요" 하고 어설프게 웃었던 것 같아요. 속으로는 코끝이 좀 시큰했고요.

그날 저는 알았습니다. 아픈 사람이라고 해서 남을 못 살피는 게 아니라는 걸. 오히려 아파 본 사람이 아픈 사람을 더 정확히 알아본다는 걸. 저는 그분을 '환자'라는 칸에 넣어 두고 저를 '돌보는 쪽'에 세워 뒀는데, 그 벽은 제가 세운 거였고, 그분은 아무렇지 않게 그 벽을 넘어와 저를 걱정해 주셨습니다. 참, 사람이 사람을 돕는다는 게 그렇게 한 방향일 리가 없는데 말이죠.

'회복'이라는 단어를 저는 오래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수련 초년에 저는 회복을 이렇게 그렸습니다. 증상 점수가 내려가고, 약을 줄이고, 결국 아프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 깔끔한 우하향 그래프요. 그런데 실제로 만난 분들은 그 그래프대로 살지 않으셨어요. 증상이 얼마간 남아 있는 채로 다시 출근하고, 흔들리는 날을 안은 채로 아이를 안아 올리고, 완벽하지 않은 몸으로 친구랑 커피를 마셨습니다. 저는 그걸 '아직 덜 나은 상태'라고 적었는데, 정작 본인들은 그걸 두고 살아 있는 상태라고 부르시더라고요. 덜 나은 게 아니라 이미 살고 있는 거라고요.

흥미롭게도, 나중에 논문을 뒤지다 보니 학자들도 결국 같은 결론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회복이 뭔지 알아내려고 전 세계 당사자들의 이야기 수백 편을 모아 분석한 대규모 연구가 있어요. 거기서 뽑아낸 회복의 핵심은 증상이 0이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사람과 다시 이어지는 것, 희망을 갖는 것, 나라는 사람을 다시 세우는 것, 삶의 의미를 찾는 것, 그리고 내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것. 이 다섯 가지였죠1.

이 대목에서 제가 웃었어요. 학자들이 대단한 걸 발견한 게 아니었거든요. 환자분들이 원래부터 알고 있던 걸 받아 적은 것뿐이었습니다. 회복의 정의를 처음 쓴 건 연구자가 아니라, 그 길을 실제로 두 발로 걸어간 사람들이었어요. 논문은 그걸 뒤늦게 활자로 옮겼을 뿐이고요. 저는 그걸 진료실에서 이미 매주 듣고 있었으면서도, 논문에 실려 나오고 나서야 "아, 이게 그거였구나" 했던 거고요. 참 뒤늦은 학생이죠. 회복이 뭔지는 완치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이야기에 따로 적어 뒀지만, 그 글도 결국 제가 지어낸 게 아니라 받아 적은 겁니다.

'견딘다'는 말도 저는 환자분들에게 다시 배웠습니다.

수련 때 저는 이 단어를 좀 얕게 봤어요. 견딘다는 건 그냥 버티는 것, 시간이 지나가길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쯤으로요. 치료가 잘 안 될 때 "일단 견뎌 보시죠"라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그게 좀 무력한 처방 같아 미안했습니다. 해 줄 게 없어서 시간에 떠넘기는 말 같았거든요.

그런데 오래 앓아 온 분들을 보면, 견딘다는 게 그렇게 가만한 일이 아니더라고요. 아침마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스스로와 벌이는 작은 협상들, 최악의 밤을 넘기려고 만들어 둔 자기만의 요령들, "오늘 하루만" 하고 스스로를 달래 가며 하루를 또 하루로 잇는 그 끈질김. 그건 수동적인 게 아니라 지독하게 능동적인 노동이었습니다.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자리에서, 사실은 매일 전쟁을 치르고 계셨던 거예요. 저는 진료실 밖에서 그 전쟁을 한 번도 대신 치러 준 적이 없으면서, 너무 쉽게 "견뎌 보세요"라고 말해 왔던 겁니다. 그 말의 무게를 저는 그분들을 보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제 역할을 좀 다르게 봅니다.

한동안은 제가 이 사람을 '낫게 한다'고 생각했어요. 오만한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지도를 조금 아는 사람일 뿐이에요. 어느 길이 덜 험한지, 어디쯤에서 다들 미끄러지는지, 갈림길에서 대개 어느 쪽이 낫던지 — 그런 걸 옆에서 일러 주는 사람. 그런데 그 길을 실제로 두 발로 걷는 건, 밤마다 그 무게를 지고 잠드는 건, 아침마다 다시 신발 끈을 매는 건 언제나 그분들이었습니다. 저는 한 번도 그분들 대신 그 길을 걸어 준 적이 없어요. 그럴 수도 없고요.

길잡이가 정상에 먼저 올라 본 적 없다는 게 좀 웃기긴 합니다. 저는 그 산을 안내하면서, 정작 그 산을 넘어 본 건 제 앞의 환자들이거든요. 그러니 배우는 쪽이 저인 게 당연하죠.

여기서 조심하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칫 환자분들을 '나를 성장시켜 준 고마운 스승들'로 미화하게 됩니다. 그건 예의가 아니에요. 그분들은 저를 가르치려고 아프신 게 아닙니다. 자기 삶을 살아 내느라 아프셨고, 저는 그 곁에 우연히 앉아 있다가 어깨너머로 배운 것뿐입니다. 배움은 제 몫이지 그분들의 의무가 아니에요. 그러니 "환자에게서 배운다"는 이 말도, 자칫 남의 고통을 내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는 소리로 들릴까 봐 저는 늘 조심스럽습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하나 더 털어놓자면 — 모든 환자가 저에게 스승이었던 건 아닙니다.

미화하고 싶지 않아요. 어떤 날은 저도 그냥 지칩니다. 마음에 아무 감흥 없이 기계처럼 차트를 넘기는 날이 있고, 같은 이야기를 다섯 번째 듣다가 속으로 한숨을 쉬는 날도 있습니다. 어떤 관계는 끝까지 삐걱대다 끝내 발길이 끊기기도 하고요. 저는 성인군자가 아니고, 매 순간 감사한 학생의 자세로 앉아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날은 그저 오늘 진료가 빨리 끝났으면 하는, 별로 대단할 것 없는 사람일 뿐이에요. 그런 척을 안 하고 이렇게 적는 게 이 섹션에는 그나마 맞는 것 같습니다.

다만 그 지친 날들 사이사이에, 화분에 물을 줬다는 한마디가, "선생님도 힘드시죠"라는 서툰 걱정이, 불쑥 끼어듭니다. 그러면 저는 다시 이 일을 왜 하는지 어렴풋이 기억해 냅니다. 그 순간들은 예고 없이 오고, 제가 준비됐을 때 오지도 않아요. 그냥 옵니다. 그리고 저를 조금 덜 오만한 사람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가르치는 얼굴을 하고 앉아 있지만 실은 배울 준비를 하고 앉아 있습니다. 누가 또 저에게, 교과서에 없던 문장을 하나 건네줄지 모르니까요. 그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일의, 제가 미처 말 못 한 다른 쪽 값어치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도움을 받으러 오지만, 저는 당신에게서 배우거든요.

명함은 못 고칩니다. 거기엔 여전히 '전문의'라고 적혀 있을 거예요.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그 밑에 아주 작게 한 줄을 더 달아 두려고 합니다.

여전히 배우는 중.


이 글은 정신과 의사가 진료실 밖에서 쓰는 개인적인 에세이입니다. 등장하는 일화는 특정인을 알아볼 수 없도록 세부를 바꾸거나 여러 경험을 합쳐 각색한 것이며, 특정한 진단·치료 조언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많이 무겁다면 혼자 견디지 마시고, 가까운 정신건강의학과나 정신건강 위기상담전화 ☎ 1577-0199(24시간)의 문을 두드려 주세요.

참고문헌

  1. Leamy 등, 회복의 개념 틀 체계적 문헌고찰, British Journal of Psychiatry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