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을 시작하던 무렵, 저는 아주 단순한 믿음 하나를 품고 있었습니다.
의사는 울면 안 된다.
어디서 배운 건지도 모르겠어요. 누가 앉혀 놓고 그렇게 가르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확신하고 있었어요.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은 어떤 이야기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잔잔한 호수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한다고. 환자가 무너질 때 나까지 무너지면 이 방을 누가 붙들고 있느냐고. 그러니 감정은 접어서 가운 안주머니 깊숙이 넣어 두는 것이 프로다운 일이라고요.
그 믿음이 제일 시험당한 건, 초년의 어느 진료실이었습니다.
앞에 앉은 분이 담담하게, 정말 담담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목소리 하나 떨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담담함이 오히려 제 안쪽을 툭 건드렸어요. 저 사람이 이 이야기를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혼자 삼켰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 목젖 아래가 뜨거워지고 코끝이 시큰해지는 겁니다.
저는 당황했습니다. 울면 안 되는데. 프로는 흔들리면 안 되는데.
그래서 제가 뭘 했느냐면요, 웃픈 이야기지만, 천장을 봤습니다.
눈물이 눈 안에 고이면 아래로 흐르잖아요. 그런데 고개를 살짝 젖혀 천장을 보면 그게 안 흐르고 도로 고인다는, 어디서 주워들은 얄팍한 요령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진료 중에 갑자기 천장 형광등을 골똘히 올려다보는, 아주 이상한 의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볼펜을 괜히 딸깍거리고, 차트에 안 써도 될 글씨를 꾹꾹 눌러쓰고, 물을 벌컥 마시고. 지금 생각하면 그 어설픈 몸짓들이 다 "저 지금 안 울려고 필사적입니다" 하는 광고판이었을 텐데 말이죠.
한동안 저는 그렇게,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그걸 눌러 삼키는 사람이었습니다. 눌러 삼키는 걸 실력이라고 착각하면서요.
그 믿음에 처음 금이 간 건, 제가 몹시 존경하던 윗년차 선생님 때문이었습니다.
늘 침착하기로 소문난 분이었어요. 아무리 무거운 이야기 앞에서도 목소리 한 톤 흔들리지 않는, 제가 되고 싶던 바로 그 잔잔한 호수 같은 사람. 그런데 어느 날 그분이 한 환자와 이야기를 마치고 나오는데, 눈가가 붉어져 있는 걸 봤습니다. 애써 감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흐르도록 둔 것도 아닌, 딱 그만큼만 젖은 눈이었어요. 저는 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런 분도 우시는구나. 그런데 이상하게, 그 붉어진 눈을 보고 나니 그분이 덜 유능해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더 깊어 보였어요. 그때 제 안에서 뭔가가 조용히 어긋났습니다. 어쩌면 내가 배운 그 규칙이, 반쪽짜리였을지도 모른다는.
그런데도 그 규칙은 쉽게 안 놓아지더라고요. 머리로는 흔들려도 된다는 걸 알면서, 몸은 여전히 천장을 찾았습니다. 결국 그 규칙을 진짜로 흔든 건 책이나 선배가 아니라, 진료실에서 만난 이야기들 자체였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걸 알게 됐어요.
어떤 이야기들은, 아무리 방어를 세워도 그 방어를 뚫고 들어옵니다.
노력한다고 막아지는 게 아니더라고요. 오래 아파 온 분이 "이제는 사는 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하고 조용히 말할 때. 사랑하는 사람을 갑자기 잃고, 그 빈자리를 어떻게 견뎌야 하는지 몰라 저를 찾아온 분이, 울지도 못하고 그저 두 손만 만지작거릴 때. 아이 이야기를 하다가 말끝을 잇지 못하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부모 앞에서. 그런 순간엔 제가 세워 둔 그 잘난 호수 같은 표정이, 안에서부터 잔물결로 흔들립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오래된 질문 앞에 다시 섭니다. 참아야 하나. 아니면, 보여도 되나.
이건 생각보다 어려운 문제입니다. 양쪽 다 함정이 있거든요.
한쪽 끝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의사가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미동도 없는, 완벽하게 평평한 사람. 언뜻 그게 프로처럼 보이지만, 저는 그런 얼굴 앞에서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를 봤습니다. 큰맘 먹고 제일 아픈 데를 꺼내 보였는데 상대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면, 사람은 "아, 이건 여기서 말할 만한 게 아니구나" 하고 도로 입을 닫습니다. 감정을 완전히 지운 얼굴은 안전해 보이지만, 실은 벽이에요. 그 벽 앞에서 어떤 이야기는 영영 나오지 못합니다.
다른 쪽 끝에는, 매번 환자와 함께 무너지는 의사가 있습니다. 슬픈 이야기마다 같이 펑펑 울고, 진료가 끝나면 저 사람보다 내가 더 진이 빠져 있는. 마음은 따뜻할지 몰라도, 이건 이것대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 방에서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제가 아니거든요.
정신의학에서도 오래 다뤄 온 이야기입니다. 감정을 아예 닫아 버리는 것과 감정에 통째로 휩쓸리는 것, 양극단은 둘 다 대가를 치른다는 것. 감정을 지나치게 끌어안으면 연민 피로와 소진으로 가고, 반대로 감정을 죽여 버리면 환자를 사람이 아니라 사례로만 보게 되는 냉소로 흐른다는 거예요. 결국 중요한 건 감정을 없애는 게 아니라, 그 감정을 알아차리고 다스리는 힘이라고 합니다1.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저는 좀 놓여났어요. 안 우는 게 실력이 아니라, 언제 흔들려도 되는지를 아는 게 실력이라는 뜻이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좋은 의사는 감정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디까지 흔들려도 되는지를 아는 사람이더라고요.
그 선을 저는 아직도 매번 새로 긋습니다.
언젠가부터 저는, 목이 메는 순간을 무조건 삼키지는 않게 됐습니다. 눈시울이 살짝 붉어지는 걸, 예전처럼 천장을 보며 필사적으로 감추지 않아요. 왜냐하면 어떤 순간엔, 그 잠깐 붉어진 눈이 말보다 정확한 메시지가 되거든요.
당신의 고통이, 방금 저에게 닿았습니다.
이 말을 입으로 하면 오히려 가벼워집니다. 그런데 눈이 대신 말하면, 그건 연기할 수 없는 진짜예요. 큰 슬픔을 꺼내 놓은 사람이 맞은편 의사의 눈가가 함께 젖는 걸 볼 때, 저는 그분의 표정에서 아주 미묘한 무언가가 풀리는 걸 봅니다. 아, 이 사람은 내 이야기를 남의 일로 듣고 있지 않구나. 이건 통계나 사례가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아픔에 잠깐 같이 아파해 준 순간이구나. 그 짧은 젖음이, 백 마디 "많이 힘드셨겠어요"보다 깊이 가닿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압니다. 함께 잠깐 눈시울이 붉어지는 건, 프로답지 못한 실수가 아니라 때로는 가장 정직한 공감의 신호라는 걸요. 이건 제가 환자들에게서 배운 것 중에서도 오래 걸려 배운 항목입니다.
다만.
여기서부터가 진짜 어려운 대목이에요.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과 무너지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거든요.
저는 이 선을 이렇게 정리해 뒀습니다. 제 감정이 진료를 압도하는 순간, 그건 이미 선을 넘은 겁니다.
무슨 말이냐면요. 앞사람이 자기 슬픔을 꺼내 놓는데 제가 먼저 울어 버리면,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 사람이 갑자기 저를 달래기 시작해요. "선생님 괜찮으세요? 제가 너무 무거운 얘기를 했나 봐요." 자기가 위로받으러 온 자리에서, 도리어 의사를 위로하고 있는 겁니다. 그건 제가 그분 몫의 공간을 빼앗은 거예요.
이 방은 그 사람이 울어도 되는 방이어야 합니다. 마음껏 무너져도, 그걸 받아 주는 단단한 벽이 있는 방. 그런데 제가 먼저 그 벽을 무너뜨리면, 그 사람은 기댈 데를 잃고 도리어 저를 떠받쳐야 하는 처지가 됩니다. 저는 위로받으러 이 자리에 앉은 게 아니에요. 돌보러 앉은 자리입니다. 이 순서를 뒤집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목이 메는 순간이 오면 아주 빠르게 저울질을 합니다. 이 흔들림이 저 사람에게 "당신의 아픔이 닿았다"는 신호로 가닿는 정도인가, 아니면 저 사람이 나를 걱정해야 할 만큼 넘치려 하는가. 앞이면 굳이 감추지 않고, 뒤라면 조용히 추스릅니다. 이 저울질은 진료실에서 제가 매일 하는 일 중에서도 제일 미세한 축에 듭니다. 눈금이 워낙 촘촘해서, 솔직히 매번 정확히 읽어 내지는 못해요.
그리고 여기서, 미화하고 싶지 않은 정직한 이야기를 하나 해야겠습니다.
이 균형은 매번 어렵습니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요.
어떤 날은 제가 예상보다 훨씬 크게 흔들립니다. 그날의 제 상태가 안 좋았거나, 앞사람의 사연이 하필 제 오래된 아픈 데를 건드렸거나, 이유는 그때그때 다릅니다. 그런 날은 진료 중에 도저히 표정이 다스려지지 않아서, 다음 분을 들이기 전에 잠깐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를 뜹니다. 세면대 앞에 서서 찬물로 손목을 적시고, 거울을 잠깐 보고, 숨을 몇 번 고르고 나옵니다. 아무 일 없었다는 얼굴을 다시 만들어서요.
이걸 부끄럽다고 여기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직도 이 모양이라니, 하고요. 그런데 이제는 좀 다르게 봅니다. 화장실에서 몰래 추스르는 그 1분이, 어쩌면 제가 이 일을 아직 사람의 얼굴로 하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고요. 완전히 무감각해졌다면 애초에 추스를 것도 없었을 테니까요. 저 역시 반대편 의자에 앉아 흔들리는 사람이라는 걸, 그 세면대 앞에서 매번 다시 확인합니다.
특히 누군가를 먼저 떠나보낸 분들 앞에서, 저는 아직도 잘 다스리지 못합니다. 남겨진 사람이 "제가 그때 조금만 더 알아챘더라면" 하고 자기를 탓하는 걸 들을 때. 그 자책이 사실은 그 사람을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의 다른 이름이라는 걸 알기에, 그걸 듣는 제 마음도 같이 내려앉습니다. 그런 애도의 자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섣불리 위로의 말을 얹는 게 아니라 그저 그 무게 옆에 잠깐 같이 앉아 있는 것뿐일 때가 많아요.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굳이 감추지 않은 채로요. 말은 자꾸 미끄러지지만, 함께 잠깐 젖은 눈은 미끄러지지 않으니까요.
그러니 이 글을 무슨 깔끔한 결론으로 맺지는 못하겠습니다. 애초에 그런 결론이 없는 이야기예요.
저는 여전히, 어떤 날은 너무 무심하고 어떤 날은 너무 흔들립니다. 매번 완벽하게 그 사이 어딘가에 서 있는 균형 잡힌 의사이지는 못해요. 다만 이제는, 흔들리는 저를 결함으로 여기지는 않게 됐습니다. 언제 그 흔들림을 앞사람에게 보여도 되는지, 언제는 화장실에서 조용히 추슬러야 하는지 — 그걸 매 순간 새로 가늠하는 것, 딱 거기까지가 지금의 제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오늘도 어느 진료실에서는, 한 의사가 목젖 아래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잠깐 저울질을 하고 있을 겁니다. 지금 이 눈을 보여도 되는 순간인지, 아닌지. 그 조용한 저울질이야말로, 감정을 없애는 것도 감정에 휩쓸리는 것도 아닌, 제가 아는 유일한 세 번째 길입니다.
이 글은 정신과 의사가 진료실 밖에서 쓰는 개인적인 에세이입니다. 본문의 장면과 대화는 특정 환자의 사례가 아니라, 여러 진료실의 순간에서 받은 인상을 신상이 드러나지 않도록 뭉뚱그려 각색·일반화한 것입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슬픔이나 스스로를 향한 어두운 생각이 지금 너무 무겁다면, 그 무게를 혼자 지지 마시고 정신건강 위기상담전화 ☎ 1577-0199(24시간)나 가까운 정신건강의학과의 문을 두드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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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말하면, 저는 어떤 환자를 더 좋아합니다
이 글에 은근히 기댄 자료
- 감정을 지나치게 끌어안는 것과 완전히 닫아 버리는 것, 그 양극단이 모두 대가를 치르며 결국 중요한 건 감정을 없애는 게 아니라 알아차리고 다스리는 힘이라는 정리: Weilenmann 등, "Emotion Transfer, Emotion Regulation, and Empathy-Related Processes in Physician-Patient Interactions," Frontiers in Psychiatry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