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성장애로 진료를 이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세 이름과 마주칩니다. 리튬, 데파코트(발프로에이트), 라믹탈(라모트리진). 진료실에서는 이 셋을 '기분안정제 3대장'이라 부르곤 하죠. 상담을 하다 보면 "그래서 셋 중에 뭐가 제일 좋은 약이냐"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질문이 나올 때마다 방향을 살짝 틀어 답하게 됩니다. 셋은 서로 자리를 다투는 사이가 아니라, 잘하는 국면이 애초에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순위를 매기는 대신, 세 약을 나란히 놓고 어떤 상황에 어떤 약이 어울리는지를 지도처럼 그려 보려 합니다. (약 하나하나의 자세한 이야기는 글 끝에 링크로 이어 두었습니다.)
왜 '기분안정제'가 치료의 중심일까
양극성장애는 조증(들뜸)과 우울 사이를 오가는 재발성 질환입니다. 그래서 진짜 승부는 지금 눈앞의 삽화 하나를 끄는 데 있지 않습니다. 다음 파도가 오지 않게 막는 것(유지치료), 여기에 치료의 무게가 실립니다. 게다가 우울하다는 이유로 항우울제만 단독으로 밀어붙이면 도리어 조증에 불을 붙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조울증에서는 기분을 한가운데로 붙잡아 두는 기분안정제가 축이 되고, 3대장이 바로 그 축을 지키는 대표 선수들입니다.
이건 교과서 속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핀란드에서 조울증 환자 1만 8천여 명을 국가 등록자료로 추적한 연구를 보면, 여러 약을 통틀어 재입원을 가장 잘 막아준 경구약이 리튬이었습니다(정신과적 재입원 위험비 0.67, 전체 입원 0.71). 흔히 처방되는 쿼티아핀은 0.92로 생각보다 미미했고요1. 더 최근에는 스웨덴에서 10만 5천여 명을 대상으로, 같은 사람의 약 먹던 기간과 안 먹던 기간을 맞대어 비교하는 방식(within-subject)의 연구가 나왔습니다. 여기서도 우울 삽화로 인한 입원을 유의하게 줄인 건 리튬 단독요법 하나였고(위험비 0.75), 반대로 항우울제 단독 사용은 우울 입원도 조증 입원도 늘리는 쪽이었습니다2.
같은 사람 안에서 비교했다는 게 왜 중요하냐면, 관찰연구의 고질병이 "애초에 상태가 나쁜 사람에게 센 약이 갔다"는 편향이거든요. 그 편향을 상당 부분 걷어낸 뒤에도 리튬이 남았다는 뜻입니다.
3대장, 각자 잘하는 게 다르다
- 리튬: 70년 된 표준. 조증과 우울 양쪽 재발을 모두 예방하고, 정신과 약 중 거의 유일하게 자살 위험을 낮추는 근거를 가졌습니다.
- 데파코트(발프로에이트): 급성 조증을 빠르게 잡고, 조증과 우울이 섞인 혼재삽화·급속순환에 강합니다.
- 라믹탈(라모트리진): 조증이 아니라 '우울 쪽'의 재발을 막는 데 특화된, 결이 다른 기분안정제입니다.
세 약이 서로 다른 국면을 맡는다는 건 진료지침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캐나다·국제양극성장애학회 합동 지침(CANMAT/ISBD)에서 유지치료 1차 약은 리튬·쿼티아핀·디발프로엑스·라모트리진·아세나핀·아리피프라졸로 나란히 올라가 있지만, 급성 조증 목록에는 라모트리진이 없고, 반대로 1형 양극성 우울 목록에는 리튬과 라모트리진이 앞줄에 서고 디발프로엑스는 뒤로 밀립니다 (Yatham 등, Bipolar Disorders 2018 / 2023 근거 업데이트). 같은 '기분안정제'라는 이름을 달고 있어도 담당 구역이 다르다는 걸, 지침이 목록의 순서로 말해주고 있는 셈이죠.
뇌에서 무슨 일을 하길래
솔직히 말하면, 세 약 모두 "왜 듣는지"가 완전히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 리튬은 1949년에 효과가 먼저 발견되고 기전 연구가 70년째 뒤따라가는 중이니까요. 다만 지금까지 알려진 그림을 아주 거칠게 옮기면 이렇습니다.
- 리튬은 신경세포 안쪽의 신호전달 회로(이노시톨 경로, GSK-3β 같은 효소)에 개입합니다. 수용체 하나를 막는 식이 아니라 세포 안의 볼륨 조절기를 살짝 낮춰 두는 쪽에 가깝습니다. 효과가 나타나는 데 몇 주가 걸리는 이유도 여기 있고요.
- 데파코트는 원래 항경련제입니다. 나트륨 통로를 안정시키고 억제성 신경전달물질인 GABA를 늘리는 방향으로 작용하죠. 뇌가 과하게 흥분해 달려나가는 상태를 브레이크로 눌러 세우는 그림이라, 급성 조증에서 반응이 빠른 것과 결이 맞습니다.
- 라믹탈도 항경련제 출신인데, 이쪽은 흥분성 신경전달물질인 글루타메이트가 과하게 쏟아지는 걸 줄입니다. 신기하게도 임상에서 드러나는 얼굴은 '진정'이 아니라 가라앉는 쪽을 막아 세우는 역할입니다.
환자분들께는 이렇게 설명드립니다. 데파코트가 브레이크라면, 라믹탈은 내리막에서 차가 굴러가지 않게 받쳐주는 고임목이고, 리튬은 아예 도로의 경사 자체를 완만하게 깎아주는 공사에 가깝다고요. 비유는 비유일 뿐이지만, 왜 세 약을 겹쳐 쓰는 일이 생기는지는 이 그림으로 대체로 납득하시더군요.
한눈에 비교
| 약 | 가장 강한 영역 | 상대적 약점 | 꼭 알아둘 점 |
|---|---|---|---|
| 리튬 | 조증·우울 양쪽 예방, 자살 예방 | 혼재·급속순환엔 상대적 약세 | 좁은 안전역, 혈중농도·신장·갑상선 정기 검사 |
| 데파코트 | 급성 조증·혼재·급속순환, 빠른 진정 | 우울 예방은 약함 | 기형유발성 커 가임기 여성 신중 |
| 라믹탈 | 양극성 우울 예방 | 급성 조증엔 무력 | 발진(SJS) 때문에 6주간 천천히 증량 |
표 · 조울증 기분안정제 3대장 대략 비교 (개별 선택은 전문의 판단)
검사지에 찍히는 숫자, 무슨 뜻일까
리튬을 드시는 분들이 가장 많이 묻는 게 "그 피검사 수치가 도대체 뭐냐"는 겁니다. 진료지침이 제시하는 리튬의 목표 혈중농도는 대체로 0.8~1.2 mEq/L, 디발프로엑스는 50~100 μg/mL 구간입니다. 리튬은 시작 후 치료 범위 안에 드는 값을 두 번 연속 확인한 뒤, 이후에는 최소 3~6개월마다 다시 확인하는 것이 권고됩니다3.
이 숫자가 유별나게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리튬의 안전역이 좁기 때문입니다. 효과를 내는 농도와 독성이 시작되는 농도 사이가 다른 약보다 붙어 있어요. 그래서 탈수, 무리한 다이어트, 여름철 땀, 소염진통제(NSAIDs)나 일부 혈압약처럼 농도를 밀어 올리는 요인이 생기면 그날부터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여름에 등산 다녀오신 뒤 손 떨림이 심해져 오시는 분이 해마다 몇 분씩 계십니다. 채혈은 보통 마지막 복용 후 12시간쯤 지난 아침에 하는데, 전날 밤 약을 늦게 드셨거나 아침 약을 먼저 드시고 오면 수치가 실제보다 높게 나와 괜한 감량을 하게 됩니다. 채혈 전날 복용 시간만큼은 꼭 기억해 오시라고 당부드리는 이유입니다.
부작용 이야기도 숫자로 보면 균형이 잡힙니다. 리튬의 장기 부작용을 385건의 연구로 종합한 메타분석에서, 임상적 갑상선기능저하증은 대조군보다 확실히 늘었지만(오즈비 5.78), 소변 농축능은 약 15% 감소하는 정도였고 투석까지 간 경우는 0.5%에 그쳤습니다. 선천기형·탈모·피부질환의 유의한 증가는 확인되지 않았고요4. 즉 "리튬은 콩팥을 망가뜨린다"는 통설은 과장에 가깝고, 대신 갑상선과 부갑상선(칼슘)은 정말로 챙겨야 한다는 쪽이 실제 그림입니다.
반대로 데파코트의 임신 관련 위험은 과장이 아닙니다. 유럽 임신·항경련제 등록연구(EURAP)에서 단독요법 7,355건을 분석했더니 주요 선천기형 발생률이 발프로에이트 10.3%로 가장 높았고, 라모트리진 2.9%, 레베티라세탐 2.8%였습니다. 발프로에이트는 용량이 올라갈수록 위험이 뚜렷하게 증가했습니다5. 열 명 중 한 명. 이 숫자를 알고 나면, 가임기 여성 진료에서 데파코트를 한 발 물리는 이유를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이럴 땐 이 약: 선택 가이드
- 들뜬 조증이 뚜렷하거나, 자살 위험이 큰 경우 → 제일 먼저 손이 가는 건 리튬입니다. 두 약을 정면으로 맞붙인 연구(BALANCE)에서도 리튬이 발프로산보다 재발 예방에 앞섰고 (BALANCE 시험, Lancet 2010, 330명·최대 2년 추적에서 리튬이 발프로산보다 재발이 적었습니다. 위험비 0.71, p=0.047), 자살 예방이라는 근거는 아직 리튬만이 쥐고 있습니다6.
- 조증에 우울이 섞였거나(혼재), 급속순환이거나, 지금 당장 진정이 필요한 경우 → 이럴 때는 데파코트가 손에 익습니다.
- 자꾸 우울로 가라앉는 것이 주된 문제인 경우 → 라믹탈이 제 몫을 합니다.
- 가임기 여성 → 데파코트는 태아 위험 때문에 한 발 뒤로 물리고, 라믹탈·리튬을 먼저 저울에 올립니다.
- 한 약으로 부족하면 → 실제 진료에서는 병용(예: 리튬 + 라믹탈로 조증·우울 양쪽을 함께 방어)도 드물지 않습니다.
몇 가지는 숫자를 덧붙여 두는 편이 낫겠습니다. 자살 예방 근거부터. 48개 무작위 대조시험을 모은 메타분석에서 리튬은 위약보다 자살 사망을 줄였고(오즈비 0.13), 모든 원인 사망도 낮췄습니다(0.38). 다만 자해 예방은 통계적으로 확실하지 않았습니다(0.60, 신뢰구간이 1을 넘음)7. 저자들은 리튬이 재발을 줄여서만이 아니라 충동성과 공격성 자체를 낮춰 자살을 막는 것 같다고 봅니다. 이 대목이 임상적으로 큰데, 위험 신호가 보일 때 약 선택의 무게추를 한쪽으로 확 기울이게 만들거든요. (지금 그런 신호가 걱정된다면 자살 경고 신호와 도움 요청법을 함께 읽어보시길.)
라믹탈이 '우울 쪽'을 맡는다는 말도 근거가 있습니다. 1형 양극성장애 환자 638명을 18개월간 추적한 두 개의 위약대조 시험을 묶어 보니, 어떤 삽화로든 개입이 필요해지기까지의 기간이 위약 86일, 리튬 184일, 라모트리진 197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뜯어보면 라모트리진은 우울 쪽에서, 리튬은 조증 쪽에서 각자 강했습니다8. 같은 '재발 예방'이라는 성적표 안에 서로 다른 과목이 들어 있었던 셈이죠. 리튬 + 라믹탈 병용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3대장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지침에서는 쿼티아핀(쎄로켈), 아리피프라졸(아빌리파이), 루라시돈(라투다) 같은 비정형 항정신병약도 유지·우울 국면의 1차 선택지로 함께 올라가 있습니다. 실제 처방전에는 기분안정제 하나에 이 중 하나가 얹히는 조합이 아마 가장 흔할 겁니다.
진료실에서 자주 나오는 질문들
"좋아졌는데 언제까지 먹어요?"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고, 가장 대답하기 미안한 질문입니다. 조울증에서 약은 삽화를 끄는 소화기가 아니라 불이 안 나게 유지하는 배선 공사에 가깝습니다. 좋아졌다는 건 약이 일을 하고 있다는 신호지, 이제 필요 없다는 신호가 아닙니다. 재발 횟수와 삽화의 심각도, 지금 생활의 안정성을 놓고 매번 다시 계산하는 문제라 "몇 년"이라고 잘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라믹탈은 왜 이렇게 찔끔찔끔 올려요?" 발진 때문입니다. 대부분은 지나가는 두드러기지만, 드물게 스티븐스-존슨 증후군(SJS)이라는 중증 피부반응으로 번질 수 있고 그 위험은 초기 증량 속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6주에 걸쳐 계단을 올라갑니다. 답답하시겠지만 이 6주는 안전을 사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약을 한동안 걸렀다면 다시 처음 용량부터 올라가야 한다는 점, 이건 꼭 기억해 주세요. 자기 판단으로 원래 용량부터 재개하는 것이 실제로 위험한 순간입니다.
"우울한데 왜 항우울제를 안 주세요?" 조울증의 우울은 단극성 우울과 대처법이 다릅니다. 앞서 본 스웨덴 연구에서 항우울제 단독 사용은 우울 입원도, 조증 입원도 오히려 늘리는 방향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분안정제라는 바닥을 먼저 깔고, 필요하면 그 위에 얹는 순서를 지킵니다. 약을 아끼는 게 아니라 순서를 지키는 겁니다.
"술은요?" 이건 제가 먼저 묻습니다. 술은 삽화 자체의 방아쇠이면서 약 농도와 간 수치를 함께 흔들어요. 데파코트를 드시는 분이라면 특히요. 자세한 이야기는 술과 정신과 약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세 약에 공통된 원칙 3가지
1. 임의로 끊지 않기. 특히 리튬은 갑자기 중단하면 조증이 반동적으로 재발하기 쉽습니다. 중단·감량은 반드시 의사와 계획적으로. 2. 정기 모니터링. 약마다 지켜볼 것이 다릅니다(리튬은 혈중농도·신장·갑상선, 데파코트는 간·혈소판, 라믹탈은 발진). 3. '정답 약'은 없다. 세 약 중 최선은 그 사람의 삽화 양상·성별·임신 계획·부작용 민감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두 번째 항목은 표로 정리해 두는 편이 실용적일 것 같습니다.
| 약 | 주로 보는 검사 | 대략의 주기 | 조심할 상황 |
|---|---|---|---|
| 리튬 | 혈중농도, 신기능(크레아티닌), 갑상선기능, 칼슘 | 안정기 기준 3~6개월 | 탈수·고열·설사, 소염진통제·이뇨제 병용, 저염식 |
| 데파코트 | 혈중농도, 간기능, 혈소판(전혈구검사) | 초기 잦게, 이후 정기적으로 | 임신 가능성, 음주, 원인 모를 멍·출혈 |
| 라믹탈 | 정해진 혈액검사보다 피부 관찰 | 증량기 내내 매일 | 발진 + 발열·점막 병변, 복용 중단 후 재개 |
표 · 실제 검사 항목과 주기는 상태·병용약·연령에 따라 달라집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검사를 챙기라는 말이 "위험한 약이니 겁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정기적으로 들여다보기 때문에 오래 안전하게 쓸 수 있는 약들이에요. 리튬의 부작용 프로파일을 종합한 앞의 메타분석도 결론은 "감시하면서 쓰면 이익이 위험보다 크다"는 쪽이었습니다. 약을 시작하는 게 망설여진다면 약 먹기가 꺼려질 때와 약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를 함께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각 약, 더 깊이 알고 싶다면
💬 전문의 한마디
조울증 약을 고르는 일은 "가장 센 약 찾기"가 아니라 "이 사람의 파도에 맞는 약 찾기"에 가깝습니다. 조증이 거센 분께는 리튬이나 데파코트를, 우울로 자꾸 내려앉는 분께는 라믹탈을, 자살이 걱정되는 분께는 리튬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리고 한 약으로 부족하면 둘을 겹쳐 양쪽을 지키기도 하죠. 중요한 건, 어떤 약이든 혼자 조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기적으로 살피며 함께 맞춰가면, 이 세 약은 조울증의 파도를 오래 다스릴 든든한 기둥이 됩니다.
정리하자면, 리튬·데파코트·라믹탈은 서로를 대신하는 약이 아니라 각자 다른 파도를 맡는 세 기둥입니다. 어느 하나가 왕좌에 앉는 게 아니라, 내 병의 모양에 겹쳐지는 약이 나에게는 가장 좋은 약이 됩니다. 위 링크에서 세 약을 하나씩 들여다보시고, 마지막 선택만큼은 꼭 전문의와 마주 앉아 정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