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을 꺼내는 분들에게는 공통된 준비 동작이 있습니다. 숨을 한 번 고르고.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리고. 어쩐지 혼날 사람의 표정을 미리 지어 보이고요.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말씀하시죠. "저… 약은 안 먹고 싶은데요."

그때 제 얼굴을 보셨다면 좀 김이 샜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대개 웃거든요. 설득의 서론을 꺼내는 게 아니라, "아, 네. 그러실 수 있어요" 하고 그냥 끄덕입니다. 오늘은 그 끄덕임 뒤에 있던 말들을 해볼까 합니다. 진료 시간이 늘 짧아서 삼켰던, "약은 안 먹고 싶어요"라는 말에 대한 제 진짜 속마음이요.

'나약해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망설이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재미있는 게 있습니다. 다들 나름의 논리가 있어요. 즉흥적인 거부가 아니라, 꽤 오래 굴려본 생각들입니다.

"한번 먹기 시작하면 평생 못 끊는 것 아닌가요." "약을 먹으면 내가 내가 아닌, 멍한 사람이 될까 봐요." "이건 그냥 제 의지가 약해서 그런 건데, 약으로 때우는 게 맞나요." "기록이 남아서 나중에 불이익이 있을까 봐요."

유난이라고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대부분 꽤 합리적인 질문이에요. 내 몸에 매일 무언가를 넣겠다는 이야기인데, 아무 의심 없이 넙죽 삼키는 쪽이 더 이상하지 않나요. 그래서 저는 이 말을 들으면 방어할 거리를 찾는 대신 속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좋아, 이분은 자기 몸을 진지하게 여기는 분이구나.'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이 합리적인 망설임 위에 엉뚱한 죄책감이 얹힐 때요. "약에 기대는 건 나약한 거야"라는 죄책감.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이 문장 하나 하려고, 사실 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진짜로 걱정하는 건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저는 "약을 안 먹겠다"는 결정 자체는 별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쓰이는 건 다른 지점이에요 — 그 결정을 오해나 두려움 때문에 내리게 될 때입니다.

제일 자주 마주치는 오해는 이겁니다. "마음의 문제는 마음으로, 의지로 이겨내야 진짜다." 문장으로만 보면 꽤 근사하죠. 그런데 어떤 순간엔 이게 참 잔인해집니다. 시력이 나쁜 사람에게 "정신력으로 칠판을 똑바로 봐라"라고 하지는 않잖아요. 안경을 썼다고 그 사람 의지가 부족한 것도 아니고요. 뇌라는 장기도 가끔 그런 도움이 필요한 상태가 됩니다. 그건 성격의 결함이 아니라 몸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제가 진짜로 안타까운 장면은 따로 있습니다. 충분히 편해질 수 있는 분이 "이건 내가 이겨내야 하는 거야"라며 혼자 몇 달을, 몇 년을 더 앓는 경우요. 버티는 동안 조용히 새어 나가는 것들이 있습니다. 잠. 관계. 일.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좋아할 기운. 그게 너무 아깝습니다.

약은 목발이지, 목적지가 아닙니다

제가 약을 권할 때 머릿속에 그리는 그림은 생각보다 소박합니다. 목발이에요.

다리가 부러졌는데 목발을 짚는다고 나약하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뼈가 붙으면? 목발은 치웁니다. 좋은 치료의 목표는 약을 평생 붙들게 하는 게 아니라, 언젠가 그걸 편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상태로 데려다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경우, 증상이 안정되고 시간이 지나면 의사와 상의해 천천히 줄이고 끊는 과정을 밟게 됩니다. "한번 먹으면 평생"이라는 말이 대개 사실이 아닌 이유예요.

물론 더 오래 도움이 필요한 분들도 계십니다. 그것도 괜찮습니다. 시력이 계속 나쁜 사람이 안경을 계속 쓰는 걸, 우리가 부끄러워하지는 않으니까요.

양쪽의 시끄러운 소음 사이에서

여기서 진료실에선 차마 못 했던 이야기를 하나 더 하겠습니다. 저는 늘 두 가지 시끄러운 목소리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한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냥 약 먹고 빨리 나으면 되지,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마음의 고통을 알약 하나로 너무 쉽게 정리해버리는 태도죠. 반대쪽은 정반대로 겁을 줍니다. "정신과 약은 독이다, 중독이다, 뇌를 망가뜨린다." 유튜브와 커뮤니티에 이런 이야기가 넘칩니다. 조회수도 잘 나오고요.

솔직히 말하면, 양쪽 다 장사에 가깝습니다. 한쪽은 편의를 팔고, 다른 쪽은 공포를 팝니다. 진실은 대체로 그 사이 어딘가, 목소리가 크지 않은 조용한 자리에 있어요 — "이 약은 어떤 사람에겐 큰 도움이 되고, 어떤 사람에겐 안 맞을 수 있으며, 부작용도 효과도 사람마다 다르다"는, 하나도 안 자극적이고 조회수도 안 나오는 자리요. 저는 그 재미없는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 이렇게 해봐요

그러니 "약은 안 먹고 싶어요"라고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 말을 들은 뒤에 제가 실제로 하는 일은 이런 것들이에요.

  • 억지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는데 떠밀려 삼킨 약은, 대개 며칠 만에 서랍 속으로 들어갑니다. 서로에게 손해예요.
  • 낮게 시작해서 같이 지켜봅니다. 겁나는 만큼 적게 시작하고, "이거 먹고 어땠는지" 다음에 만나 같이 봅니다. 안 맞으면 바꾸면 되고요.
  • 약이 유일한 길도 아닙니다. 약 없이 가는 길이 분명히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면이라면 불면증 인지행동치료(CBT-I)가 오히려 1차 권장 치료이고, 약을 줄이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다만 "약은 절대 안 돼"가 너무 단단해진 나머지, 정작 약이 큰 도움이 될 순간까지 놓치지는 않기로 해요.
  • 문은 늘 열어둡니다. 오늘 안 먹기로 했다가 다음 달에 마음이 바뀌어도 괜찮습니다. 반대도 마찬가지고요. 그건 변덕이 아니라, 자기 상태를 살피는 성실함입니다.

마치며

우리가 진료실에서 함께 정할 것은 사실 '약이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당신이 조금 덜 아프게, 조금 더 당신답게 사는 가장 좋은 길이 무엇이냐'입니다. 약은 그 길 위에 놓인 여러 도구 중 하나예요. 쓸 만하면 쓰는 거고, 안 써도 되면 안 쓰는 겁니다.

그러니 그 말을 꺼내기 전에 숨을 고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약은 안 먹고 싶어요"라는 말에, 저는 반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되묻고 싶을 뿐이에요. "좋아요. 그럼 우리, 당신이 편해질 방법을 같이 한번 찾아볼까요?"

그 대화가 시작되는 순간, 약을 먹든 안 먹든 이미 뭔가는 시작된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 그 문장을 삼킨 채 진료실을 나선 분이 있다면, 다음번엔 숨 고르지 말고 그냥 던져주세요. 저는 웃고 있을 겁니다.


이 글은 정신과 의사가 진료실 밖에서 편하게 쓰는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특정한 진단이나 치료에 대한 조언이 아니며, 마음이 힘드시다면 혼자 견디지 마시고 가까운 정신건강의학과나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24시간)의 문을 두드려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