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를 하다 보면, 방 안의 공기가 미묘하게 바뀌는 순간이 있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가 조심스럽게 이 말을 꺼낼 때입니다.

"약을 한번 써보는 건 어떨까요?"

그 순간, 많은 분의 표정이 살짝 굳습니다. 방금 전까지 힘든 이야기를 담담히 하시던 분도, '약'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눈빛이 흔들립니다. 그리고 대개 비슷한 말들이 이어집니다. "제가… 약까지 먹어야 할 정도인가요?" "그거 한번 먹으면 평생 못 끊는다던데요." "약 먹으면 사람이 좀 멍해진다는데, 진짜 저 자신이 사라지는 건 아닐까요?"

오늘은 그 굳어진 표정 뒤에 있는 마음들에 대해, 진료실에선 시간이 없어 늘 다 못 했던 대답을 해보려 합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저는 약을 권하려는 게 아닙니다. 약을 오해로 두려워하지는 않으셨으면 하는 것뿐입니다. 좋은 점도, 정직한 한계도, 숨기지 않고 말씀드릴게요.

"한번 먹으면 평생 못 끊는다면서요" — 중독이라는 오해

가장 자주 듣는, 그리고 가장 뿌리 깊은 두려움입니다. '정신과 약 = 중독'이라는 등식이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흔히 쓰는 항우울제는 중독되는 약이 아닙니다.

중독(의존)에는 분명한 얼굴이 있습니다. 점점 더 센 용량을 원하게 되고(내성), 약을 구하는 데 삶이 휘둘리고, 끊으려 해도 갈망 때문에 다시 손이 갑니다. 그런데 항우울제는 이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용량이 스멀스멀 올라가지도 않고, 기분을 인위적으로 '띄워' 주지도 않아서 취하려고 찾게 되는 약이 아닙니다. 영국 왕립정신과의사회도 "항우울제는 중독성 물질이 아니다" 라고 분명히 말합니다1.

다만, 여기서 제가 정직하게 덧붙여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중독은 아니지만, 오래 복용한 뒤 갑자기 끊으면 몸이 잠시 당황하는 '중단 증상' 은 있을 수 있습니다. 어지럽거나, 속이 울렁이거나, 전기가 찌릿 지나가는 느낌 같은 것들이요. 최근에는 이 중단 증상이 예전 생각보다 더 흔하고 오래갈 수 있다는 점도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약을 뺄 때는 한 번에 뚝 끊지 않고, 의사와 상의하며 서서히 줄입니다. 이건 '중독돼서 못 끊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 몸이 적응할 시간을 주는 것뿐이에요.

핵심 — '끊을 때 조심해서 줄인다'와 '중독돼서 못 끊는다'는 전혀 다른 말입니다. 항우울제는 갈망을 만들지 않습니다. 다만 매너 있게 작별하면 됩니다.

그리고 한 가지는 솔직히 구분해 드려야겠습니다. 수면제·신경안정제로 쓰는 일부 벤조디아제핀 계열은 정말로 의존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들은 이런 약을 되도록 짧게, 적게 쓰려고 오히려 더 조심합니다. '정신과 약'이라고 다 같은 약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결을 아는 사람이 곁에서 조절해 준다는 것 — 그게 병원에서 약을 받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약이 진짜 나를 바꿔놓는 거 아니에요?" — 사라짐에 대한 두려움

두 번째로 깊은 두려움은 이겁니다. "약이 내 진짜 감정을, 진짜 나를 지워버리면 어떡하죠."

저는 이 두려움을 정말 이해합니다. 내 슬픔과 예민함이 못마땅해도, 그건 나를 이루는 일부니까요. 그걸 약으로 '지운다'는 상상은 무섭습니다. 그런데 제가 진료실에서 실제로 훨씬 자주 듣는 말은 정반대입니다. 약이 어느 정도 듣기 시작한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세요. "이제야 원래의 저로 돌아온 것 같아요."

우울은 없던 슬픔을 더하는 게 아니라, 원래 있던 즐거움·의욕·집중을 덮어 버리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좋은 약은 새로운 감정을 심는 게 아니라, 그 두꺼운 이불을 걷어내서 눌려 있던 원래의 당신이 숨 쉴 자리를 만들어 줍니다. 없던 기쁨을 주입하는 게 아니라, 있던 기쁨을 되찾게 해주는 것에 가까워요.

물론, 여기서도 저는 정직하고 싶습니다. 감정이 다소 밋밋해지는 부작용은 실제로 있습니다. 한 조사에서는 항우울제를 먹는 분의 약 46% 가 '예전보다 감정이 좀 무뎌진 느낌'을 보고했습니다2. 적지 않은 숫자죠. 하지만 중요한 건, 이게 대개 용량과 관련이 있고, 조절하면 상당 부분 되돌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약 먹으니 좀 멍해요"라는 말은 참고 견딜 신호가 아니라, 저에게 꼭 말씀해 주셔야 할 신호입니다. 용량을 낮추거나 약을 바꾸면 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약은 근본 치료가 아니라 회피 아닌가요"

세 번째 오해는 조금 더 철학적입니다. "약으로 증상만 누르는 건 문제를 진짜로 해결하는 게 아니잖아요. 상담으로 근본 원인을 풀어야죠."

반은 맞고, 반은 오해입니다. 마음의 문제에 이야기와 성찰이 중요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깊은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람에게 수영 이론을 강의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 힘, 상담 이야기가 귀에 들어올 만큼의 여유 — 약은 종종 그 최소한의 지반을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실제 연구들은 대체로 이렇게 말합니다. 약과 심리치료를 함께 하는 것이, 어느 한쪽만 하는 것보다 낫다고요. 52개 연구·3천 6백여 명을 모은 대규모 분석에서도 병행 치료가 약만 쓰는 것보다 뚜렷이 효과적이었고, 그 효과는 치료가 끝난 뒤 2년까지도 이어졌습니다3. 약이 상담의 경쟁자가 아니라 동료라는 뜻이에요.

저는 이럴 때 목발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다리가 부러진 사람에게 "목발은 근본 치료가 아니니 그냥 참고 걸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목발을 짚는 건 회피가 아니라, 뼈가 붙는 동안 걸을 수 있게 해주는 지혜입니다. 그리고 다 나으면, 목발은 자연스럽게 내려놓게 됩니다. 약도 많은 경우 그렇습니다.

"약 먹는 건, 결국 제가 약해서잖아요"

그리고 이 말. 어쩌면 가장 마음 아픈 오해입니다. "의지로 이겨내야 하는데, 약에 기대는 건 지는 거 같아요."

여기에는 제가 늘 하는 되물음이 있습니다. 당뇨가 있는 분이 인슐린을 맞는 걸 두고 "의지가 약해서"라고 하나요? 갑상선이 제 일을 못 할 때 호르몬 약을 먹는 걸 "정신력 부족"이라고 하나요? 뇌도 몸의 장기입니다. 신경전달물질이라는 화학 신호로 돌아가는, 아주 정교하고 아주 고장도 잘 나는 장기요. 그 신호 균형이 무너진 걸 약으로 돕는 게 어째서 '나약함'이 되어야 할까요.

오히려 저는, 도움을 청하러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대단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약을 먹는 건 삶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다시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결정한 사람의 적극적인 선택에 가깝습니다.

그래도, 약이 만능은 아닙니다

여기까지 읽으시면 제가 약 예찬론자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반대편 이야기도 꼭 해야겠습니다. 약은 만능이 아니고, 모두에게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 부작용은 분명히 있습니다. 초기의 울렁임, 졸림, 아까 말한 감정 둔마 같은 것들요. 대부분 조절되지만, 없는 척할 일은 아닙니다.
  • 첫 약이 나와 안 맞을 수 있습니다. 이건 실패가 아니라 흔한 과정입니다. 사람마다 잘 듣는 약이 달라서, 몇 번의 조정을 거치는 게 오히려 정상에 가까워요.
  • 가벼운 경우라면 상담이나 생활의 변화만으로 충분한 분들도 많습니다. 모든 길이 약으로 통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약을 쓸지 말지는, 제가 일방적으로 정하는 게 아니라 함께 정하는 일입니다. 당신의 걱정, 당신의 가치관,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 — 그걸 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의논하는 겁니다. "약은 싫어요"라고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그 말도 진료의 중요한 일부니까요.

마지막으로

정신과 약은 당신을 대신 살아주는 약이 아닙니다. 당신이 다시 당신의 삶을 살아갈 힘을, 잠시 빌려주는 것에 가깝습니다. 빌린 힘으로 다시 걷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당신의 이야기와 당신의 선택이 진짜 치료를 이어갑니다.

그러니 혹시 지금, '약까지 먹어야 하나' 하는 그 문장 앞에서 오래 머뭇거리고 계신다면 — 두려움의 상당 부분은 오해에서 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오해를 혼자 인터넷에서 키우지 마시고, 진료실에서 저에게 그대로 물어봐 주세요. "이거 중독되나요?" "저 멍해지나요?" "평생 먹어야 해요?" 저는 그 질문들을 정말 좋아합니다. 그건 당신이 자기 삶을 신중하게 대하고 있다는 증거거든요.

와서, 물어봐 주세요.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제가 다 정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글은 일반적인 정보와 이해를 돕기 위한 글이며, 특정 개인의 진단·처방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약의 시작·변경·중단은 반드시 주치의와 상의해 결정하세요.

지금 많이 힘들거나 위급하다고 느껴진다면, 혼자 견디지 마세요. 정신건강 위기상담전화 ☎ 1577-0199(24시간)나 가까운 정신건강의학과에 꼭 연락해 주세요.

함께 보면 좋은 자료

  • 항우울제는 중독성 물질이 아니지만, 끊을 때는 서서히 줄여야 한다 — 영국 왕립정신과의사회 — Stopping antidepressants
  • 약과 심리치료를 함께 하면 약만 쓰는 것보다 효과적이다(52개 연구·3,623명) — Cuijpers 등, World Psychiatry 2014 — PubMed
  • 항우울제 복용자의 약 46%가 감정 둔마를 보고 — Goodwin 등, Journal of Affective Disorders 2017 — PubMed

참고문헌

  1. 영국 왕립정신과의사회 — 항우울제 끊기
  2. Goodwin 등, Journal of Affective Disorders 2017
  3. Cuijpers 등, World Psychiatry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