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조금 위험한 고백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어떤 환자를 더 좋아합니다.
이 문장을 쓰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어요. 의사가 환자를 두고 좋고 덜하고를 따진다니, 어쩐지 해서는 안 될 말 같잖아요. 우리는 모두를 똑같이 대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배웠고, 저도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그런데 정직하게 말하면, 진료실 문이 열리고 오늘의 예약자 명단을 훑을 때, 제 마음은 이미 조용히 온도를 바꿉니다. 아, 이분은 반갑다. 아, 이 시간은 조금 버겁겠다.
명단을 보며 나도 모르게 어깨가 펴지는 이름이 있고, 반대로 살짝 숨을 고르게 되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건 제 의지로 켜고 끄는 스위치가 아니에요. 그냥, 사람이라 그렇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좋아하는 마음이 진료에 슬며시 끼어든다는 것.
이야기가 잘 통하고, 제 농담에 웃어주고, 지난번 조언을 실천해 와서 "선생님 말대로 했더니 좋았어요" 하고 말해주는 분이 있으면, 저는 나도 모르게 그 진료에 5분을 더 씁니다. 5분이 별거냐 싶겠지만, 뒤에 기다리는 분들에게서 조용히 빌려온 5분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져요. 저는 그날 하루의 다정함을, 저를 기분 좋게 해준 사람에게 조금 더 얹어주고 있는 셈입니다. 공정한가? 솔직히, 아닙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이 대목은 아주 조심해서 말하고 싶어요. 세상에 '버거운 환자'라는 종류의 사람은 없습니다. 있는 건 제가 버겁다고 느낀 어떤 만남이고, 그 버거움의 대부분은 사실 그 사람 것이 아니라 제 것이더라고요. 이걸 깨닫는 데 저는 꽤 오래 걸렸습니다.
가공해서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한동안, 말끝마다 저를 시험하는 것처럼 느껴지던 분이 있었어요. "선생님은 제 말 진짜로 믿으세요?" "그 약, 정말 효과 있는 거 맞아요?" 진료 내내 제가 시험대에 오른 기분이 들었고, 그 방을 나설 때면 유독 진이 빠졌습니다. 처음엔 저 사람이 참 까다롭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저녁, 유난히 피곤한 진료를 마치고 앉아 곰곰이 되짚어 보니, 그 피곤이 저에 대해 알려주는 게 있었습니다. 저는 의심받는 걸 못 견디는 사람이더라고요. 인정받고 싶고, 좋은 의사이고 싶고, "역시 선생님"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제 안에 생각보다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저를 시험하는 것 같은 그 질문들이 유독 아팠던 거예요. 그건 그분의 문제라기보다, 제 오래된 허영심이 눌린 자리였습니다.
또 어떤 분은, 볼 때마다 제 무력함을 확인시켜 주는 것 같았습니다. 이 각도 저 각도로 애를 써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매번 비슷한 자리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진료. 그 방에 들어가기 전이면 저는 미리 지쳤습니다. 나중에야 알았어요. 제가 지친 건 그분 때문이 아니라, 제가 못 고쳐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분 앞에서 매번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라는 걸. 낫게 해드리지 못하는 제 무력감이 버거웠던 거지, 그분이 버거웠던 게 아니었습니다. 부끄럽지만, 한동안 저는 그 둘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정신의학에는 이 감정을 부르는 오래된 이름이 있습니다. 역전이(countertransference)라고 해요.
옛날엔 이걸 치료자가 극복해야 할 오점 정도로 봤습니다. 감정이 끼어드는 건 미숙함의 증거라는 거죠. 그런데 요즘은 좀 다르게 봅니다. 역전이를 치료자가 환자에게 느끼는 감정 반응 전체로, 즉 없앨 수 없고 없애서도 안 되는 것으로 이해해요1. 흥미로운 건 그다음입니다. 여러 연구를 모아 분석했더니, 감정이 생기느냐 아니냐가 좋은 치료를 가르는 게 아니었어요. 그 감정을 알아차리고 다룰 줄 아느냐가 더 나은 치료 성과와 이어져 있었습니다.
이 발견이 저는 참 위로가 됐습니다. 감정이 없는 의사가 되라는 게 아니라, 감정을 아는 의사가 되라는 뜻이었으니까요.
이 지점에서 숫자 하나를 슬쩍 꺼내 볼게요. 겁주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 놓이는 숫자라서요.
여러 나라의 진료 자료를 모아 분석한 최근 연구를 보면, 의사들은 자기가 보는 환자의 약 17%, 그러니까 여섯 명 중 한 명쯤을 '어려운 만남'으로 느낀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밌는 건, 이 연구가 그걸 '어려운 환자'가 아니라 '어렵게 경험되는 만남'이라고 조심스럽게 표현한다는 점이에요. 어려움이 사람 안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사이에 있다는 거죠. 게다가 경력이 짧은 의사일수록 더 많은 만남을 어렵다고 느꼈습니다2. 같은 환자를 봐도 말이죠.
이 마지막 문장을 저는 여러 번 곱씹었습니다. 같은 사람을 두고 누구는 버거워하고 누구는 덜하다면, 버거움의 상당 부분은 보는 쪽에 있다는 뜻이잖아요. 제가 어리고 서툴수록, 제 안이 흔들릴수록, 세상에는 '어려운 환자'가 늘어납니다. 반대로 제가 좀 단단해지면, 어제까지 버겁던 그 만남이 오늘은 그저 한 사람의 고단한 사정으로 보이기 시작하고요. 그러니 명단을 보며 숨을 고르게 되는 이름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에 대한 정보이기 전에 오늘 제 상태에 대한 정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감정들을, 억누르는 대신 어떻게 써먹느냐.
여기서부터가 이 일의 진짜 재미이자 어려움입니다. 저는 언젠가부터 제 안에 이는 물결을 자료로 쓰기 시작했어요. 어떤 분과 이야기하고 나면 이상하게 자꾸 변명을 하게 되고, 어떤 분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지고, 어떤 분과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도 헤어지고 나면 왠지 허탈해집니다. 예전엔 이런 반응을 그냥 지나쳤는데, 지금은 잠깐 멈춰 서서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이 사람은 왜 나에게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킬까.
이게 왜 중요하냐면요. 제가 이분에게 이런 반응을 보인다면, 이분을 만나는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반응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거든요. 진료실에서 저를 자꾸 방어적으로 만드는 분이라면, 어쩌면 바깥세상도 그분을 자꾸 밀어내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 외로움이 어디서 오는지, 관계가 왜 자꾸 비슷한 모양으로 어긋나는지, 그 실마리가 바로 제 감정 안에 들어 있는 셈이에요. 그러니 제 마음에 인 물결은 방해물이 아니라 일종의 청진기입니다. 나를 통과해서 그 사람의 세계를 듣는 도구요.
물론 이걸 판단으로 쓰면 안 됩니다. "거봐, 이 사람 원래 이렇게 사람을 지치게 하는 사람이야" 하고 결론 내리는 순간, 청진기는 낙인이 됩니다. 방향이 정반대예요. 이해하려고 듣는 것과, 판정하려고 듣는 것은 겉모습이 비슷해도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저는 아직도 이 둘 사이에서 이따금 미끄러집니다.
그리고 솔직히 고백하면, 늘 잘 다루지는 못합니다.
어떤 날은 그냥 피곤해서, 알아차림이고 뭐고 없이 그 5분을 좋아하는 분에게 더 얹어주고 맙니다. 어떤 날은 버거운 감정에 휘둘려 평소보다 말이 짧아진 저를 뒤늦게 발견하고 후회하죠. 저는 제 감정을 관찰하는 훈련을 받은 사람이지만, 훈련받았다는 게 매번 성공한다는 뜻은 아니더라고요. 이건 진료실에서 저도 자주 흔들린다는 이야기나, 때로는 저도 반대편 의자에 앉는다는 고백과 같은 자리에서 나온 말입니다. 흔들리고, 도움을 받고, 감정에 휘청이는 것 — 이게 다 한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안전장치를 하나 둡니다. 어떤 만남이 유독 자꾸 걸리고, 제 감정이 아무래도 진료를 흐린다 싶으면, 혼자 끌어안지 않고 동료에게 슬쩍 의논합니다. "이런 분이 있는데 내가 자꾸 이렇게 반응하게 돼. 이거 나만 그런가?" 하고요. 때로는 제가 그분에게 좋은 짝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고, 더 맞을 사람에게 의뢰하기도 합니다. 이게 회피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걸 오히려 정직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감정에 휘둘리는 줄 알면서도 혼자 버티는 게 훨씬 위험하니까요. 나를 아는 것이, 결국 그 사람을 지키는 일이 됩니다.
가끔 이런 상상을 합니다. 감정이 하나도 없는 의사가 있다면 어떨까. 아무에게도 마음이 쓰이지 않고, 누구에게도 지치지 않는, 완벽하게 평평한 사람. 언뜻 이상적으로 들리지만, 저는 그런 의사가 조금 무섭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이 없다면 5분을 더 쓰고 싶은 유혹도 없겠지만, 애초에 누군가를 낫게 해주고 싶은 간절함도 없을 테니까요. 그 간절함과 그 편애는, 사실 같은 뿌리에서 자란 가지입니다.
그러니 좋은 의사는 감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감정을 아는 사람이라고 저는 믿게 됐습니다. 마음이 이는 걸 부끄러워하는 대신 그 마음을 재료로 삼을 줄 아는 사람. 오늘 이 만남이 유독 버겁다면, 그게 저 사람의 결함이 아니라 오늘 내 어딘가가 눌린 자리라는 걸 아는 사람. 그 앎이 있어야, 저는 좋아하는 분에게도 덜 좋아하는 분에게도 그나마 공정해질 수 있습니다. 낫게 해드리는 일이 완치가 아니라 회복에 가깝다는 걸 받아들이고 나면, 못 고쳐드린다는 무력감도 조금은 내려놓게 되고요.
그래서 다시, 처음의 고백으로 돌아갑니다. 네, 저는 어떤 환자를 더 좋아합니다. 어떤 만남은 여전히 버겁고요.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다만 이제는 그 감정을 없는 척하지 않고, 진료실 한쪽에 조용히 올려두고 이따금 들여다봅니다. 오늘 내 마음이 왜 이렇게 기울었지, 하고요.
완벽하게 공정한 날은 아마 오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오늘 제가 누구에게 5분을 더 썼는지 스스로 알고 있다는 것 — 그 정도가, 지금의 제가 드릴 수 있는 정직함입니다.
이 글은 정신과 의사가 진료실 밖에서 쓰는 개인적인 에세이입니다. 특정 진단·치료에 대한 조언이 아니며, 본문의 사례는 특정인을 알아볼 수 없도록 여러 경험을 섞고 각색한 것입니다. 마음이 많이 무겁다면 혼자 견디지 마시고, 가까운 정신건강의학과나 정신건강 위기상담전화 ☎ 1577-0199(24시간)의 문을 두드려 주세요. 그냥 오셔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