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진료실 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그림이 대충 정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무거운 침묵. 반쯤 젖은 티슈 한 뭉치. 낮게 깔린 조명 아래 누군가 흐느끼고, 의사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이는. 드라마가 오래 그렇게 그려온 탓도 있고, 솔직히 그런 순간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니까요. 티슈갑은 제 책상에서 늘 팔 닿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좀 뜻밖의 고백을 하려 합니다.

저희, 생각보다 자주 웃습니다.

울음보다 웃음이 많은 날도 있어요. 진료가 끝나고 문이 닫힌 뒤에 "아, 오늘 그 방에서 우리 좀 많이 웃었네" 싶은 날이. 이 이야기를 진료실 안에서 대놓고 하기는 좀 그렇습니다. 아파서 온 사람 앞에서 "여기 은근히 웃긴 데예요"라고 말하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니까요. 그래서 여기에 적습니다.

먼저 오해부터 풀고 싶어요. 정신과가 무거운 곳이라는 인상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립니다.

맞는 절반은 이렇습니다. 여기 오는 분들은 대개 어딘가 아파서 옵니다. 그 아픔은 진짜고, 저는 그걸 절대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틀린 절반은요, 사람이 아프다고 해서 24시간 내내 울고만 있지는 않다는 겁니다. 인간은 그렇게 생겨먹질 않았어요. 장례식장에서도 사람들은 육개장을 먹다가 옛날 얘기에 피식 웃습니다. 슬픔과 웃음은 원래 그렇게 같은 방에 앉아 있는 사이예요. 진료실이라고 다를 리가요.

그러니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그 장면을 잘 상상하지 못할 뿐이죠.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미리 말해두지만, 지금부터 나오는 장면들은 특정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진료실 순간에서 받은 인상을 신상이 드러나지 않게 뭉뚱그려 각색한 것입니다.)

한 분이 자기가 얼마나 걱정이 많은 사람인지를 설명하다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선생님, 저는요, 걱정할 게 없으면 걱정할 게 없다는 걸 걱정해요." 저는 그 문장의 완벽한 구조에 잠깐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같이 웃었어요. 그분도 자기 말이 웃기다는 걸 아니까 웃은 거고요. 웃고 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거, 방금 그 문장이 딱 불안의 정의예요." 그랬더니 또 웃더라고요. 그 5초짜리 웃음 안에서, 사실 꽤 중요한 치료적 대화가 오간 겁니다. 자기 증상을 바깥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 사람만이 그 문장을 웃으면서 말할 수 있거든요.

이게 오늘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진료실에서 함께 터지는 웃음은, 그냥 분위기가 좋아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건 대개 무언가가 좋아지고 있다는 신호예요.

왜 그런지 조금 풀어볼게요.

처음 오는 분들은 잘 안 웃습니다. 당연합니다. 낯선 방, 낯선 의사, 무엇보다 자기가 지금 얼마나 무너져 있는지를 처음으로 소리 내어 말해야 하는 자리니까요. 웃음이 나올 여유 자체가 없어요. 몸이 잔뜩 굳어 있고, 말은 조심스럽고, 저와 눈도 잘 안 맞춥니다. 그 방의 온도는 확실히 낮습니다.

그런데 몇 번의 만남이 쌓이고 나면, 어느 날 처음으로 그분이 웃습니다.

제가 별것 아닌 농담을 던졌는데 픽 하고 반응이 오는 순간. 혹은 자기 얘기를 하다가 스스로 어이없어서 피식 웃어버리는 순간. 저는 그 첫 웃음을 굉장히 눈여겨봅니다. 차트에 적어두고 싶을 만큼요. 왜냐하면 웃을 여유가 생겼다는 건, 마음에 그만큼의 공간이 다시 생겼다는 뜻이거든요.

우울의 한복판에 있을 때 사람은 웃지 못합니다. 정확히는, 웃을 힘이 없습니다. 세상이 온통 잿빛이고 나 자신이 짐짝처럼 느껴질 때, 농담은 다른 나라 말처럼 들려요. 그래서 그 잿빛 속에 있던 사람이 처음으로 진짜 웃음을 터뜨리는 날은, 저에겐 검사 수치 하나가 좋아진 것보다 더 확실한 신호일 때가 많습니다. 밥맛이 돌아오고, 좋아하던 노래가 다시 들리기 시작하는 그 생명력이 돌아오는 자리에, 웃음도 나란히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어요.

사람이 자기 고통을 농담으로 만들 수 있게 됐다는 것. 저는 이걸 꽤 좋은 징후로 봅니다.

무슨 말이냐면요. 공황이 처음 왔을 때 사람들은 그걸 "죽을 것 같았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느끼니까요. 그런데 치료가 좀 진행되고 나면,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난주에 마트에서 또 그놈이 오려고 하길래, 제가 '어, 왔냐?' 하고 그냥 계산하고 나왔어요." 그러면서 웃습니다. 저도 웃고요.

이 변화가 굉장한 겁니다. 예전엔 공황이 자기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괴물이었는데, 이제는 "어, 왔냐?" 하고 아는 척할 수 있는 대상이 된 거예요. 괴물과 나 사이에 손바닥만 한 거리가 생긴 거죠. 그 거리에서 웃음이 나옵니다.

심리학에서는 오래전부터 유머를 가장 성숙한 방어기제 중 하나로 꼽아왔습니다. 하버드에서 70년 넘게 사람들의 인생을 추적한 정신과 의사 조지 베일런트는, 사람이 스트레스를 다루는 방식을 미숙한 것부터 성숙한 것까지 줄 세워 봤는데 — 부정이나 투사 같은 미숙한 방어와 달리, 유머는 이타심과 나란히 가장 위쪽에 놓이는 성숙한 대처였고, 그런 대처를 쓰는 사람들이 나이 들어 더 건강하고 평온하게 살더라는 겁니다1.

유머가 성숙한 방어라는 말의 핵심은 이겁니다. 유머는 고통을 부정하지 않아요.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어" 하고 눈 감아버리는 게 부정이라면, 유머는 정반대입니다. 고통이 거기 있다는 걸 똑똑히 인정한 채로, 그것과 나 사이에 숨 쉴 틈을 만드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자기 아픔을 농담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그 아픔을 회피한 게 아니라 오히려 정면으로 마주 본 다음, 거기서 반 발짝 물러설 힘까지 갖게 된 겁니다.

이건 아무 때나 되는 게 아닙니다. 고통의 한복판에서는 절대 안 돼요. 상처가 아직 벌어져 있을 때 누가 그걸로 농담을 하면 그건 폭력이지 유머가 아닙니다. 딱지가 앉기 시작해야, 그제야 그 흉터를 어루만지며 웃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누군가 자기 증상을 처음으로 웃으며 말하는 순간을, 상처에 딱지가 앉기 시작했다는 조용한 신호로 읽습니다.

그러니 웃음은 아픔을 가볍게 여기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아픔을 견디는 하나의 방식이에요.

이건 제가 환자들에게 배운 것 중에서도 꽤 큰 항목입니다. 정말 힘든 시기를 지나온 분들일수록, 자기 이야기를 담담하게, 때로는 유머까지 섞어서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처음엔 그게 아픔을 축소하는 건 줄 알았어요.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그건 축소가 아니라, 그 무게를 자기가 들 수 있는 크기로 손질해낸 사람의 여유라는 걸요. 웃으면서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그 사람은 이미 그 안에서 아주 오래 울었을 겁니다.

여기까지 읽으시면 진료실이 무슨 따뜻한 개그 콘서트장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균형을 위해 반대쪽 이야기도 해야겠습니다. 안 그러면 이 글이 거짓말이 되니까요.

웃음이 늘 좋은 신호인 건 아닙니다.

어떤 웃음은 오히려 걱정스럽습니다. 너무 이른 웃음이 그렇습니다. 방금 엄청나게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놓고, 곧바로 "에이, 뭐 별거 아니에요" 하며 서둘러 웃어버리는 웃음. 그건 회복의 웃음이 아니라 도망치는 웃음일 때가 있어요. 아픔이 밖으로 나오려는 걸 웃음으로 재빨리 눌러 덮는 거죠. 그럴 때 저는 같이 웃지 않습니다. 웃음을 거두고, 조용히 다시 물어요. "방금 그거, 진짜 별거 아니었어요?" 하고요.

그러니까 웃음이 진짜 딱지 위에서 나오는 건지, 아니면 아직 벌어진 상처를 급하게 가리는 붕대인지 — 그걸 구분하는 게 사실 제 일의 은근히 어려운 부분입니다. 둘은 겉모습이 똑같이 생겼거든요. 여기서 잘못 읽으면, 저는 그분이 웃는 걸 보며 "많이 좋아지셨네요" 하고 안심해버리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실제로 그런 실수를 한 적도 있고요.

그리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건 정말 중요해서 굵게 적고 싶어요.

저는 환자를 보고 웃는 게 아니라, 환자와 함께 웃습니다.

이 둘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누군가의 증상이나 아픔이나 이상한 생각을 두고 제가 속으로 우습다고 여기는 순간, 그건 치료가 아니라 조롱입니다. 정신과 의사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요. 제가 웃어도 되는 건 오직, 그분이 먼저 웃음의 문을 열어줬을 때, 그리고 우리가 같은 편에 서서 그 고약한 증상을 같이 놀려줄 때뿐입니다. 웃음의 화살이 그 사람을 향하면 안 되고, 그 사람을 괴롭히는 병을 향해야 해요. "당신이 우습다"가 아니라 "저 녀석(증상) 참 얄밉게 굴죠?"의 웃음. 이 방향을 저는 매 순간 확인합니다.

솔직한 고백을 하나 더 하자면, 저도 웃음을 참느라 애쓴 순간들이 있습니다.

의사가 진료실에서 빵 터지면 안 되니까요. 그런데 사람이 하는 말이 도무지 안 웃을 수가 없을 때가 있어요. 언젠가 한 분이 자기 배우자 흉을 어찌나 절묘한 비유로 보시던지, 저는 그게 치료적으로 중요한 이야기라는 걸 알면서도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서 혼났습니다. 진지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잠깐 차트에 시선을 떨어뜨렸는데, 그분이 그걸 눈치채고는 "선생님 지금 웃으시는 거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같이 웃었습니다. 그날은 그게 맞는 것 같았어요. 제가 사람이라는 걸, 이 방이 완전히 무균실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도 가끔은 필요하니까요. 저 역시 반대편 의자에 앉아 흔들리는 사람이라는 걸요.

물론 이건 세심하게 골라야 하는 일입니다. 아무 때나 의사가 감정을 흘리면 안 되죠. 다만 로봇처럼 완벽하게 중립적인 얼굴로만 앉아 있는 것도, 어떤 순간엔 오히려 벽이 됩니다. 앞사람이 큰맘 먹고 유머를 건넸는데 제가 무표정으로 받으면, 그건 "당신의 그 재치를 나는 못 받아주겠다"는 거절이 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저는 웃어도 될 때와 안 될 때를 매번 가늠합니다. 이것도 결국은 저울질이네요. 저희 일은 온통 저울질입니다.

글을 마치기 전에, 처음의 그림으로 잠깐 돌아가고 싶습니다.

티슈갑과 무거운 침묵의 방. 그 그림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라고 앞에서 말했죠. 다만 그 그림에는 빠진 게 있습니다. 같은 방에서, 같은 사람과, 어느 오후에 함께 터진 웃음 한 조각이요. 어떤 분에게는 그 웃음이 몇 달 만에 처음 지어본 미소였을 수도 있고, 어떤 분에게는 자기 병을 처음으로 이겨먹은 순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혹시 이런 걸로 와도 되나 망설이다 큰맘 먹고 정신과 문을 여시게 된다면, 부디 이 방을 눈물만 흘리고 나오는 곳으로 미리 정해두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여기서도 웃을 수 있어요. 오히려, 여기서 처음으로 다시 웃게 되는 사람들을 저는 자주 봅니다.

다만 웃음이 아픔을 덮어버리는 데까지 가지 않도록, 그건 제가 옆에서 지켜보겠습니다. 웃다가도 정작 해야 할 이야기를 그냥 웃음으로 넘겨버리려 하면, 제가 웃음을 멈추고 다시 물을 거예요. 그게 제 몫이니까요.

오늘도 어느 진료실에서는 누군가가 오랜만에 웃고 있을 겁니다. 그 웃음이 딱지 위에서 나온 건지 붕대 아래에서 나온 건지, 저는 오늘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는 중이고요.

이 글은 정신과 의사가 진료실 밖에서 쓰는 개인적인 에세이이며, 특정한 진단·처방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본문의 장면과 대화는 특정 환자의 사례가 아니라 여러 순간에서 받은 인상을 신상이 드러나지 않게 각색·일반화한 것입니다. 혹시 지금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캄캄한 자리에 계시다면, 그 판단을 혼자 내리지 마시고 정신건강 위기상담전화 ☎ 1577-0199(24시간)나 가까운 정신건강의학과의 문을 두드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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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은근히 기댄 자료

  • 유머를 부정·투사 같은 미숙한 방어와 달리 이타심과 함께 가장 성숙한 방어기제로 분류하고, 그런 대처가 노년의 건강·안녕과 연결된다는 George Vaillant의 방어기제 위계 정리: Psychology Today, "The Wisdom of Defense Mechanisms"

참고문헌

  1. Vaillant의 방어기제 위계, Psychology Today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