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 예약이 있습니다. 차트에 이름이 적혀 있고, 지난번에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도 몇 줄 남아 있습니다. 3시 10분. 대기실 문이 몇 번 열립니다. 다른 분들입니다. 3시 20분. 접수대에 전화 한 통 온 적 없느냐 물어봅니다. 없습니다.
3시 30분쯤 되면, 저는 대개 그 차트를 조용히 닫습니다.
진료실에는 이런 시간이 생각보다 자주 생깁니다. 예약을 잡아두고 오지 않는 사람. 처음 한 번 왔다가 다음이 없는 사람. 두어 번 성실히 오다가 어느 날부터 소식이 뚝 끊기는 사람. 그럴 때 제 앞에는 빈 의자가 하나 남습니다. 방금까지 누가 앉아 있었어야 할, 그러나 아무도 앉지 않은 의자가요.
오늘은 그 빈 의자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진료실에서는 절대 못 하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를 들어야 할 사람이 바로 그 자리에 없거든요.
먼저 고백 하나. 저는 안 오신 분을 잊지 않습니다. 잊고 싶어도 잘 안 됩니다.
빈 시간이 생기면 저는 이상하게도 그 차트를 다시 열어봅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지난번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습니다. "다음 주에 상태 보고 약 조정하기로." 그 '다음 주'가 오늘이었는데, 오늘의 그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잠깐 그 사람의 지난주를 상상해 봅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좋아져서 홀가분하게 잊어버린 걸까, 아니면 좋아질 기미가 안 보여서 더 오기 싫어진 걸까. 실은 저도 답을 모릅니다. 아는 방법도 없습니다.
이게 이 직업의 좀 이상한 지점입니다. 저는 그 사람의 가장 약한 순간을, 남한테는 안 하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사람이 오늘 오지 않았을 때, 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전화를 걸어 "왜 안 오셨어요, 괜찮으세요?" 하고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건 제 영역이 아니고, 어떤 분에겐 그 전화 자체가 부담이자 침범이 되니까요. "다음엔 꼭 오세요" 하고 다음을 기약할 수도 없습니다. 다음이 있을지 없을지는 온전히 그분의 몫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저 차트를 닫고, 다음 3시 반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립니다. 오지 않은 사람 앞에서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기다리는 것 말고 거의 없습니다.
숫자를 하나 슬쩍 꺼내 보겠습니다. 겁주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당신만 그런 게 아니다"라는 말을 하려고요.
전 세계 심리치료 연구 669편, 8만 3천 명이 넘는 사람을 모아 분석했더니, 치료를 예정보다 일찍 그만두는 비율이 평균 19.7%였습니다1. 다섯 중 하나꼴로 조용히 발길을 끊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위기 클리닉을 봤더니 중도 이탈이 37.5%였고, 그중 대부분이 첫 이틀 안에 사라졌다는 연구도 있습니다2.
이 숫자를 처음 봤을 때 저는 좀 안심이 됐습니다. 아, 나만 자꾸 빈 의자를 보는 게 아니구나. 이건 저 개인의 실력 문제도, 그분들의 의지 문제도 아니고, 그냥 마음을 치료하는 일에 원래부터 딸려 오는 그림자 같은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견딜 만해졌습니다.
그럼 사람들은 왜 그만둘까요. 저는 이걸 오래 지켜봤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이유가 너무 여러 가지라서 하나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좋아져서 안 오는 분이 있습니다. 이게 제일 반가운 경우죠. 잠이 돌아오고 밥이 맛있어지고, 어느 순간 "굳이 병원까지…" 싶어져서 자연스럽게 멀어집니다. 실망해서 안 오는 분도 있습니다. 한두 번 만에 드라마처럼 나아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으니까, "여기도 별수 없네" 하고 돌아섭니다. 돈과 시간 때문에 못 오는 분도 계십니다. 진료비가, 오가는 반나절이, 누군가에겐 정말로 버겁습니다. 남의 눈이 무서워 못 오는 분도 있습니다. 정신과 다닌다는 걸 들킬까 봐, 그 낙인 하나 때문에요.
그리고 — 이 대목이 제일 아픈데 — 더 나빠져서 못 오는 분이 있습니다.
기운이 바닥까지 빠지면, 역설적으로 병원 갈 힘조차 사라집니다. 씻고 옷 입고 버스를 타고 예약 시간에 맞춰 오는 그 일련의 동작이, 어떤 상태에서는 산을 하나 넘는 일이 됩니다. 치료가 필요해서 못 온다는, 그 잔인한 역설. 실제로 무단결석의 가장 흔한 이유로 "치료가 필요하게 만든 그 병 자체가 결석의 원인이었다"는 씁쓸한 문장을 저는 어느 논문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빈 의자를 볼 때마다 마음이 둘로 갈라집니다.
한쪽에는 바람이 있습니다. 제발 안 오신 게 좋아지셔서였기를. 이젠 여기가 필요 없어져서, 저를 까맣게 잊어버릴 만큼 일상이 바빠지셨기를. 저를 잊는 게 그분껜 회복의 증거일 테니, 저는 기꺼이 잊히고 싶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혹시 더 힘들어져서 못 오시는 건 아닐까. 이 두 마음은 늘 같이 옵니다. 하나만 오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빈 의자 앞의 3분은, 짧지만 이상하게 무겁습니다.
여기서 조금 무거운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피하면 정직하지 않은 것 같아서요.
퇴원 후 외래를 한 번이라도 지킨 사람과, 한 번도 오지 않은 사람을 비교한 연구가 있습니다. 예약을 지키지 않은 쪽은 같은 해에 다시 입원하게 될 위험이 약 두 배였습니다. 외래를 지킨 사람은 열에 하나쯤 재입원했는데, 지키지 않은 사람은 넷에 하나였고요3. 이어지는 진료가 실제로 무언가를 붙들어 준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건 평균의 이야기지, 안 오신 당신이 반드시 나빠진다는 예언이 절대 아닙니다. 다만 제가 빈 의자를 조금 걱정하는 데에는, 이런 근거도 슬쩍 깔려 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요. 이 글을 여기서 "그러니 꼭 오세요"로 몰아가면, 저는 제가 싫어하는 종류의 의사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만두는 것도 당신의 권리입니다.
치료를 잠시 쉬어도 됩니다. 저랑 결이 안 맞으면 다른 의사를 찾아가도 됩니다. 그건 배신이 아니라 지극히 정당한 선택이에요. 신발이 안 맞으면 바꿔 신는 게 당연하듯, 치료자도 그렇습니다. 어떤 분은 저한테 두 번 오고, 세 번째로 다른 선생님을 만나서 거기서 훨씬 잘 맞아 오래 치료받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걸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된 일이죠. 중요한 건 저한테 계속 오는 게 아니라, 당신이 어디서든 계속 나아가는 겁니다.
다만 한 가지만은 말해두고 싶어요. 제 쪽 문은 늘 열어둔다는 것.
몇 달 만에, 때로는 몇 년 만에 슬그머니 다시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면목 없어서 못 왔어요" 하시면서요. 저는 그 '면목'이라는 말이 늘 마음에 걸립니다. 여기 다시 오는 데 면목 같은 건 필요 없거든요. 학교를 중퇴한 게 아니라 잠깐 휴학한 거고, 휴학생이 복학하는 데 사과문을 써 올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그런 분껜 아무것도 안 묻고 그냥 이렇게 말합니다. "잘 오셨어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마치 지난주에 뵌 것처럼요. 다시 온 사람에게 왜 이제 왔냐고 묻는 건, 다음번엔 아예 안 오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요.
이 이야기를 이렇게 미담으로만 끝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건 이 섹션답지 않고, 무엇보다 사실이 아니니까요.
솔직히, 모든 빈 의자가 해피엔딩으로 채워지지는 않습니다. 끝내 다시 오지 않은 분들이 있고, 저는 그분들이 지금 어떻게 지내시는지 영영 모릅니다. 좋아져서 잊으신 거라고 믿고 싶지만, 그 믿음이 늘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 모름을 안고 사는 게 이 직업의 몫인 것 같아요. 안 오신 모든 분의 결말을 제가 알 수는 없고, 알려고 붙잡는 것도 옳지 않고. 그저 그 자리를 잠깐 비워두었다가, 조용히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
그래도 딱 하나, 붙잡고 싶은 예외가 있습니다.
혹시 지금 너무 힘들어서, 오히려 그래서 아무 데도 못 가고 계신 분이라면. 마음이 자꾸 위험한 쪽으로 기운다면. 그럴 때만은 부디, 조금만 손을 뻗어 주세요. 병원이 부담스러우면 전화라도 좋습니다. 정신건강 위기상담전화 ☎ 1577-0199(24시간)는 예약도, 면목도, 대단한 용기도 필요 없이 그냥 걸면 됩니다. 위험 신호를 어떻게 알아차리는지에 대해 따로 적어둔 글도 있으니, 필요하면 살펴봐 주세요. 좋아지는 이야기가 이 세상엔 생각보다 많습니다. 당신 것이 그중 하나가 될 자리를, 저는 아직 안 지우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 중에, 예전에 몇 번 다니다 그만둔 병원이 떠오른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선생님도 아마, 당신 차트를 아주 지우지는 않았을 겁니다. 처음 정신과 문을 여는 일이 큰 용기이듯, 다시 여는 일도 꼭 그만큼의 용기지만 — 사실 문 저쪽에선 별일 아닌 얼굴로 그냥 "오셨어요?"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3시 반이 지나면 저는 차트를 닫습니다.
하지만 파일을 삭제하지는 않습니다. 언젠가 그 문이 다시 열릴 수도 있으니까요. 오늘도 저는, 몇 개의 자리를 그렇게 비워둔 채로 퇴근합니다.
이 글은 정신과 의사가 진료실 밖에서 쓰는 개인적인 에세이이며, 특정한 진단·처방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본문의 장면은 여러 경험을 뒤섞어 각색한 것으로, 특정 개인과는 무관합니다.
지금 많이 힘들거나 위급하게 느껴진다면, 혼자 견디지 마세요. 정신건강 위기상담전화 ☎ 1577-0199(24시간)나 가까운 정신건강의학과의 문을 두드려 주세요. 그리고 예전에 그만둔 그 병원이 있다면, 다시 가셔도 됩니다. 정말로요.
함께 보면 좋은 자료
- 심리치료를 예정보다 일찍 그만두는 비율은 평균 19.7%(669편·8만 3천여 명 메타분석): Swift & Greenberg, Journal of Consulting and Clinical Psychology 2012. PubMed
- 집중 외래 치료 중도 이탈 37.5%, 그중 대부분이 첫 이틀 안에 발생: Henzen 등, BMC Psychiatry 2016. PMC
- 퇴원 후 외래 예약을 지키지 않은 사람은 같은 해 재입원 위험이 약 두 배(넷 중 하나 대 열 중 하나): Nelson 등, Psychiatric Services 2000. PubM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