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에서 저는 낫게 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정확히는, 낫게 하는 게 의사의 일이라고 배웠어요. 병을 찾아내고, 원인을 짚고, 맞는 약을 골라 없애는 것. 그게 의사가 하는 일이라고. 시험은 늘 "이 환자를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를 물었고, 정답을 맞히면 점수가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래, 아주 오래, 낫게 하지 못하는 건 곧 실패라고 믿었습니다. 배운 대로요.

그런데 진료실에서 십몇 년을 보내고 나니, 교과서에 안 적혀 있던 종류의 날들이 있더군요.

배운 걸 다 쓴 날들.

무슨 말이냐면요. 첫 약이 안 들으면 두 번째 약으로 갑니다. 그것도 시원찮으면 용량을 조절하고, 조합을 바꾸고, 다른 계열로 넘어가고, 필요하면 여러 약을 겹칩니다. 상담의 방향도 틀어보고, 생활 리듬도 같이 손봅니다. 저는 제가 아는 카드를 한 장씩 정성껏 내려놓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손에 든 카드가 다 떨어진 걸 문득 알아차리는 순간이 옵니다.

그 앞에서 그분이 지친 얼굴로 이렇게 묻습니다.

"선생님, 이 약도 저 약도 다 안 들으면… 저는 이제 어떡하죠?"

이 질문 앞에서 답이 궁해지는 날이 있습니다. 정말로요.

솔직히 고백하면, 그 순간 제 머릿속은 하얗습니다. 뭐라도 아는 척 그럴듯한 말을 얹을 수는 있어요. "새로 나온 약이 있으니 그걸 시도해 봅시다", "조금 더 기다려 보시죠" 같은. 그런데 저 스스로가 그 말을 반쯤밖에 못 믿을 때가 있습니다. 이미 웬만한 건 다 해봤고, 남은 선택지의 확률도 그리 높지 않다는 걸 저는 아니까요. 앞사람도 어렴풋이 압니다. 그러니 저는 확신 없는 말을 확신 있는 척 발음해야 하는, 아주 이상하고 외로운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제 안에서 아주 부끄러운 감정이 하나 올라옵니다.

도망치고 싶다.

이 말을 활자로 적는 게 지금도 좀 겁납니다. 의사가 환자 앞에서 도망치고 싶다니. 그런데 정직하게 쓰기로 했으니 씁니다. 낫게 못 하는 사람 앞에 앉아 있는 건, 무력합니다. 그 무력감이 오래 쌓이면 그 사람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조금 버거워집니다. 다음 진료 명단에서 그 이름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지고, 아주 잠깐, 아주 부끄럽게도, '오늘은 안 오셨으면' 하는 생각이 스칩니다.

왜 도망치고 싶었을까요. 한참 뒤에야 알았습니다. 그건 그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었어요. 제가 저의 무력함을 견디기가 싫어서였습니다. 낫게 못 하는 나를 그 사람 눈에서 확인하는 게 아파서. 그러니까 도망은 그분에게서가 아니라, 실은 무능한 제 자신에게서 치고 싶었던 거였습니다. 부끄럽지만 그게 진실이에요.

그 시절의 저는 무력감과 실패를 같은 말로 썼습니다. 낫게 못 하면 진 거라고. 그래서 낫지 않는 분들 앞에서 저는 늘 조금씩 지고 있는 기분이었어요.

이 이야기를 언제부터 다르게 하게 됐는지, 정확한 날짜는 모릅니다. 다만 어떤 분이 계셨어요.

여러 사정을 각색해 신상이 드러나지 않게 적습니다. 오래 앓아온 분이었습니다. 좋아졌다 나빠지길 몇 해째 반복하는, 교과서 표현으로 하면 '만성' 경과. 저는 그분에게 제 카드를 거의 다 썼고, 극적인 반전은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어떤 달은 조금 낫고 어떤 달은 다시 가라앉고. 저는 매번 뭔가 대단한 걸 해드리지 못한 채로 진료를 마쳤습니다. 늘 조금 미안한 얼굴로요.

그런데 어느 날 그분이, 별일 아니라는 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 사실 여기 오는 게 그렇게 싫진 않아요. 낫는 것 같지도 않은데, 이상하죠. 그냥 이 시간에 누가 제 얘길 끝까지 들어준다는 게… 저는 그거 하나 붙잡고 한 주를 버티는 것 같아요."

그 말을 듣고 저는 좀 멍했습니다.

저는 내내 제가 그분을 못 낫게 하고 있다고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분에게 이 진료실은, 낫는 곳이 아니라 혼자 무너지지 않는 곳이었던 겁니다. 제가 실패라고 채점하던 그 시간을, 그분은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어요. 곁이라고요.

그날 이후로 제 안에서 뭔가가 아주 천천히 옮겨갔습니다.

낫게 하지 못해도, 곁에 있을 수는 있다는 것.

이게 무슨 대단한 깨달음처럼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오히려 아주 시시한 발견이었습니다.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일의 목록이 제 생각보다 하나 더 길었다는 것뿐이에요. 낫게 하기. 그리고 — 낫게 못 할 때, 그 옆에 끝까지 남아 있기. 저는 후자를 오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는데, 알고 보니 그게 어떤 분들에겐 약보다 오래 듣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자료를 뒤지다가, 이걸 뒷받침하는 연구들이 꽤 있다는 걸 알고 조금 안심했습니다. 어떤 치료법을 쓰느냐만큼이나, 치료자와 환자 사이 관계의 질 그 자체가 치료 결과와 꾸준히 연관된다는 겁니다. 이 연결은 특정 학파나 진단을 가리지 않고 여러 메타분석에서 꾸준히 확인돼 왔고요1. 관계가 곧 치료의 일부라는 이 이야기가, 저는 그렇게 반갑더군요. 제가 낫게 못 한 시간들이 통째로 헛것은 아니었다는 뜻이었으니까요. 물론 관계 하나로 병이 없어지진 않습니다. 그건 분명히 해두고 싶어요. 다만 관계가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니었다는 것. 그 사이 어딘가에 진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치료의 목표라는 것도 제 안에서 조금씩 다시 그려졌습니다.

예전의 저에게 목표는 언제나 '완치'였습니다. 증상을 0으로 만드는 것. 그 목표를 걸어두면, 0에 도달하지 못한 모든 날이 미달이 됩니다. 저도, 앞사람도 매주 미달의 성적표를 받아 드는 셈이죠. 그런데 어떤 분들에게 완치는 — 정직하게 말하면 — 이번 생에 안 올 수도 있습니다. 나아지는 분이 훨씬 많다는 건 여전한 사실이에요. 이건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정신과 치료로 다시 웃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분들을 저는 매주 봅니다. 다만 모두는 아니라는 것, 그 정직함까지 같이 안고 가는 게 이 일이더군요.

그래서 어떤 분들과는, 목표를 다시 씁니다. '아프기 전으로 돌아가기'에서 '이걸 안고도 오늘을 살아가기'로요.

이걸 포기라고 부르는 분도 있을 겁니다. 저도 한동안 그렇게 의심했어요. 목표를 낮추는 건 손을 놓는 거 아니냐고. 그런데 살아보니 그건 포기랑 완전히 다른 겁니다. 오히려 더 손이 많이 가는 종류의 돌봄이에요. 극적인 완치를 못 주는 대신, 저는 아주 작은 변화들을 같이 알아차리는 사람이 됩니다. 지난달보다 잠을 30분 더 잤다는 것. 오랜만에 친구 연락에 답을 했다는 것. 오늘은 죽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 옅었다는 것. 예전의 저라면 그냥 지나쳤을 이 작은 신호들을, 이제 저는 놓치지 않으려 애씁니다. 낫게 못 하는 대신, 함께 알아차리기. 이게 요즘 제가 하는 일의 꽤 큰 부분입니다.

이 이야기를 완치와 회복은 다르다는 글에서 환자분 입장으로 한 번 적은 적이 있는데, 이번엔 그 반대편 의자, 그러니까 의사 쪽에서 겪은 걸 적어보고 싶었습니다. 회복의 정의가 바뀌는 건 환자만의 일이 아니거든요. 의사도 그 자리에서 같이 목표를 고쳐 씁니다. 매번 조금씩 아프게요.

그러니까 여기까지 읽으시면 제가 무슨 평온한 경지에 다다른 것 같겠지만.

아닙니다. 정말 아니에요.

미화는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무력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십몇 년을 해도요. 지금도 저는 카드가 다 떨어진 순간이 오면 여전히 속이 철렁하고, 여전히 그 앞에서 작아집니다. 여전히 아주 잠깐 도망치고 싶고요. '곁에 있는 것도 치료'라는 문장을 머리로는 알아도, 극적인 호전을 못 드린 진료가 끝나면 저는 여전히 조금 진 기분으로 방을 나섭니다. 이 무력감은 제가 이기고 졸업한 게 아니라, 그냥 안고 다니는 법을 겨우 익힌 것에 가깝습니다.

어쩌면 그 무력감이 안 사라지는 게 맞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게 너무 편해지는 날, 저는 아마 앞사람의 고통에 무뎌진 의사가 되어 있을 테니까요. 매번 작아지는 게 부끄럽지만, 그 부끄러움이 제가 아직 이 자리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라면. 그럼 저는 이걸 안고 가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낫게 못 하는 분들 곁에서 제가 하는 일을, 요즘은 이렇게 정리해 둡니다. 극적인 걸 못 줄 땐 작은 변화를 같이 세어드리기. 그리고 아무 변화가 없는 날엔 — 그냥 남아 있기. 다음 주에도, 그다음 주에도, 명단에서 그 이름을 보고 잠깐 무거워지더라도, 결국은 문을 열고 다시 그 자리에 앉기. 어쩌면 그게 제가 가장 오래, 가장 끝까지 할 수 있는 처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낫게 해드리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은, 진료실에선 차마 잘 못 합니다. 그 말이 오히려 그분의 희망을 꺾을까 봐서요. 그래서 여기에만 적어둡니다. 제가 끝내 낫게 해드리지 못한 분들께. 그리고 지금도 어딘가에서,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시간을 견디고 계신 분들께.

낫는 것만이 사는 건 아니라고, 저는 믿기로 했습니다. 아직 잘 안 될 때가 많지만요.

그래서 오늘도 저는, 카드가 떨어진 손으로 그냥 그 옆에 조금 더 앉아 있어 보려 합니다.

혹시 지금 "이렇게 나아지지도 않는데 살아서 뭐 하나" 하는 생각에 스스로를 해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 판단을 부디 혼자 내리지 마세요. 정신건강 위기상담전화 ☎ 1577-0199(24시간)나 가까운 정신건강의학과의 문을 두드려 주세요. 지금 안 보인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곁에 있겠다는 사람은, 생각보다 남아 있습니다.


이 글은 정신과 의사가 진료실 밖에서 쓰는 개인적인 에세이이며, 특정한 진단·처방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글 안의 상황과 대화는 특정 환자의 사례가 아니라, 여러 장면에서 받은 인상을 신상이 드러나지 않게 각색·일반화한 것입니다.

함께 보면 좋은 글

이 글에 은근히 기댄 자료

  • 치료자–환자 관계(치료 동맹)의 질이 치료법·진단을 가리지 않고 치료 결과와 꾸준히 연관되며, 여러 메타분석에서 반복 확인된 요인이라는 개관: Stubbe DE, "The Therapeutic Alliance: The Fundamental Element of Psychotherapy," Focus (J Life Long Learn Psychiatry), 2018;16(4):402–403. PMC

참고문헌

  1. 치료 동맹에 관한 개관, Stubbe DE, Focus,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