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이 약도 소용없으면 저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두세 번째 약을 이야기할 때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목소리에 두려움이 실려 있어요. 약이 안 듣는다는 게 곧 '못 낫는다'는 뜻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씁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약이 한 번에 안 듣는 건 실패가 아니라 예정된 경로입니다. 우울증 치료에는 원래 여러 단계가 있고, 각 단계마다 쓸 수 있는 카드가 다릅니다. 오늘은 그 지도를 펼쳐 보겠습니다.

⚠️ 이 글은 정보 제공용입니다. 실제 약 선택·변경은 반드시 담당 전문의와 상의하세요. 여기 나오는 순서는 일반적 설명이며, 사람마다 경로가 다릅니다.

먼저, 첫 약으로 낫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습니다

이 숫자를 알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미국에서 4천 명 넘는 우울증 환자를 대상으로 단계별로 치료를 바꿔가며 추적한 대규모 연구가 있습니다. STAR*D라고 부르는 연구인데, 우울증 치료의 현실을 보여준 기념비적 자료입니다. 결과는 이랬습니다(American Journal of Psychiatry, 2006).

  • 1단계(첫 항우울제)에서 증상이 완전히 가라앉은 비율: 약 37%
  • 2단계(약을 바꾸거나 더함): 약 31%
  • 3단계: 약 14%
  • 4단계: 약 13%

각 단계에서 나은 사람을 차곡차곡 더하면, 단계를 밟아갈수록 누적 관해율은 37% → 56% → 62% → 67% 로 올라갑니다.

이 숫자를 두 방향으로 읽어야 합니다. 첫째, 첫 약으로 깔끔하게 낫는 사람은 셋 중 하나가 조금 넘을 뿐입니다. 그러니 첫 약이 안 들었다고 자신을 탓할 이유가 없습니다. 둘째, 단계를 밟을수록 나은 사람이 계속 늘어납니다. 한 번에 안 됐다고 길이 끝나는 게 아니라는 뜻이죠.

(다만 STAR*D의 누적 수치는 중간에 치료를 그만둔 사람을 빼고 계산한 낙관적 추정이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대로만 하면 70% 낫는다"로 읽기보다, 단계가 이어질수록 기회가 늘어난다는 방향으로 이해하는 게 정확합니다.)

'치료저항성'이라는 말부터 풀고 갑시다

무서운 이름이지만 정의는 담백합니다. 충분한 용량으로 충분한 기간(보통 6~8주) 쓴 항우울제가 서로 다른 계열로 두 번 이상 효과가 없었을 때, 이를 치료저항성 우울증(TRD)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충분히'가 핵심입니다. 진료실에서 "약이 안 들어요"라고 하실 때, 실제로 열어보면 이런 경우가 꽤 됩니다.

  • 부작용이 무서워 처방받은 절반만 드신 경우
  • 2~3주 만에 "효과 없다"고 판단하신 경우 — 항우울제는 대개 4~6주는 지나야 제 효과가 보입니다
  • 좋아지자마자 임의로 끊었다가 도로 나빠진 경우 — 이건 약 끊기의 문제이지 약이 안 듣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의사가 먼저 확인하는 게 있습니다. 정말 충분히 썼는가, 진단이 맞는가(양극성 우울을 단극성으로 오인하진 않았는지, 갑상선·빈혈 같은 몸의 문제가 깔려 있진 않은지, 술이 방해하고 있진 않은지). 진짜 저항성인지 따지기 전에 이 '가짜 저항성'부터 걸러내는 게 순서입니다.

갈림길 — 바꿀까, 더할까

첫 약이 정말 충분히 썼는데도 안 들었다면, 크게 두 갈래가 있습니다.

치료저항성 우울증의 두 갈래 — 약을 다른 것으로 '교체(switching)'하거나, 기존 약에 다른 약을 '추가(augmentation)'하는 길. 부분적으로라도 효과가 있었으면 추가, 전혀 없었으면 교체를 고려하는 경우가 많다 (마음뉴스 제작)
치료저항성 우울증의 두 갈래 — 약을 다른 것으로 '교체(switching)'하거나, 기존 약에 다른 약을 '추가(augmentation)'하는 길. 부분적으로라도 효과가 있었으면 추가, 전혀 없었으면 교체를 고려하는 경우가 많다 (마음뉴스 제작)

교체(switching) — 지금 약을 끊고 다른 약으로 갈아탑니다. 대개 지금 약이 전혀 안 들었을 때, 혹은 부작용이 심할 때 고릅니다. 같은 SSRI 안에서 바꾸기도 하고, 부프로피온이나 벤라팍신처럼 작용이 다른 계열로 넘어가기도 합니다.

추가(augmentation, 증강요법) — 지금 약은 그대로 두고 다른 약을 얹습니다. 대개 지금 약이 부분적으로는 들었을 때 고릅니다. 절반쯤 효과를 본 걸 버리기 아까우니, 그 위에 힘을 보태는 방식이죠.

둘 중 뭐가 나은지는 오래된 논쟁인데, 최근 근거는 부분 반응이 있었다면 추가 쪽이 조금 더 유리하다고 봅니다. 재향군인 대상의 대규모 연구(VAST-D)에서 아리피프라졸을 얹는 것이 다른 약으로 갈아타는 것보다 반응률이 높았고, 노년 우울증을 다룬 2023년 연구에서도 아리피프라졸·부프로피온을 얹은 군의 관해율(약 28~29%)이 갈아탄 군(약 19%)보다 높았습니다. 다만 얹는 만큼 부작용도 늘어서, 예컨대 리튬을 얹으면 낙상 위험이 올라간다는 점도 같은 연구가 함께 보여줬습니다.

증강요법 — 무엇을 얹나

우울증 약에 '얹는' 약은 우울증 약이 아닌 경우가 많아서 환자분들이 놀랍니다.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 리튬 — 가장 오래되고 근거가 두꺼운 증강제입니다. 원래 기분조절제인데, 항우울제에 얹으면 효과를 끌어올립니다. 자살 예방 효과라는 별도의 강점도 있습니다.
  • 아리피프라졸·쿠에티아핀 같은 항정신병약 — "정신병 약을 왜?" 싶지만, 저용량으로 우울증에 얹는 것은 근거가 탄탄한 표준 전략입니다. 조현병에 쓰는 용량과는 다릅니다.
  • 루마테페론 — 항우울제에 얹는 우울증 부가요법으로 비교적 최근 조명받은 약입니다.
  • 부프로피온 — 항우울제끼리 조합하는 대표 예입니다. 성기능 부작용을 덜고 활력을 더하는 쪽으로 자주 쓰입니다.
  • 갑상선호르몬(T3)·부스피론 등도 상황에 따라 고려됩니다.

여기서 브린텔릭스(보르티옥세틴)처럼 애초에 여러 표적을 건드리도록 설계된 약으로 바꾸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입니다. 요점은, 선택지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약을 넘어선 카드들

약을 이리저리 조합해도 벽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등장하는 게 약이 아닌 치료들입니다. 이것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우울증 치료에 '막다른 길'이 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케타민·에스케타민(스프라바토) — 기존 항우울제와 작동 원리가 완전히 다른 약입니다. 여러 약에 실패한 치료저항성 우울증에 쓰이고, 효과가 몇 시간~며칠 안에 나타나는 빠른 속도가 특징입니다.
  • 전기경련치료(ECT) — 이름이 주는 공포와 달리, 마취하에 잠든 채로 받는 안전한 시술이고 심한 우울증에서 가장 효과가 강력한 치료 중 하나입니다. 특히 위험이 급박하거나 약을 기다릴 시간이 없을 때 힘을 발휘합니다.
  • 경두개자기자극(TMS) — 자기장으로 특정 뇌 부위를 자극하는 비침습적 치료입니다. ECT보다 부담이 적은 대신 적용 범위와 강도가 다릅니다.

이 카드들은 '최후의 수단'이라기보다, 약이라는 길과 나란히 놓인 다른 길에 가깝습니다. 상황에 따라 생각보다 이른 단계에서 꺼내기도 합니다.

잊기 쉬운, 그러나 중요한 것

여기까지 약과 시술 이야기를 했지만, 정작 진료실에서 제가 자주 놓치지 말자고 다짐하는 건 다른 데 있습니다.

첫째, 심리치료를 빼놓지 말 것. 약을 바꾸고 얹는 동안에도 인지행동치료 같은 구조화된 심리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회복률과 재발 방지 모두에 도움이 됩니다. 약과 상담은 경쟁 관계가 아닙니다.

둘째, '완치'가 아니라 '관해'를 목표로 삼되, 삶의 회복을 함께 볼 것. 증상 점수가 0이 되는 것만이 목표가 아닙니다. 잠을 자고, 밥을 먹고, 다시 사람을 만나고, 일상의 결이 돌아오는 것 — 그 회복이 진짜 목표입니다.

셋째, 몸과 생활을 함께 볼 것. 갑상선 기능, 수면무호흡, 만성 통증, 음주, 그리고 운동 같은 것들이 치료 반응을 좌우합니다. 약만 붙들고 있으면 놓치는 것들이죠.

💬 전문의 한마디

치료저항성이라는 말을 처음 들으면 대부분 "역시 나는 안 되는구나" 하고 받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을 정반대로 씁니다. 이건 "당신 잘못이 아니라 이 병이 원래 여러 카드를 써야 하는 병"이라는 뜻이고, 무엇보다 아직 써보지 않은 카드가 남아 있다는 뜻이니까요. STAR*D가 보여준 게 바로 그겁니다 — 첫 약이 안 들어도 다음 단계에서 낫는 사람이 계속 나온다는 것. 그래서 저는 세 번째, 네 번째 약을 이야기할 때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한테 아직 남은 방법이 이만큼 있어요." 실제로 여러 약과 시술을 거쳐 결국 돌아오신 분들을 저는 압니다. 그분들의 공통점은 재능이나 운이 아니라, 길이 하나가 아니라는 걸 믿고 다음 칸으로 한 발 더 갔다는 것뿐이었습니다.

함께 보면 좋은 자료

  • STAR*D, 단계별 치료 결과 (Rush 등, American Journal of Psychiatry, 2006) — 원문
  • STAR*D 누적 관해율의 재평가 (Sakurai 등, World Psychiatry, 2024) — 원문
  • 노년 치료저항성 우울증의 증강 대 교체 (OPTIMUM, NEJM, 2023) — 원문
  • 아리피프라졸·부프로피온 증강 및 교체 메타분석 (PLOS One, 2024) —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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