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녹내장이 있는데, 정신과 약 먹어도 되나요?" 약봉투 안내문에서 '녹내장 환자 주의'라는 문구를 보고 불안해하며 오시는 분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됩니다" 또는 "안 됩니다"로 단칼에 답하면 십중팔구 틀립니다. 어떤 녹내장이냐에 따라 답이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그 갈림길을 정리한 것입니다. 먼저 분명히 해둘 것 — 약을 스스로 고르거나 끊는 용도가 아닙니다. 녹내장의 종류를 확인하고 약을 조정하는 건 반드시 안과·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몫입니다. 다만 그 상담을 더 정확하게 하도록 돕는 지도를 그려보겠습니다.

⚠️ 이 글은 정보 제공용입니다. 녹내장이 있다면 약의 시작·변경·중단을 반드시 두 과 전문의와 상의하세요. 임의로 판단하지 마세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개방각인가, 폐쇄각인가

녹내장은 크게 두 종류입니다. 그리고 정신과 약과의 관계는 이 둘이 완전히 다릅니다.

  • 개방각(원발개방각) 녹내장 — 전체 녹내장의 약 90%를 차지하는, 훨씬 흔한 유형입니다. 방수(눈 안의 물)가 빠지는 배출로 자체는 열려 있는데 서서히 막혀 압력이 오르는 만성 질환입니다. 여기에는 대부분의 정신과 약이 급성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 폐쇄각(협우각·원발폐쇄각) 녹내장 — 배출로가 좁거나 닫히면서 압력이 급격히 오르는 유형입니다. 바로 여기서 일부 정신과 약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핵심 — "녹내장 = 정신과 약 금지"는 대부분 오해입니다. 위험한 것은 소수인 폐쇄각(협우각) 쪽이고, 다수인 개방각 녹내장은 정기 안과 관찰만 유지하면 대체로 약을 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첫 단계는 늘 같습니다 — 안과에서 내 녹내장이 어느 쪽인지 확인하는 것.

많은 분이 이 구분을 모른 채 "녹내장이니까 무조건 안 돼"라며 필요한 정신과 치료를 스스로 포기합니다. 그건 대개 불필요한 손해입니다.

왜 폐쇄각에서만 위험한가

기전을 알면 어떤 약이 위험한지 저절로 이해됩니다.

폐쇄각 발작은 동공이 커질 때(산동) 잘 생깁니다. 동공이 커지면 홍채가 두툼하게 뭉치면서 안 그래도 좁은 배출로를 아예 막아버리거든요. 그러면 방수가 갇혀 안압이 순식간에 치솟습니다.

그래서 동공을 키우는 성질(항콜린 작용, 세로토닌 작용)이 있는 약이 문제가 됩니다. 이미 각이 넓게 열려 있는 개방각에서는 동공이 좀 커져도 배출로가 막히지 않으니 이 위험이 없습니다. 같은 약이 개방각에선 괜찮고 폐쇄각에선 위험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폐쇄각(협우각)이라면 조심할 약

아래는 항콜린·산동 작용이 강해, 좁은 각을 가진 분에게 급성 폐쇄각을 유발할 수 있다고 알려진 약들입니다.

  • 삼환계 항우울제(TCA)아미트립틸린(에나폰), 이미프라민 등. 항콜린 작용이 가장 강해 위험도 가장 높습니다. 폐쇄각 위험이 있는 분에게는 피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 파록세틴(팍실) — 흔한 SSRI지만, SSRI 중에서는 항콜린 작용이 두드러지는 편이라 상대적으로 주의가 필요합니다.
  • 항히스타민계 항불안제하이드록시진(유시락스) 등. 항콜린 작용이 있습니다.
  • 저역가 항정신병약과 일부 비정형 — 클로르프로마진, 그리고 클로자핀·올란자핀처럼 항콜린 작용이 있는 약.
  • 토피라메이트 — 이건 기전이 완전히 다른 특별한 경우라, 아래에서 따로 다룹니다.

이 약들도 "폐쇄각 환자에게 절대 금지"라기보다, 좁은 각을 확인한 경우 신중히 피하거나 대안을 먼저 고려한다는 뜻입니다. 판단은 안과 소견을 본 전문의가 합니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약

반대로, 항콜린·산동 작용이 적어 부담이 덜한 약들입니다. 폐쇄각이 걱정되는 분에게 대안으로 자주 고려됩니다.

다만 여기서도 SSRI에 대해서는 연구 결과가 조금 엇갈립니다. 복용을 막 시작한 초기(첫 1~2주)에 좁은 각을 가진 사람에서 급성 폐쇄각 위험이 잠깐 오른다는 보고가 있는 반면, 장기적으로는 위험이 없다는 메타분석도 있습니다. 그래서 "안전하다"는 것도 폐쇄각 위험을 미리 확인하고 시작한다는 전제 위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수면·신경안정 목적으로 자주 쓰는 약은 어떤가요

잠이나 불안 때문에 흔히 쓰는 약들에 대한 질문이 특히 많아, 따로 정리합니다.

  • 벤조디아제핀 — 의외로 논쟁적입니다. 로라제팜(아티반)·디아제팜(바리움) 등 여러 약의 설명서에는 "협우각 녹내장에 금기"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경고는 사실 오래전 단 한 건의 증례에서 비롯됐고, 이후 여러 연구는 오히려 벤조디아제핀이 안압을 약간 낮춘다는 쪽이었습니다. 그래서 실제 위험은 낮게 봅니다. 다만 최근 노인 대상 연구에서 복용을 막 시작한 첫 주에 위험이 잠깐 오른다는 보고도 있어, 좁은 각이 확인된 고령자라면 시작 초기에만 주의하면 충분합니다.
  • Z-드럭·오렉신 차단제·멜라토닌계 수면제 — 졸피뎀, 렘보렉산트(데이비고) 같은 약과 멜라토닌 계열은 항콜린 작용이 없어 폐쇄각 부담이 가장 적은 축입니다.
  • 쿠에티아핀(쎄로켈) — 저용량으로 수면에 널리 쓰이지만, 항콜린 작용이 있어 좁은 각에서는 주의가 필요한 쪽입니다. 잠 때문에 쓰는 것이라도, 폐쇄각 위험이 있다면 반드시 알리는 게 좋습니다.
  • 트라조돈(트리티코) — 항콜린 작용이 약한 편이라 비교적 무난합니다. 다만 드물게 산동으로 급성 근시·안압 상승이 보고된 증례가 있어, 녹내장 가족력이나 좁은 각이 있다면 정기 안과 검사와 함께 쓰는 편이 안전합니다.
  • 독세핀 등 저용량 삼환계 수면제독세핀(사일레노)처럼 잠을 위해 소량 쓰는 삼환계도 결국 TCA라, 앞서 말한 삼환계와 같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 항히스타민 수면보조제 — 디펜히드라민 같은 성분은 항콜린 작용이 있어, 좁은 각에서는 피하는 편이 낫습니다.

정리하면, 수면·신경안정 목적 약 중에서는 Z-드럭·오렉신 차단제·멜라토닌계가 가장 부담이 적고, 벤조디아제핀은 설명서 경고와 달리 실제 위험이 낮으며, 쿠에티아핀·독세핀·항히스타민계는 좁은 각에서 주의가 필요합니다.

토피라메이트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반드시 구분해야 할 약이 하나 있습니다. 토피라메이트(토파맥스) 입니다. 편두통·기분조절·식욕억제 등에 두루 쓰이는 약인데, 녹내장과 관련해 다른 약들과 기전이 전혀 다릅니다.

토피라메이트는 항콜린 작용으로 동공을 키우는 게 아니라, 섬모체와 맥락막에 물이 차오르는 특이 반응(섬모체맥락막삼출) 을 일으켜 렌즈를 앞으로 밀어냅니다. 그 결과 양쪽 눈에 갑작스러운 근시와 급성 폐쇄각이 동시에 생길 수 있습니다.

중요한 차이가 둘 있습니다.

  • 원래 각이 좁지 않아도 생길 수 있습니다. 다른 약과 달리, 해부학적으로 정상인 눈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특이 반응입니다.
  • 대개 복용 시작 후 첫 한 달 안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약은 미국 등에서 이 부작용에 대한 별도 경고문을 달고 있습니다.

토피라메이트를 시작한 뒤 갑자기 눈이 아프거나, 시야가 흐려지거나, 가까운 것이 안 보이게 되면(급성 근시) 지체 없이 약을 중단하고 안과 응급 진료를 받아야 합니다.

이런 증상은 응급입니다

종류를 떠나, 아래 증상은 급성 폐쇄각 발작의 신호일 수 있고 응급 상황입니다. 실명을 막으려면 빠른 처치가 필요합니다.

  • 갑작스러운 심한 눈 통증과 충혈
  • 시야가 뿌옇게 흐려짐, 불빛 주위로 무지개 테(halo)가 보임
  • 한쪽 머리의 두통, 구역·구토
  • 동공이 커진 채 잘 줄어들지 않음

정신과 약을 새로 시작한 뒤 이런 증상이 나타나면, 약을 계속 먹을지 말지 스스로 고민하지 말고 즉시 안과 응급 진료를 받으세요.

그래서 실제로 어떻게 하면 되나

  • 첫째, 안과에서 진단명을 정확히 확인하세요. "개방각인지 폐쇄각인지, 각이 좁은지"를 물어보고 메모해두면, 정신과 진료가 훨씬 정확해집니다.
  • 둘째, 정신과 진료 때 녹내장을 반드시 알리세요. 종류까지 함께 전하면, 처음부터 안전한 약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 셋째, 폐쇄각이라면 안과와 상의하세요. 좁은 각은 예방적 레이저 시술(홍채절개술) 로 미리 열어두면 급성 발작 위험이 크게 줄어, 그 뒤로는 약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 넷째, 자의로 끊지 마세요. 겁이 나서 약을 갑자기 중단하는 것이, 잘 관리되던 폐쇄각보다 오히려 더 큰 문제(재발·중단증후군)를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 전문의 한마디

진료실에서 "녹내장 있는데 이 약 괜찮나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저는 바로 답하지 않고 되묻습니다. "어느 안과에서 뭐라고 하셨어요? 개방각이라고 하던가요, 각이 좁다고 하던가요?" 대부분은 그 구분을 모르고 계세요. 그런데 바로 그게 답을 가르는 열쇠입니다.

제일 안타까운 경우는, 개방각 녹내장인데도 "녹내장이니까 안 돼"라고 지레짐작하고 필요한 우울증·불안 치료를 몇 년씩 미뤄오신 분들입니다. 대부분은 안전하게 쓸 수 있었는데 말이죠. 반대로, 각이 좁은 걸 모르고 항콜린 강한 약을 덜컥 쓰면 그건 그것대로 위험합니다.

그래서 제가 드리는 부탁은 하나입니다. 녹내장이 있으시면, 그 종류를 꼭 알아 오세요. 안과 선생님께 "제 녹내장이 개방각인가요 폐쇄각인가요, 각이 좁은가요"라고 한 번만 여쭤보시면 됩니다. 그 한 줄의 정보가, 우리가 함께 안전하고 정확한 치료를 고르는 출발점이 됩니다.


녹내장과 정신과 약의 관계는 "된다/안 된다"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녹내장에 어떤 약이냐"의 문제입니다. 다수인 개방각이라면 걱정보다 선택지가 넓고, 소수인 폐쇄각이라면 피할 약과 고를 약이 비교적 분명하며, 예방 시술이라는 길도 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필요한 치료를 미루지도, 방심하다 위험을 놓치지도 않는 것 — 그 균형은 결국 내 눈의 상태를 정확히 아는 데서 시작합니다.

함께 보면 좋은 자료

  • 약물 유발 급성 폐쇄각 녹내장 (American Academy of Ophthalmology, EyeNet): 자료
  • 정신과 약물과 녹내장 위험 (PsychDB): 자료
  • 토피라메이트 유발 급성 근시와 폐쇄각 녹내장의 기전 (Ophthalmology, 2004): 원문
  • 벤조디아제핀 사용과 급성 폐쇄각 녹내장 위험, 인구기반 사례교차연구 (Drug Safety, 2020): 원문
  • 벤조디아제핀계 항불안·수면제와 협우각 녹내장이라는 근거 빈약한 금기 (Therapie, 2002):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