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약 중에 이만큼 이름과 실제가 따로 노는 약은 없습니다. 트라조돈(Trazodone), 국내에서는 주로 트리티코(Trittico) 라는 이름으로 처방되는 약입니다.
서류상 이 약은 항우울제입니다. 식약처 허가사항에도 우울증 약이라고 적혀 있고, 하루 150mg으로 시작해 400mg까지 올리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진료실에서 이 약이 그 용량으로 쓰이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25~50mg, 허가 용량의 6분의 1도 안 되는 양으로, 잠들기 위해 처방됩니다.
더 놀라운 건 미국 통계입니다. 트라조돈은 수면제로 승인받은 적이 한 번도 없는데도, 미국에서 불면증에 가장 많이 처방되는 약입니다 — 졸피뎀을 포함한 FDA 승인 수면제를 전부 합친 것보다 많이 처방됩니다.
허가받은 용도로는 잘 안 쓰이고, 허가받지 않은 용도로 세계 1등인 약.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요?
핵심 정보 한눈에
- 상품명: 트리티코(Trittico, 국제약품) / 명인트라조돈(명인제약) 등
- 성분명: 트라조돈(Trazodone)
- 분류: SARI 계열 항우울제 — 벤조디아제핀도, 졸피뎀류도 아닙니다
- 가장 중요한 점: 향정신성의약품이 아닙니다. 의존·내성이 거의 없습니다
- 주 용도(허가): 우울증 / 실제 용도: 대부분 불면 (허가 밖 사용)
- 흔한 용량: 잠 목적이면 자기 30~60분 전 25~50mg, 항우울 목적이면 150mg 이상
- 가장 큰 단점: 다음 날 처짐, 어지럼·기립성 저혈압(노인 낙상), 그리고 드물지만 지속발기증
⚠️ 이 글은 정보 제공용입니다. 약의 시작·변경·중단은 반드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 상의하세요.
왜 항우울제가 수면제가 됐을까
트라조돈은 SARI(세로토닌 길항·재흡수 억제제) 라는 계열입니다. 이름은 복잡하지만, 이 약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건 딱 하나입니다 — 이 약은 용량에 따라 전혀 다른 일을 합니다.
이 그림은 이런 뜻입니다. 트라조돈은 낮은 용량에서 먼저 '재우는 스위치'부터 켭니다. 세로토닌 5-HT2A 수용체와 히스타민 H1 수용체를 막는데, 이 둘이 바로 졸음을 만드는 스위치입니다. 그래서 25~50mg만 먹어도 잠이 옵니다. 항우울 효과를 내려면 그보다 훨씬 높은 150mg 이상이 필요한데, 그 용량에서는 너무 졸려서 일상생활이 어려워집니다.
결과적으로 이 약은 이런 운명을 맞았습니다. 항우울제로는 "졸려서 못 쓰겠다"며 밀려났고, 대신 그 졸림 자체를 목적으로 쓰는 약이 됐습니다. 부작용이 주인공이 된, 흔치 않은 경우입니다.
이 약이 사랑받는 진짜 이유 — 중독되지 않는다
핵심 — 트라조돈이 수면제 자리를 차지한 결정적 이유는 효과가 세서가 아니라, 졸피뎀·자낙스와 달리 향정신성의약품이 아니고 의존·내성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덜 강력한 대신, 오래 써도 비교적 안전한 약 — 이것이 이 약의 전부입니다.
기존 수면제들의 고민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트라조돈은 이 목록에서 자유롭습니다. GABA를 건드리지 않아 의존이 거의 생기지 않고, 내성으로 용량을 계속 올릴 일도 드물고, 향정신성의약품으로 지정돼 있지도 않습니다. 기억상실이나 몽유 같은 복잡한 수면 행동도 훨씬 적습니다.
그래서 이 약의 자리는 분명합니다 — 불면이 오래갈 것 같은데 중독되는 약은 피하고 싶을 때. 특히 우울증이나 불안이 함께 있는 불면이라면, 어차피 마음도 함께 다뤄야 하니 더 자연스러운 선택이 됩니다.
참고로 같은 발상의 약이 하나 더 있습니다. 미르타자핀(레메론) 역시 저용량에서 강한 졸음을 일으키는 항우울제라 불면에 함께 거론됩니다. 다만 미르타자핀은 식욕과 체중을 늘리는 작용이 뚜렷하다는 점이 갈림길입니다 — 살이 빠지고 잠 못 드는 분에게는 오히려 장점이 되고, 체중이 걱정인 분에게는 트라조돈이 무난한 선택이 됩니다.
효과는 어떤가요? — 여기서는 냉정해야 합니다
이 약을 소개하면서 가장 정직해야 할 대목입니다. 트라조돈이 잠에 미치는 효과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미국수면의학회(AASM)는 만성 불면증 치료 지침에서 트라조돈을 '권고하지 않는다(약한 권고)'고 정리했습니다. 근거가 된 임상시험에서 트라조돈 50mg의 성적표는 이랬습니다 —
- 잠드는 시간: 10.2분 단축
- 총 수면시간: 21.8분 증가
- 자다 깨어 있는 시간: 7.7분 감소
통계적으로는 위약보다 낫지만, 임상적으로 의미 있다고 보기엔 부족한 수준이라는 것이 학회의 판단이었습니다. 게다가 근거가 된 양질의 연구가 사실상 한 편뿐이라는 점도 지적됐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처방되는 불면증 약치고는 초라한 근거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반론이 있습니다. 이 지침의 근거가 된 연구들은 우울증이 없는 순수 불면증 환자를 대상으로 했습니다. 정작 현실에서 트라조돈이 쓰이는 자리는 우울·불안이 깔린 불면입니다. 그래서 "AASM 지침이 이 약의 실제 쓰임새에 맞는 잣대인가"라는 문제 제기가 이어집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트라조돈은 "졸피뎀만큼 확실히 재워주는 약"이 아닙니다. 대신 "덜 재워주지만 중독되지 않는 약" 입니다. 이 교환을 알고 시작하는 것이 이 약에 실망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부작용 — 무엇을 조심해야 하나
- 다음 날 처짐(숙취감) — 가장 흔한 불만입니다. 반감기가 짧지 않아 아침까지 남을 수 있습니다. 너무 늦게 먹지 말고, 잠들기 30~60분 전에 드시는 것이 요령입니다. 그래도 처지면 용량을 낮춥니다.
- 어지럼·기립성 저혈압 — 이 약은 혈관을 넓히는 작용(알파-1 차단)이 있어 일어설 때 핑 도는 느낌이 생깁니다.
- 노인의 낙상 — 위 두 가지가 겹쳐 밤중에 화장실 가다 넘어지는 사고가 실제로 생깁니다. 노인에게 쓸 때는 아주 낮은 용량에서 시작하고, 밤에 천천히 일어나시도록 안내합니다.
- 입마름, 두통, 메스꺼움
- 술과 함께 마시지 마세요 — 진정 작용이 겹칩니다.
성기능은 오히려 유리한 편입니다. SSRI의 대표적 약점인 성욕 저하·사정 지연이 이 약에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성기능 관련해서, 이 약에는 반드시 알아야 할 부작용이 하나 있습니다.
남성이라면 이것만은 알고 드세요 — 지속발기증
지속발기증(priapism) 은 성적 흥분과 무관하게 발기가 계속되고, 아프고, 저절로 가라앉지 않는 상태입니다. 트라조돈의 부작용 중 가장 유명하고, 가장 중요합니다.
먼저 안심하실 부분. 아주 드뭅니다. 발생률은 대략 1,000명에서 10,000명 중 1명 수준으로 보고되고, 대부분 복용 시작 후 첫 한 달 안에 나타납니다. 즉 몇 년을 잘 드시고 계신 분이 갑자기 겪을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알아야 하는 이유. 이 부작용은 드문 대신 생기면 응급 상황입니다. 발기가 4시간 넘게 지속되면 음경 조직이 손상되기 시작하고, 늦게 치료하면 영구적인 발기부전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과 약이 유발하는 지속발기증의 79%가 트라조돈이라는 보고가 있을 만큼 이 약의 대표 경고로 다뤄집니다.
행동 수칙은 딱 하나입니다. 발기가 4시간 이상 지속되거나 통증이 있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즉시 응급실로 가세요. "민망해서" 참다가 시기를 놓치는 것이 가장 나쁜 결과를 만듭니다. 이 부작용은 아는 사람에게는 거의 위험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에게만 위험합니다.
임신·수유 중에는?
임신 중 트라조돈에 대한 자료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임신 계획이 있거나 임신·수유 중이라면 자가 판단하지 마시고 먼저 상의해 주세요. 불면과 우울을 방치하는 것 역시 임신에 좋지 않으므로, 득실을 함께 따져 결정할 문제입니다.
함께 조심해야 할 것 — 상호작용
- 다른 세로토닌계 약과 겹칠 때 — SSRI 등과 함께 쓰면 드물게 세로토닌 증후군(세로토닌이 과해져 열·떨림·혼란이 오는 응급 상태)이 생길 수 있습니다. 다만 실제로는 SSRI에 저용량 트라조돈을 얹어 잠을 돕는 조합이 흔하게, 안전하게 쓰입니다. 의사가 알고 조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MAO 억제제와는 병용 금기 — 다만 MAO 억제제는 요즘 국내 정신과에서 거의 쓰이지 않으니 대부분 해당되지 않습니다.
- CYP3A4를 막는 약(일부 항진균제·항생제 등)과 함께 쓰면 농도가 올라갈 수 있습니다. 자몽주스도 같은 이유로 피하는 편이 낫습니다.
- 혈압약과 겹치면 어지럼이 심해질 수 있습니다.
끊을 때는 어떻게 하나요?
이 약의 편한 대목입니다. 의존과 내성이 거의 없어 벤조디아제핀처럼 정교한 감량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오래·고용량으로 드셨다면 갑자기 끊을 때 불면이 되돌아오거나 불편감이 생길 수 있어, 서서히 줄이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늘 같은 이야기지만 — 만성 불면의 근본 해법은 약이 아니라 불면증 인지행동치료(CBT-I) 입니다. 약은 그 과정을 버티게 해주는 도구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A)
Q. 저는 우울증이 아닌데 왜 항우울제를 처방받았죠? 가장 많이 받는 질문입니다. 트라조돈은 저용량에서 잠드는 작용이 먼저 나타나기 때문에, 우울증이 없어도 불면 목적으로 씁니다. 25~50mg은 항우울 용량(150mg 이상)에 한참 못 미치는 양입니다. "당신을 우울증으로 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Q. 중독되나요? 트라조돈은 의존·내성이 거의 없고 향정신성의약품도 아닙니다. 이 점이 이 약을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Q. 졸피뎀보다 잘 듣나요? 솔직히 말하면 아닙니다. 잠드는 힘 자체는 졸피뎀이 셉니다. 트라조돈은 덜 강한 대신 중독되지 않는 쪽을 택한 약입니다. 오래 써야 할 것 같은 불면에 유리합니다.
Q. 다음 날 아침에 너무 처져요. 흔한 불만입니다. 용량을 낮추거나(25mg 등) 복용 시간을 앞당기면 대개 나아집니다. 참지 말고 알려주세요.
Q. 발기가 오래 지속되면요? 4시간 이상 지속되거나 아프면 바로 응급실로 가세요. 아주 드문 부작용이지만 응급 상황입니다. 민망해서 미루는 것이 가장 위험합니다.
Q. SSRI랑 같이 먹어도 되나요? 실제로 아주 흔한 조합입니다. SSRI로 우울을 치료하면서 초기 불면을 트라조돈으로 돕는 식이죠. 다만 의사가 알고 조합해야 합니다.
💬 전문의 한마디
저는 트라조돈을 '수수한 약' 이라고 부릅니다. 화려하지 않아요. 졸피뎀처럼 딱 떨어지게 재워주지도 않고, 학회 지침에서도 대접이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진료를 오래 하다 보면 이 수수함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불면은 대개 몇 주로 끝나지 않고, 몇 달 혹은 그 이상 함께 가야 하는 문제거든요. 그 긴 시간을 함께 갈 약으로 중독되는 약을 고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약을 드릴 때 기대치를 정확히 맞춰드립니다. "이건 기절시키는 약이 아닙니다. 잠의 문턱을 살짝 낮춰주는 약이에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시작하면 대부분 만족하시고, "졸피뎀처럼 확 잠드는 약"을 기대하고 시작하면 실망하십니다. 같은 약, 같은 용량인데 설명 한 줄이 결과를 가릅니다. 그리고 남성 환자분께는 지속발기증 이야기를 꼭 합니다. 처음엔 저도 이 얘기를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아주 드물지만 알면 대처가 되고, 모르면 민망해서 참다가 큰일이 나는 부작용이니까요. "4시간 넘으면 바로 응급실" — 이 한 줄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트라조돈은 허가증에 적힌 대로 살지 못한 약입니다. 우울증 약으로 태어났지만 우울증엔 잘 쓰이지 않고, 수면제로 허가받은 적은 없지만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불면증 약이 됐습니다. 강해서가 아니라, 오래 곁에 둬도 되는 약이라서 얻은 자리입니다. 어떤 약이든 나에게 맞는 약은 사람마다 다르고, 시작·조절·중단은 반드시 전문의와 함께 정해야 합니다. 잠은 결국 되찾을 수 있고, 그 길에 중독되지 않는 동행이 하나쯤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위안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