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약 중에 한 번 죽었다가 되살아난 약이 하나 있습니다.
1970년대에 사람이 죽어서 시장에서 사라졌고, 10여 년 뒤 한 편의 연구 때문에 되돌아왔습니다. 지금은 다른 약이 전부 실패했을 때 마지막으로 꺼내는 카드입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마지막 카드인데 실력은 제일 좋습니다.
클로자핀(Clozapine, 상품명 클로자릴) 이야기입니다.
핵심 정보 한눈에
- 상품명: 클로자릴(Clozaril) — 노바티스 오리지널. 국내에는 제네릭도 함께 유통
- 성분명: 클로자핀(Clozapine)
- 분류: 비정형(2세대) 항정신병약물 — 사실 비정형이라는 개념 자체를 만든 원조
- 국내 허가 용도: 치료저항성 조현병. 다른 항정신병약에 충분히 반응하지 않거나, 부작용 때문에 쓸 수 없는 경우
- 최대 강점: 치료저항성 조현병에서 다른 약보다 우월하다고 입증된 유일한 약. 여기에 자살 위험과 전체 사망률까지 낮춘다는 근거가 따로 있습니다
- 최대 약점: 드물지만 무과립구증(백혈구가 급감하는 혈액 부작용) → 정기 혈액검사가 의무
- 정작 더 흔한 위험: 사실 변비입니다. 뒤에서 자세히
- 2025년의 변화: 미국 FDA가 30년 넘게 유지하던 의무 모니터링 제도(REMS)를 폐지했습니다
- 가장 큰 오해: "제일 위험한 약" → 정확히는 "제일 늦게 쓰여서 문제인 약"입니다
⚠️ 이 글은 정보 제공용입니다. 약의 시작·변경·중단은 반드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 상의하세요.
1975년, 이 약은 한 번 사라졌습니다
클로자핀은 1958년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초기부터 평판이 좋았어요. 당시 항정신병약의 고질병이던 손떨림·근육강직 같은 추체외로 부작용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건 당시 기준으로 굉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 핀란드에서 클로자핀을 복용하던 환자들에게 무과립구증이 잇따라 생기고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백혈구 중 세균과 싸우는 호중구가 급감해 감염을 막지 못하게 되는 상태였죠. 약은 곧바로 시장에서 물러났습니다.
여기까지가 보통 약이라면 이야기의 끝입니다. 그런데 클로자핀은 아니었습니다.
1988년, 한 편의 연구가 약을 되살렸습니다
문제는 다른 약이 듣지 않는 환자들이었습니다. 조현병 환자의 25~33%는 항정신병약을 충분한 용량으로 충분한 기간 써도 증상이 남습니다. 이걸 치료저항성 조현병이라 부릅니다. 이분들에게는 선택지가 사실상 없었습니다.
1988년, 케인(Kane) 연구팀이 바로 그 환자들만 모아 이중맹검 연구를 했습니다. 이미 여러 약에 실패한 사람들에게 클로자핀과 기존 약(클로르프로마진)을 비교한 것이죠. 결과는 명확했습니다. 클로자핀이 뚜렷하게 우월했습니다.
이후 축적된 데이터도 같은 방향입니다. 치료저항성 조현병 환자를 모은 체계적 문헌고찰·메타분석에서 클로자핀 반응률은 약 40%, 증상 척도(PANSS)로는 평균 22점 감소였습니다. 이미 여러 약이 실패한 사람들 중 열에 넷이 반응했다는 뜻입니다.
이 숫자를 조금 다르게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조현병 환자의 4분의 1에서 3분의 1이 치료저항성이고, 그중 40%가 클로자핀에 반응한다면, 끝내 반응하지 않는 '초저항성'은 전체 조현병의 12~20% 정도로 좁혀집니다. 클로자핀이 등장하기 전에는 이 두 집단이 구분되지도 않았습니다.
핵심 — 클로자핀은 "조금 더 나은 약"이 아닙니다. 다른 항정신병약들끼리는 효과 차이를 두고 오래 논쟁했지만, 치료저항성 조현병에서 클로자핀이 낫다는 것만큼은 논쟁이 아니라 합의입니다. 대체재가 없습니다.
왜 잘 듣는지는, 사실 아직 모릅니다
솔직하게 적겠습니다. 이 약이 왜 특별한지 아무도 확실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보통 항정신병약은 도파민 D2 수용체를 꽉 붙잡아서 효과를 냅니다. 그런데 클로자핀은 D2를 오히려 약하게, 헐겁게 잡습니다. 상식대로라면 효과가 약해야 하는데 정반대죠. 그래서 세로토닌·무스카린·히스타민·노르아드레날린 등 여러 수용체를 동시에 건드리는 이 약의 '지저분함' 자체가 비결일 거라는 설명, 글루타메이트 쪽을 건드린다는 설명 등이 나와 있지만 결론은 아직 없습니다.
기전을 모르는데 효과는 확실한 약. 정신약리학에서 이런 경우는 드뭅니다. 그래서 클로자핀은 지금도 연구자들에게 흥미로운 대상입니다. 이 약을 이해하면 조현병을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에요.
증상만 줄이는 게 아닙니다
클로자핀이 다른 항정신병약과 갈라지는 지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첫째, 자살 위험. 조현병에서 자살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국제 다기관 연구(InterSePT)는 자살 위험이 높은 조현병 환자에게 클로자핀과 올란자핀을 비교했고, 클로자핀 쪽에서 자살 행동이 유의하게 적었습니다. 미국에서 클로자핀이 '조현병의 자살 위험 감소'라는 적응증을 따로 갖고 있는 이유입니다. 정신과 약 중에 이런 적응증을 가진 약은 흔치 않습니다.
둘째, 전체 사망률. 핀란드에서 조현병 환자 62,250명을 20년간 추적한 대규모 등록연구(World Psychiatry, 2020)를 비롯해 여러 나라의 코호트 연구에서, 클로자핀을 쓴 환자군의 전체 사망률이 오히려 더 낮았습니다. '위험한 약'이라는 이미지와 정면으로 어긋나는 결과죠.
이게 모순처럼 들리지만 이유는 간단합니다. 조현병 자체가 수명을 크게 깎는 병이고, 증상이 조절되지 않은 채 사는 것의 위험이 약의 위험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무서워해야 하나
이제 부작용입니다. 여기서 꼭 짚고 싶은 게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것과 실제로 위험한 것이 어긋나 있습니다.
무과립구증, 유명하지만 드뭅니다
이 약을 한 번 퇴출시켰던 그 부작용입니다. 호중구가 급격히 떨어져 감염에 무방비가 되는 상태로, 발생률은 1% 미만입니다. 대부분 치료 시작 후 첫 몇 달에 나타납니다.
드물지만 무시할 수는 없어서 정기 혈액검사를 합니다. 국내 기준으로는 투여 전 정상 확인 → 처음 18주는 매주 → 이후 최소 4주마다 → 완전히 중단한 뒤에도 4주간 측정합니다. 처방 의사·약사·환자 모두 CPMS(클로자핀 환자 모니터링 시스템)에 등록해야 하고요. 번거롭습니다. 솔직히 아주 번거롭습니다. 그런데 이 감시망이 작동한 뒤로 무과립구증으로 인한 사망은 크게 줄었습니다.
변비, 덜 유명하지만 훨씬 위험합니다
여기가 제가 이 글에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입니다.
클로자핀은 장의 운동을 강하게 떨어뜨립니다. 복용자의 15~60%가 변비를 겪습니다. 흔하죠. 문제는 이게 단순한 불편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방치하면 장마비(마비성 장폐색)로 진행하고, 그 지경까지 가면 사망에 이를 수 있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의 변비는 약 0.3%로 무과립구증보다 흔하지 않아 보이지만, 일단 생기면 치명률이 매우 높습니다. 일부 분석에서는 클로자핀 관련 사망 원인으로 무과립구증보다 장 문제 쪽이 더 많다고 보고됐습니다.
그런데 무과립구증은 온 나라가 시스템을 만들어 감시하는 반면, 변비는 "약 드시면서 변비 있으세요?"라고 묻는 사람이 없으면 그냥 지나갑니다. 이 비대칭이 클로자핀 치료의 가장 큰 맹점입니다.
그래서 클로자핀을 쓸 때는 처음부터 변비약을 함께 시작하고, 배변 상태를 매 진료마다 확인하는 것이 원칙에 가깝습니다. 복용 중이시라면 이것만은 꼭 기억해 주세요. "3~4일 이상 변을 못 봤다"는 말은 절대 사소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배가 빵빵하고 아프고 토한다면 그건 응급실 사안입니다.
그 외 알아둘 것들
- 심근염: 드물지만 치료 시작 후 첫 2개월에 위험이 집중됩니다. 이 시기에 발열, 가슴 두근거림, 숨참, 심한 피로가 생기면 바로 알려야 합니다.
- 침 흘림: 흔합니다. 다른 약들은 대개 입을 마르게 하는데 클로자핀은 반대로 자면서 베개가 젖을 만큼 침이 나옵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삶의 질에는 꽤 지장이 있어서, 이것 때문에 약을 그만두고 싶어 하는 분이 실제로 많습니다. 대처법이 있으니 참지 말고 말씀하세요.
- 발작: 용량이 올라갈수록 위험이 커집니다. 고용량에서는 항경련제를 함께 쓰기도 합니다.
- 진정·체중 증가·대사 문제: 졸림이 상당하고, 체중과 혈당·지질 부담은 올란자핀과 함께 항정신병약 중 가장 큰 축입니다.
- 드물게 폐렴·혈전: 장기 추적 연구에서 장마비와 함께 부담이 큰 항목으로 지목됩니다.
2025년, 미국은 감시 제도를 없앴습니다
최근 이 약을 둘러싼 가장 큰 뉴스입니다.
미국은 오랫동안 REMS라는 강제 프로그램으로 클로자핀을 관리했습니다. 의사와 약국이 등록해야 하고, 혈액검사 결과를 시스템에 올려야 하고, 승인이 떨어져야 약을 내줄 수 있는 구조였죠. 안전을 위한 장치였지만 동시에 거대한 장벽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FDA는 2025년 2월부터 이 절차를 사실상 요구하지 않기 시작했고, 6월 13일자로 REMS를 공식 폐지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약이 너무 안 쓰이고 있어서.
FDA가 근거로 든 숫자가 인상적입니다. 미국에서 치료저항성 조현병 환자는 약 120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2023년에 실제로 클로자핀을 처방받은 사람은 14만 8천 명이었습니다. 필요한 사람의 열에 한둘만 쓰고 있었다는 뜻이죠.
다만 오해하시면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폐지된 것은 '행정 절차'이지 '혈액검사'가 아닙니다. FDA도 처방 정보에 적힌 주기대로 호중구 수치를 계속 확인하라고 명시했습니다. 그리고 국내 기준은 여전히 종전대로입니다. 한국에서 클로자핀을 드신다면 지금도 정기 채혈을 하셔야 합니다.
왜 이렇게 늦게, 적게 쓰일까요
이 약의 진짜 문제는 부작용이 아니라 타이밍입니다.
지침대로라면 서로 다른 항정신병약을 두 가지 충분히 써보고 안 되면 클로자핀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 사이에 세 번째, 네 번째 약이 끼어들고, 두 가지를 섞어 쓰는 시도가 이어지고, 그러다 몇 년이 흐릅니다. 국내외 연구가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문제입니다.
이유는 여러 겹입니다. 의사 입장에서는 채혈 일정 관리와 부작용 감시가 부담스럽고, 나빠졌을 때 책임이 무겁게 느껴집니다. 환자와 가족 입장에서는 "마지막 약"이라는 말이 곧 "마지막 희망"처럼 들려서, 그 카드를 아껴두고 싶어집니다. 매주 피를 뽑아야 한다는 조건도 시작을 미루게 만들고요.
그런데 여기에 뼈아픈 사실이 있습니다. 클로자핀은 늦게 시작할수록 반응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증상이 굳어지고 기능이 깎인 뒤에 시작하면 되돌릴 수 있는 폭이 줄어듭니다. 아껴둔 카드가 아껴둔 만큼 약해지는 셈입니다.
💬 전문의 한마디
클로자핀 이야기를 할 때 저는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낍니다. 하나는 미안함입니다. 매주 피를 뽑고, 침이 흐르고, 살이 찌고, 변비로 고생하는 걸 옆에서 보면서 "그래도 이 약이 낫습니다"라고 말해야 하니까요. 다른 하나는 안도감입니다. 여러 약을 거치며 지쳐 있던 분이 클로자핀을 쓰고 몇 달 만에 다시 대화가 되고, 다시 웃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걸 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장면을 한 번이라도 본 의사는 이 약을 함부로 미루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약을 '최후의 수단'이라고 부르는 관행이 늘 조금 불편합니다. 최후에 쓰라는 뜻이 아니라, 조건이 맞으면 제때 쓰라는 뜻이어야 합니다. 지금 두 가지 약을 충분히 써봤는데도 증상이 남아 있다면, 다음 진료 때 "클로자핀은 어떤가요"라고 한 번 물어보셔도 좋겠습니다. 그 질문은 무모한 게 아니라 정확한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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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료저항성 조현병에서 클로자핀 반응률 메타분석 (Siskind 등, 2017): PubMed
- 항정신병약과 20년 사망률, 핀란드 62,250명 코호트 (Taipale 등, World Psychiatry, 2020): 원문
- 클로자핀 치료 환자의 장마비·폐렴 부담, 핀란드 25년 추적 (American Journal of Psychiatry): 원문
- FDA, 클로자핀 REMS 제도 폐지 발표(2025): FDA 안전성 서한
- 클로자핀 REMS 폐지 1년 뒤의 평가 (Psychiatric News, 2026): 기사
- 클로자릴정 국내 허가사항: 식약처 의약품통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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