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말씀부터 드리고 싶습니다. 보내주시는 메일은 전부 읽고 있습니다. 어렵게 꺼내셨을 이야기라는 걸 압니다. 몇 번을 고쳐 쓰다 보냈을 문장들이 눈에 보입니다. 읽고도 답을 드리지 못한 채 넘기는 게 저도 마음이 편치 않아서, 사정을 한 번은 제대로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답장을 드리지 못하는가

핑계처럼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진찰 없이 드리는 답은 틀릴 수 있고, 틀린 답은 해가 됩니다. 메일 몇 줄에 담긴 증상만으로 "그 약을 끊어도 되는지", "이게 우울증인지"를 판단하는 건 의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진료실에서는 표정과 말의 속도, 지난 경과, 다른 약과의 관계, 검사 결과까지 놓고도 신중하게 결정하는 일들입니다. 그걸 글 몇 줄로 답하면 그건 의학이 아니라 점괘에 가깝고, 혹시 맞더라도 우연입니다. 제가 드린 어설픈 답 때문에 다니시던 병원의 치료가 흔들리는 것 — 그게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입니다.

둘째, 법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진료는 의사가 환자를 직접 진찰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메일로 특정 개인의 증상에 대해 진단이나 처방에 해당하는 답을 드리는 것은 그 바깥에 있습니다. 이 사이트가 개별 환자의 사례를 다루지 않는다고 처음부터 못 박아 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 대신, 이렇게 해 보세요

상황별로 갈 곳이 다릅니다.

  • 지금 위험하다고 느끼신다면 — 자살 생각이 구체적으로 들거나, 스스로를 해칠 것 같은 순간이라면 메일이 아니라 전화입니다. 자살예방 상담전화 109(24시간), 또는 가까운 응급실로 가세요. 메일은 제가 언제 읽을지 알 수 없는 곳이고, 그 시간을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 다니는 병원이 있는 분 — 약과 진단에 대한 질문의 정답은 지금의 주치의가 갖고 있습니다. 진료 시간이 짧아 묻기 어려우셨다면, 질문을 메모로 적어 가서 진료 첫머리에 꺼내 보세요. 그 몇 줄의 메모가 진료의 질을 실제로 바꿉니다.
  • 병원을 아직 못 찾은 분정신과 어디로 가야 하나요에 병원 고르는 법을 정리해 두었습니다. 진료 기록이 걱정이라면 기록에 대한 글도 함께 보세요. 비용이 부담이라면 각 시·군·구의 정신건강복지센터(1577-0199)에서 무료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선생님께 진료받고 싶어요"라는 말씀에 대하여

가장 감사하고, 가장 죄송한 메일입니다. 글을 읽고 이 사람에게 진료받고 싶다고 느끼셨다는 건 글 쓰는 사람에게 최고의 칭찬이니까요. 그런데 이 부탁만은 들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제가 어느 병원에 있는지 알려드리는 순간, 이 블로그를 익명으로 운영해 온 이유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름과 얼굴을 밝히지 않는 건 저를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 진료실에 오시는 분들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담당 의사가 글을 쓴다는 걸 알게 되면, 진료실에서 꺼낸 이야기가 혹시 글감이 되지 않을까 불안해질 수 있습니다. 그 불안은 아무리 "개별 사례는 다루지 않는다"고 약속해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진료실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방이어야 하고, 그래서 글 쓰는 저와 진료하는 저 사이에 벽을 세워 둔 겁니다. 이 벽은 지금 제 앞에 앉아 계신 분들과의 약속이라, 아무리 감사한 요청이라도 허물 수가 없습니다.

한 가지만 덧붙이면 — 이 사이트에 쓰는 내용 중에 저만 아는 것은 없습니다. 전부 공개된 연구와 교과서, 그리고 어느 정신과 의사나 공유하는 임상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치료의 성패를 가르는 건 어느 의사를 만나느냐보다 꾸준히 다닐 수 있는 가까운 병원에서 신뢰가 쌓이느냐입니다.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세요. 그 진료실에서도 여기 쓰인 것과 같은 의학이 작동합니다.

다만, 질문은 계속 보내 주세요

개별 답장을 드리지 못한다는 것이지, 질문이 소용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보내주시는 질문 중에 "이건 이분만의 궁금증이 아니겠다"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질문은 개인을 특정할 수 없는 형태로 다듬어 전문의 Q&A나 새 글로 답을 올리겠습니다. 실제로 이 사이트의 글 여러 편이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답장은 못 드려도, 어느 날 이 사이트에 올라온 글 하나가 보내셨던 질문에 대한 답일 수 있습니다.

글감이 될 질문, 글의 오류 제보, 다뤄 줬으면 하는 주제는 언제든 jeongrieul@gmail.com 으로 보내 주세요. 다 읽습니다. 그것만은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