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셨어요, 지난번 약은?" "괜찮았어요." "잠은요?" "그냥 뭐… 비슷해요." "그럼 이대로 4주 더 가볼게요. 다음에 뵐게요."
여기까지 3분. 처방전이 프린터에서 나오고, 문이 닫히고, 다음 분이 들어옵니다.
그 문이 닫히는 순간에 가끔 마음이 걸립니다. "그냥 뭐… 비슷해요"라고 하실 때 표정이 조금 흐렸거든요. 거기서 한 번 더 물었어야 했나. 그런데 이미 다음 분이 앉아 계십니다.
오늘은 이 3분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변명이 될 겁니다. 다만 변명이라는 걸 알면서 하는 변명이라는 점만 미리 말씀드릴게요.
먼저 인정할 것부터
짧은 진료에는 자주 이런 반박이 따라옵니다. "환자를 돈으로 보는 것 아니냐."
솔직히, 그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개별 의사가 탐욕스러워서가 아니라, 짧게 여러 명을 보는 쪽이 합리적 선택이 되도록 판이 짜여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대체로 판을 따라갑니다. 저도 예외가 아니고요.
그러니 "우리 선생님은 왜 이렇게 빨리 보내지?" 하는 서운함은 정당합니다. 다만 그 화살이 개인에게만 꽂히면 정작 고쳐야 할 곳이 안 보입니다. 그래서 판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판이 어떻게 생겼냐면
우리나라 외래 진료 시간은 평균 6.2분입니다. OECD 평균은 12.6분이고요. 딱 절반입니다.
숫자 하나를 더 얹으면 그림이 완성됩니다. 우리나라 의사 한 명이 1년에 보는 외래 환자는 약 7,080명, OECD 평균은 2,181명입니다. 3.3배를 봅니다. 국민 1인당 병원에 가는 횟수도 연 16.6회로 OECD 평균 7.1회의 두 배가 넘습니다.
이건 게으름이나 성실함의 문제가 아닙니다. 같은 시간 안에 세 배 많은 사람을 통과시키도록 설계된 시스템이고, 그 설계 안에서 한 사람당 쓸 수 있는 시간은 산수로 정해집니다.
정신과에는 특별히 못된 산수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여기서부터가 정신과 이야기입니다.
정신과에서 상담은 부가서비스가 아니라 치료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2018년 이전의 수가 구조는 이랬습니다.
30분 동안 한 명을 깊이 상담하면, 10분씩 세 명을 보는 것보다 수입이 절반이었습니다.
다시 읽어보셔도 됩니다. 오래 이야기를 들을수록 손해였습니다. 결과는 예상대로였고요. 2016년 통계에서 개인정신치료의 73.5%가 15분 미만이었습니다. 넷 중 셋이 15분을 못 채웠다는 뜻입니다.
이건 의사들이 나빠서 생긴 숫자가 아닙니다. 오래 듣는 사람이 손해를 보는 구조에서, 오래 듣는 사람은 줄어듭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다만 그 당연한 결과를 몇 년째 지켜보는 일은 꽤 씁쓸했습니다.
2018년에 한 번 손을 봤습니다
그래서 2018년 4월, 정부가 정신치료 수가를 개편했습니다. 자살예방 국가행동계획의 후속 조치이기도 했고, 908억 원이 들어갔습니다.
핵심은 시간을 잘게 쪼개서 값을 매긴 것입니다. 기존에는 지지요법(15분 미만)·집중요법(15~45분)·심층분석요법(45분 이상)의 세 덩어리였는데, 이걸 10분 단위 다섯 구간으로 나눴습니다. 개편 당시 기준으로 이런 모양이었습니다.
| 상담 시간 | 수가(총액 기준) |
|---|---|
| 10분 이하 | 13,628원 |
| 10~20분 | 27,221원 |
| 20~30분 | 44,505원 |
| 30~40분 | 63,239원 |
| 40분 초과 | 83,858원 |
그리고 10분 이하 진료는 수가를 5% 깎았습니다. "10분도 안 볼 거면 그건 상담이 아니라 약 처방이다"라는 메시지였죠. 동시에 본인부담률을 종별로 20%포인트씩 내려서, 의원급은 30%에서 10%로 낮췄습니다. 오래 상담해도 환자 부담이 확 늘지 않게 하려는 짝 맞추기였습니다.
방향은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 개편 이후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도 되겠다"는 여유가 생긴 것도 사실이고요. 지금 정신과 진료비가 생각보다 저렴한 것도 그때 낮아진 본인부담 덕입니다. (구체적인 액수는 정신과 처음 가는 날 글에 따로 정리해두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짧으냐면
표를 다시 보시면 답이 반쯤 보입니다.
40분을 꽉 채워 이야기를 들어도 8만 원대입니다. 반면 10분 이하로 다섯 명을 보면 7만 원 남짓. 격차가 예전만큼 잔인하지는 않지만, "오래 듣는 게 확실히 이득"인 수준까지 뒤집힌 것은 아닙니다. 임대료와 인건비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고요.
여기에 요즘은 환자가 늘었습니다. 우울증 진료 인원만 4년 만에 25% 늘어 113만 명이고, 국립대병원 정신과 초진 대기는 평균 34일까지 밀렸습니다. 대기자 명단이 길어지면 한 명당 시간을 늘리는 선택은 다음 사람의 대기를 늘리는 선택이 됩니다. 앞의 환자에게 20분을 더 쓰면 뒤의 누군가는 2주를 더 기다립니다. 이 저울질을 매일 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저울질에 익숙해진 제가 가끔 싫습니다.
그래도 3분이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닙니다
여기서부터는 진짜 변명입니다.
짧은 재진이 무의미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3분에 저는 생각보다 여러 가지를 확인하고 있거든요.
- 약이 몸에 어떻게 얹혔는지: 졸림, 속쓰림, 손떨림, 성기능, 체중. 짧게 묻지만 안 묻는 게 아닙니다.
- 잠과 식욕: 이 둘은 기분보다 먼저 움직입니다. 본인이 "그대로예요"라고 해도 수면이 바뀌었으면 뭔가 바뀐 겁니다.
- 위험 신호: 표정, 말수, 옷차림, 눈을 맞추는지. 말로 묻지 않아도 읽는 것들이 있습니다.
- 다음 4주의 결정: 유지할지, 올릴지, 바꿀지. 이건 5분이든 50분이든 결국 한 번의 판단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정신과 치료는 한 번의 만남이 아니라 여러 번의 만남으로 굴러갑니다. 3분짜리 만남이 열두 번 쌓이면 그건 36분이 아니라 '1년을 함께 지나온 관계'가 됩니다. 짧은 진료의 유일한 미덕이 있다면 그건 꾸준함입니다.
그래도 놓치는 것
변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제가 진짜로 마음에 걸리는 건 말을 꺼내려다 마는 순간입니다.
"저기, 선생님…" 하고 시작했다가 제가 처방전 쪽으로 손을 뻗는 걸 보고 "아니에요,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하며 삼키는 그 몇 초. 그게 정말 다음에 나오면 다행인데, 대개는 안 나옵니다. 그날 못 한 말은 대체로 그냥 사라집니다.
그리고 "괜찮아요"라는 말. 진료실에서 이 말은 정말 괜찮다는 뜻일 때도 있지만, "설명하자면 긴데 선생님 바빠 보이세요"의 줄임말일 때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를 몇 번 놓쳤고, 몇 주 뒤에 훨씬 안 좋아진 상태로 다시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미안함은 통계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구조는 제가 오늘 안에 못 바꿉니다. 대신 그 짧은 시간을 조금 더 잘 쓰는 방법은 같이 만들 수 있습니다. 진료실에서 실제로 효과가 좋았던 것들만 적어보겠습니다.
1. 들어오자마자 가장 중요한 것부터 말해주세요. 정중하게 뜸을 들이다 마지막 30초에 핵심을 꺼내는 분이 정말 많습니다. 순서를 뒤집어 주시면 제가 시간을 배분할 수 있습니다.
2. 메모를 가져오세요. 종이 한 장, 휴대폰 메모장 다 좋습니다. 지난 4주 동안 언제 힘들었는지 서너 줄이면 충분합니다. 말로 5분 걸릴 내용이 30초에 전달됩니다. 이건 정말 효율이 좋습니다.
3. "오늘은 좀 길게 이야기하고 싶어요"라고 먼저 말해주세요. 이 한마디면 됩니다. 접수 때 말씀하시면 더 좋고요. 그러면 뒤 예약을 조정하거나, 따로 상담 시간을 잡아드릴 수 있습니다. 말씀 안 하시면 저는 오늘도 평소처럼 흘러갑니다.
4. 안 괜찮으면 안 괜찮다고 해주세요. 저를 배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입니다. 배려받아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5. 상담이 필요하면 그건 따로 잡는 게 맞습니다. 약 조정을 하는 재진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상담은 애초에 다른 일정입니다. 한 칸 안에 두 개를 욱여넣으면 둘 다 어설퍼집니다.
이 글을 쓰면서 계속 걸리는 게 하나 있습니다. 결국 환자에게 "잘 준비해 오세요"라고 부탁하는 모양새가 됐다는 것. 아픈 사람이 진료를 효율적으로 만들 책임까지 져야 하는 건 순서가 좀 이상하죠. 그건 제 몫이고 제도의 몫인데요.
그러니 위의 부탁은 정답이 아니라 임시방편으로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제대로 된 답은 진료 시간이 길어져도 병원이 굴러가는 구조를 만드는 쪽에 있습니다. 그게 언제 올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오늘 진료실에서 3분 만에 나오시게 되더라도, 그게 당신의 이야기가 그만큼의 가치라는 뜻은 아니라는 것 하나만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시계는 짧았지만 저는 대체로, 생각보다 오래 그 얼굴을 기억합니다.
다음에 오실 땐 하고 싶은 말 맨 앞에 두고 오세요. 제가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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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나온 자료
- OECD 보건통계로 본 한국의 외래 진료시간·진료량: 보건복지부 보도자료
- 정신치료 건강보험 수가 개편 및 본인부담 완화(2018): 메디칼타임즈
- 우울증 환자 4년새 25% 증가: 머니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