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그래서 제 병명이 정확히 뭐예요?"
이 질문을 들을 때마다 저는 잠깐 커서를 멈춥니다. 마우스를 괜히 한 번 움직이고요. 왜냐하면 제일 정직한 대답은 이렇거든요. "이름표를 하나 붙이긴 했는데, 그게 당신을 다 설명하진 못해요."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열에 아홉은 표정이 굳습니다. 눈빛에 이렇게 쓰여 있어요. '이 사람… 혹시 잘 모르는 거 아냐?' 그래서 저는 대개 적당히 말을 고르고, 다음 환자분이 문을 두드리고, 3분은 그렇게 지나갑니다.
오늘은 그때 못 한 말을 마저 하려고 합니다. 시간 제한 없이요.
먼저 결론. 당신의 병명은 생각보다 훨씬 헐겁습니다. 그리고 그건 당신 잘못도, 의사 잘못도 아닙니다.
'상세 불명'이라는 네 글자에 서러웠다면
진단서를 받아 든 분들이 제일 많이 상처받는 지점이 여기입니다. "상세 불명의 우울병 에피소드". "상세 불명의 불안장애". 하필 '상세 불명'이라니요. "당신이 뭐가 문제인지 우리도 잘 모르겠습니다"라는 자백처럼 읽히니까요.
그런데 저는 이 이름표가 오히려 가장 정직한 병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조현병이나 양극성장애처럼 윤곽이 비교적 또렷한 진단도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무너지는 방식은 지문에 가깝습니다. 누구는 잠을 못 자고, 누구는 하루 열네 시간을 자고, 누구는 물조차 안 넘어가고, 누구는 새벽에 냉장고를 엽니다. 이걸 억지로 예쁜 상자 하나에 밀어 넣느니, "지금 당신은 분명 우울의 영역에 있고, 세부 유형은 좀 더 지켜보겠습니다"라고 말해두는 편이 낫습니다. '상세 불명'은 무능의 고백이 아니라 겸손의 표기법입니다.
같은 '우울증'인데 증상이 하나도 안 겹칠 수 있습니다
여기서부터가 좀 재밌습니다.
"우울증"이라는 똑같은 진단을 받은 두 사람이 단 하나의 증상도 공유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주요우울삽화의 진단 기준을 조합해보면 경우의 수가 227가지입니다. 세부 증상까지 쪼개면 1만 가지가 넘고요. 이론상의 숫자놀음이 아닙니다. 외래 환자 수천 명을 실제로 분석한 연구에서 수백 개의 서로 다른 증상 조합이 관찰됐습니다12. 우울증을 재는 대표적인 평가 척도 7개를 모아 목록을 만들면 거기 담긴 증상만 52가지. 슬픔, 불면, 식욕 변화, 짜증, 성기능 문제까지 전부 같은 통에 들어가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요. A씨는 잠을 못 자고 살이 빠지고 안절부절못하는 우울증이고, B씨는 종일 자고 폭식하고 축 처지는 우울증인데, 둘 다 진단서에는 똑같은 글자가 찍힌다는 겁니다. 이름표는 같고 내용물은 정반대죠.
그러니 "제 병명이 우울증이래요"라는 문장은, 당신에 대해 알려주는 정보가 생각보다 적습니다. 옷 사이즈로 치면 라벨에 그냥 '사람용'이라고 적혀 있는 셈이랄까요.
의사 두 명이 같은 사람을 다르게 진단합니다
"그래도 전문가가 보면 정확하겠죠." 그렇게 믿고 싶으실 겁니다. 저도 그러고 싶고요. 여기서 제 직업적 자존심에 별로 안 좋은 통계를 하나 꺼내야겠습니다.
정신과의 '진단 성경'이라 불리는 DSM-5를 만들 때, 여러 임상의가 같은 환자를 각자 진단해 보는 대규모 현장 시험을 했습니다. 주요우울장애의 진단 일치도(카파값)는 0.28이 나왔습니다3.
통계에서 0.28은, 음, "일치한다고 우기기 민망한" 구간입니다. 풀어 말하면 어느 진료실 문을 여느냐에 따라 우울증이 됐다 안 됐다 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DSM-III 시절엔 0.8에 가까웠던 숫자가 왜 이 지경이 됐는지는 지금도 학계에서 싸우는 중입니다.
기분 나쁜 통계지만, 저는 이 숫자를 알고 나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진단명이 이마에 새겨진 낙인이 아니라, 지금 당신을 돕기 위해 잠정적으로 붙여둔 작업용 라벨이라는 게 분명해지니까요. 신의 판결문이 아니라 포스트잇에 가깝습니다.
교과서를 만든 쪽에서도 "이거 좀 이상한데" 합니다
그럼 그 교과서는 대체 왜 그렇게 만들었느냐. 당연한 반문입니다.
놀랍게도 이 의문을 제일 크게 제기한 사람이 세계에서 정신의학 연구비를 가장 많이 주무르던 사람이었습니다.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NIMH) 소장이던 토머스 인셀은 2013년, 그것도 DSM-5 출간 직전에 공개적으로 말했습니다. "DSM의 진단은 신뢰도(reliability)는 있어도 타당도(validity)가 없다."4 신간 나오기 직전에 저 말을 한 겁니다. 출판사 입장에선 꽤 곤란했겠죠.
무슨 뜻일까요. 지금의 정신과 진단은 피를 뽑거나 뇌 사진을 찍어 확인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증상의 묶음으로 정의됩니다. 당뇨는 혈당으로, 암은 조직검사로 확진하죠. 그런데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딱 짚어내는 생물학적 지표는 아직 단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도요. 그래서 인셀은 "증상만으로 칸을 나눈 이 지도가 실제 뇌의 지형과 맞는지 모르겠다"며 진단 체계를 처음부터 다시 짜는 연구 프로젝트(RDoC)를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받은 병명이 어딘가 흐릿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당신이 예민해서가 아닙니다. 애초에 그 지도가 아직 공사 중이라서 그렇습니다. 지도를 그린 사람들도 아는 사실이고요.
어쩌면 칸막이 자체가 잘못 쳐진 걸지도
한 발만 더 나가보겠습니다.
우울증, 불안장애, 강박증, ADHD. 우리는 이걸 서로 다른 '병'으로 배웁니다. 그런데 진료실에서 보면 이 진단들은 혼자 오는 법이 거의 없습니다. 우울하신 분은 대개 불안하고, 불안한 분은 잠을 못 자고, 못 자다 보면 생각이 강박적으로 돌기 시작합니다. 이걸 의학에서는 '공존질환(comorbidity)'이라 부르는데요. 솔직히 말하면 공존이 예외가 아니라 기본값입니다.
그래서 대규모 추적 연구를 이끈 카스피와 모피트 연구팀은 도발적인 제안을 내놨습니다. 수많은 정신과 진단의 밑바닥에는 사실 하나의 공통된 축(이른바 'p 팩터')이 흐르고 있고, 우리가 그어놓은 칸막이는 생각만큼 튼튼하지 않다는 겁니다5. 지능에 'g(일반지능)'라는 공통 요인이 있듯, 마음의 고통에도 공통된 뿌리가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죠.
이게 맞다면 "나는 우울증인가 불안장애인가"를 두고 새벽 두 시까지 검색하는 일은, 바다에 나가서 '여기부터 태평양, 여기부터 인도양' 하고 손가락으로 선을 긋는 일과 비슷합니다. 물은 그냥 다 이어져 있는데요.
그리고 가끔, 병명은 '행정 코드'입니다
이건 정말 진료실에서 대놓고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하겠습니다.
진단명이 당신의 상태와 상관없이, 순전히 시스템 사정으로 붙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불안하고 잠이 안 오는 분께 리보트릴(클로나제팜)이 잘 맞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건강보험 급여 규정상 이 약을 쓰려면 진단명에 '공황장애' 같은 특정 병명이 있어야 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분께 공황발작은 한 번도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쎄로켈(쿼티아핀)을 순전히 불면 목적으로 아주 소량 쓰고 싶어도, 급여를 받으려면 서류상 '양극성장애' 같은 진단이 필요할 때가 있고요.
그러니 어느 날 진단서를 떼어 보고 "어? 나 공황장애였어? 나 조울증이야?" 하며 심장이 내려앉았다면 — 일단 숨부터 크게 쉬세요. 그건 당신의 정체가 아니라 약을 제대로 드리기 위해 시스템이 요구한 통행증일 수 있습니다.
물론 담당 선생님께 "이 진단명이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라고 물어보실 권리는 100% 당신 것입니다. 그거 물어본다고 무례한 환자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일 좋은 질문이에요.
그럼 진단명은 아무 쓸모 없느냐
아니요. 여기서 오해하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진단명은 훌륭한 소통의 도구이자 치료의 나침반입니다. 의사끼리 "이분은 우울 삽화입니다" 한마디면 큰 그림이 전달되고, 그 라벨을 기준으로 어떤 약부터 써볼지, 무엇을 조심해야 할지 방향이 잡힙니다. 지도가 실제 땅과 완벽히 일치하지 않는다고 지도를 찢어버리진 않잖아요. 목적지까지 가는 데는 충분히 쓸모가 있으니까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진단명이 가짜다"가 아니라 "진단명은 당신이라는 사람의 요약본이 아니라, 지금 당신을 돕기 위한 작업 도구다"라는 겁니다. 도구가 사람을 짓누르면 안 되죠.
핵심 — 진단명은 당신이라는 사람의 요약본이 아니라, 지금 당신을 돕기 위해 잠정적으로 붙인 작업 도구입니다. 그 이름표에 당신을 가두지 마세요.
정작 중요한 건 이름표가 아니라 당신입니다
병명 때문에 잠을 설쳤다는 분들께 제가 늘 드리는 말이 있습니다.
- 당신의 고통은 병명이 애매해도 진짜입니다. '상세 불명'이라고 덜 아픈 게 아니에요.
- 진단명은 바뀔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 그림이 선명해지면 이름표도 자연스럽게 다듬어집니다. 그건 오진이 아니라, 당신을 더 잘 알게 됐다는 증거예요.
- 당신이 할 일은 진단명 검색이 아니라, 당신의 경험을 말로 옮기는 일입니다. "요즘 새벽 3시에 깨요", "사람 많은 데 가면 숨이 막혀요" — 이런 문장 하나가 어떤 병명보다 치료에 유용합니다.
정신과 치료는 정확한 라벨을 맞히는 퀴즈쇼가 아닙니다. 당신과 주치의가 함께 상태를 계속 조율해 가는 긴 대화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진단명은 그 대화의 첫 문장 정도로만 여겨주세요.
다음에 또 누가 진단서를 들고 와서 "선생님, 여기 이 글자 무슨 뜻이에요?" 하고 물으면, 저는 아마 또 3분 안에 다 설명하지 못할 겁니다. 대신 이렇게는 말해두고 싶어요.
당신은 '상세 불명의 우울병'이 아닙니다. 당신은 지금 좀 많이 힘든, 그리고 분명히 나아질 수 있는, 한 사람입니다.
이 글은 정신과 의사가 진료실 밖에서 편하게 쓰는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특정인의 진단이나 처방에 대한 판단이 아니며, 본인의 진단명·약에 대한 궁금증은 반드시 담당 주치의와 이야기 나눠 보세요. 그게 이 글의 진짜 결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