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에서 제일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

"선생님, 그래서 제 병명이 정확히 뭐예요?"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는 솔직히 조금 난처합니다. 왜냐하면 가장 정직한 대답은 이렇거든요. "음… 이름표를 하나 붙이긴 했는데요, 사실 그 이름표가 당신을 다 설명하진 못해요."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 표정이 굳습니다. '이 사람 돌팔이인가?' 하는 눈빛이죠. 그래서 오늘은 진료실 3분 안에선 차마 다 못 하는 이 이야기를, 마음 편히 길게 해보려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릴게요. 당신의 병명은, 생각보다 훨씬 헐겁습니다. 그리고 그건 당신 잘못도, 의사 잘못도 아닙니다.

'상세 불명'이라는 병명을 받고 서러웠다면

진단서를 받아 든 많은 분들이 거기 적힌 낯선 글자에 상처를 받습니다. "상세 불명의 우울병 에피소드", "상세 불명의 불안장애"… '상세 불명'이라니. 마치 "당신이 뭐가 문제인지 우리도 잘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아 서럽죠.

그런데 이 이름표, 저는 오히려 가장 정직한 병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조현병이나 양극성장애처럼 비교적 윤곽이 뚜렷한 진단도 있지만, 사람의 마음이 무너지는 방식은 지문처럼 제각각입니다. 누군가는 잠을 못 자고, 누군가는 하루 종일 자고, 누군가는 먹지 못하고, 누군가는 폭식을 합니다. 이걸 억지로 하나의 깔끔한 상자에 밀어 넣느니, "지금 당신은 분명히 우울의 영역에 있고, 세부 유형은 더 지켜보겠다"는 뜻의 '상세 불명'이 차라리 겸손하고 솔직한 표현입니다.

같은 '우울증'인데, 증상이 하나도 안 겹칠 수 있습니다

여기서부터가 진짜 흥미롭습니다. "우울증"이라는 같은 진단을 받은 두 사람이, 단 하나의 증상도 공유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우울증(주요우울삽화) 진단 기준을 조합하는 경우의 수를 계산해 보면 227가지나 되고, 세부 증상까지 쪼개면 무려 1만 가지가 넘습니다. 실제로 외래 환자 수천 명을 분석한 연구에서 수백 개의 서로 다른 증상 조합이 관찰됐죠 (Lorenzo-Luaces 등, BMC Psychiatry 2021, STAR*D 재분석; Fried & Nesse의 이질성 연구). 우울증을 재는 대표적인 평가 척도 7개를 모아보면 거기 담긴 증상만 52가지입니다 — 슬픔부터 불면, 식욕 변화, 짜증, 성기능 문제까지요.

무슨 뜻일까요? A씨는 '잠 못 자고 살 빠지고 안절부절'인 우울증이고, B씨는 '하루 종일 자고 폭식하고 축 처지는' 우울증인데, 둘 다 정확히 같은 진단명을 받는다는 겁니다. 이름표는 같은데 내용물은 완전히 다른 거죠. 그러니 "제 병명이 우울증이래요"라는 말은, 생각보다 당신에 대해 알려주는 정보가 적습니다. 옷 사이즈로 치면 "그냥 '사람용'"이라고 적혀 있는 셈이랄까요.

심지어, 의사 두 명이 같은 사람을 다르게 진단합니다

"그래도 전문가가 진단하면 정확하겠지"라고 믿고 싶으실 겁니다. 여기서 제가 아주 불편한 통계를 하나 꺼내야겠네요.

정신과의 '진단 성경'이라 불리는 DSM-5를 만들 때, 실제로 여러 임상의가 같은 환자를 각자 진단해 보는 대규모 현장 시험을 했습니다. 그 결과 주요우울장애의 진단 일치도(카파값)는 0.28이었습니다 (Regier 등, Am J Psychiatry 2013). 통계학에서 이 정도 수치는 "일치한다고 말하기 민망한" 수준입니다. 쉽게 말해, 한 사람이 어느 의사에게 가느냐에 따라 우울증이 됐다 안 됐다 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DSM-III 시절 0.8에 가깝던 이 수치가 왜 이렇게 떨어졌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입니다.

이걸 알고 나면 진단명이 무슨 절대적인 낙인처럼 느껴지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집니다. 그건 신의 판결문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당신을 돕기 위해 잠정적으로 붙인 작업용 라벨에 가깝습니다.

교과서를 만든 사람들도 "이거 좀 이상한데" 합니다

여기까지 오면 이런 반문이 나옵니다. "그럼 그 교과서(DSM)는 대체 왜 그렇게 만든 거예요?"

놀랍게도, 이 의문을 가장 크게 제기한 사람이 바로 세계에서 정신의학 연구비를 가장 많이 주무르던 사람이었습니다.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NIMH) 소장이었던 토머스 인셀은 2013년, DSM-5가 나오기 직전에 공개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DSM의 진단은 신뢰도(reliability)는 있어도 타당도(validity)가 없다." (관련 정리, Oxford University Press Blog)

풀어 쓰면 이렇습니다. 지금의 정신과 진단은 혈액검사나 뇌 사진으로 확인되는 게 아니라 오로지 증상의 묶음으로 정의됩니다. 당뇨병은 혈당 수치로, 암은 조직검사로 확진하지만, 우울증·불안장애를 딱 짚어내는 생물학적 지표(바이오마커)는 아직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인셀은 "증상만으로 칸을 나눈 이 지도가 실제 뇌의 지형과 맞는지 모르겠다"며, 아예 진단 체계를 다시 짜자는 연구 프로젝트(RDoC)를 시작했죠.

즉, 당신이 받은 병명이 애매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당신이 이상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그 지도 자체가 아직 공사 중이기 때문입니다. 교과서 저자들도 아는 사실이에요.

어쩌면 칸막이 자체가 잘못 쳐졌을지도 모릅니다

한 발 더 나가볼까요. 우울증, 불안장애, 강박증, ADHD… 우리는 이걸 서로 다른 '병'으로 배웁니다. 그런데 진료실에서 보면 이 진단들은 혼자 오는 법이 거의 없습니다. 우울증인 분은 대개 불안도 있고, 불안이 심한 분은 잠도 못 자고, 그러다 강박적인 생각까지… 이걸 의학에서는 '공존질환(comorbidity)'이라 부르는데, 사실 공존이 예외가 아니라 기본값입니다.

그래서 대규모 추적 연구를 한 카스피와 모피트 연구팀은 도발적인 제안을 합니다. 수많은 정신과 진단의 밑바닥에는 사실 하나의 공통된 축(이른바 'p 팩터')이 흐르고 있어서, 우리가 그어놓은 진단명 사이의 칸막이가 생각만큼 견고하지 않다는 거죠 (Caspi 등, Clinical Psychological Science 2014). 지능에 'g(일반지능)'라는 공통 요인이 있듯, 마음의 고통에도 공통 요인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맞다면, "나는 우울증인가 불안장애인가"를 두고 밤새 고민하는 건 마치 바다에서 '여기는 태평양인가 인도양인가' 경계선을 손으로 그으려는 일과 비슷합니다. 물은 다 이어져 있는데 말이죠.

그리고… 가끔 병명은 '행정 코드'가 됩니다 (이건 좀 웃픕니다)

자, 이제 진료실에서 정말 차마 대놓고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진단명이 당신의 상태와 무관하게, 순전히 시스템 때문에 붙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불안하고 잠이 안 오는 분께 리보트릴(클로나제팜)이라는 약이 잘 맞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건강보험 급여 규정상, 이 약을 처방하려면 진단명에 '공황장애' 같은 특정 병명이 붙어 있어야 하는 경우가 있어요. 환자분은 공황발작이 없는데도 말이죠. 또 쎄로켈(쿼티아핀)을 순전히 불면 목적으로 소량 쓰고 싶어도, 급여를 받으려면 서류상 '양극성장애' 같은 진단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어느 날 본인 진단서를 떼어 보고 "어? 나 공황장애였어? 나 조울증이야?" 하고 심장이 철렁했다면 — 심호흡부터 하세요. 그건 당신의 진짜 정체가 아니라, 약을 제대로 드리기 위해 시스템이 요구한 통행증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담당 선생님께 "이 진단명은 정확히 무슨 의미예요?"라고 물어보실 권리가 당연히 있고요.

그래서, 진단명은 아무 쓸모 없느냐고요?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여기서 오해하시면 안 돼요.

진단명은 훌륭한 소통의 도구이자, 치료의 나침반입니다. 의사끼리 "이분은 우울 삽화입니다" 한마디면 큰 그림이 전달되고, 그 라벨을 기준으로 어떤 약부터 써볼지, 무엇을 조심할지 방향을 잡습니다. 지도가 실제 땅과 완벽히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지도를 버리진 않잖아요. 목적지까지 가는 데는 충분히 쓸모가 있으니까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진단명이 가짜다"가 아니라, "진단명은 당신이라는 사람의 요약본이 아니라, 지금 당신을 돕기 위한 작업 도구다"라는 겁니다. 도구에 당신이 짓눌릴 필요는 없다는 뜻이에요.

진짜 중요한 건, 이름표가 아니라 당신입니다

그래서 병명 때문에 밤잠 설치는 분들께 제가 늘 드리는 말이 있습니다.

  • 당신의 고통은 병명이 애매해도 진짜입니다. '상세 불명'이라고 덜 아픈 게 아니에요.
  • 진단명은 바뀔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그림이 선명해지면 이름표도 자연스럽게 다듬어집니다. 그건 오진이 아니라, 당신을 더 잘 알게 됐다는 증거입니다.
  • 당신이 할 일은 진단명 검색이 아니라, 당신의 경험을 언어로 옮기는 일입니다. "요즘 새벽 3시에 깨요", "사람 많은 데서 숨이 막혀요" — 이런 구체적인 이야기가 어떤 병명보다 치료에 훨씬 유용합니다.

정신과 치료의 핵심은 정확한 라벨을 붙이는 게임이 아니라, 당신과 주치의가 함께 당신의 상태를 계속 조율해 가는 대화입니다. 그러니 진단명은 대화의 출발점 정도로만 여기시고, 그 이름표에 당신을 가두지 마세요.

당신은 '상세 불명의 우울병'이 아닙니다. 당신은 지금 좀 많이 힘든, 그리고 분명히 나아질 수 있는, 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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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정신과 의사가 진료실 밖에서 편하게 쓰는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특정인의 진단이나 처방에 대한 판단이 아니며, 본인의 진단명·약에 대한 궁금증은 반드시 담당 주치의와 이야기 나눠 보세요. 그게 이 글의 진짜 결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