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가 끝나면 저는 차트를 씁니다. 하루 중 가장 조용한 노동입니다. 방금까지 방 안에 있던 이야기를, 이제는 화면 위의 문장으로 옮기는 일. 그리고 고백하자면, 저는 거의 매일 한 번쯤 문장을 쓰다 지웁니다.
백스페이스 키를 꾹 누르고 있는 그 몇 초에 대해, 오늘은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의무기록에는 문법이 있습니다. 짧고, 건조하고, 확인 가능한 것 위주로. "환자는 2주 전부터 지속되는 불면과 식욕 저하를 호소함." 이런 문장들이 기록의 모범입니다. 저는 이 문법을 수련 시절에 배웠고, 지금도 지킵니다. 이 문법은 옳습니다. 기록은 시가 아니라 도구니까요.
그런데 이상하지요. 문법대로 잘 쓴 문장을 읽어 보면, 맞는 말만 남았는데 정작 그 시간은 없습니다.
'불면을 호소함'이라는 다섯 글자 안에는, 새벽마다 천장의 같은 무늬를 세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잠들지 못하는 게 아니라 잠드는 게 무섭다던 목소리의 떨림도, 그 말을 하기까지 십오 분을 돌아 돌아 왔다는 사실도요. 기록의 언어는 체로 치는 언어입니다. 확인할 수 있는 알갱이만 남기고, 나머지는 아래로 흘려보냅니다. 문제는 사람이 대체로 그 '나머지' 쪽에 살고 있다는 겁니다.
이 문법을 처음 배우던 시절이 기억납니다. 수련의 때 제가 쓴 기록에는 빨간 줄이 자주 그였습니다. 형용사를 쓰지 말 것. 추측을 적지 말 것. 관찰한 것과 들은 것을 구분할 것. "몹시 지쳐 보였다"라고 쓰면 "지쳐 보였다는 판단의 근거를 적으라"는 지적이 돌아왔습니다. 처음엔 야박하다고 생각했는데, 배우고 보니 그 빨간 줄이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기록은 내가 다시 읽는 문서이기 전에 남이 읽는 문서고, 남이 읽었을 때 오해 없이 전달되려면 감상은 빼고 사실만 남겨야 합니다. 저는 그 훈련을 잘 받은 편이고, 지금은 후배들의 기록에 같은 빨간 줄을 긋는 쪽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글은 그 문법에 대한 불평이 아닙니다. 문법을 지키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일종의 각주입니다.
'주관적 호소'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환자가 스스로 말한 증상을 적는 항목이지요. 실무적으로는 더없이 유용한 말인데, 가끔 이 말이 저를 머뭇거리게 합니다. 주관적, 이라는 수식어가 어쩐지 '아직 검증되지 않은'처럼 들려서요. 그 사람에게는 그게 세계의 전부인 고통이, 기록 안에서는 괄호를 친 잠정적 진술이 됩니다. 물론 의학이 그렇게 겸손하게 적는 데는 이유가 있고, 저는 그 이유에 동의합니다. 동의하면서도, 타이핑하는 손끝이 아주 잠깐 무거워지는 것까지는 어쩌지 못합니다.
진단명을 적을 때는 조금 더 무거워집니다.
진단명은 유용합니다. 치료의 방향을 잡아 주고, 의사들끼리 같은 말을 쓰게 해 주고, 무엇보다 환자에게 "당신이 겪는 것에는 이름이 있고, 같은 것을 겪는 사람들이 있고, 알려진 치료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 줍니다. 이름을 받고 우는 분들이 계십니다. 슬퍼서가 아니라, 몇 년 동안 정체 모를 것과 싸우다가 드디어 상대의 얼굴을 봐서요. 진단명이라는 라벨에 대해서는 전에도 길게 쓴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이름이, 적히는 순간 다른 일도 합니다. 우울장애, 라고 적으면 그 사람의 이번 계절이 요약됩니다. 요약은 필요한데, 요약된 것은 어쩔 수 없이 납작해집니다. 그 사람이 그 와중에 매일 아침 화분에 물을 줬다는 것, 동생 생일을 챙겼다는 것, 무너지는 중에도 무너지지 않은 부분이 이만큼 있다는 것. 진단 코드에는 그걸 적는 칸이 없습니다. 저는 가끔 그 칸이 없다는 사실을, 칸이 없다는 이유로 잊을까 봐 겁이 납니다.
기록의 언어 중에 제가 남몰래 오래 들여다보는 말이 하나 더 있습니다. '경과 양호'라는 네 글자입니다. 사무적으로 보자면 상태가 좋아지고 있다는 확인 도장 같은 말이지요. 그런데 그 네 글자가 성립하기까지의 일들을 저는 압니다. 몇 달 동안 같은 시간에 약을 챙긴 아침들, 그만 다니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잡은 예약들, 무너진 날에도 다음 진료까지는 버텨 보기로 한 결심들. 등산으로 치면 능선 몇 개를 넘어온 셈인데, 기록에는 정상 도착 여부만 적히는 겁니다. '경과 양호'라고 타이핑할 때 저는 가끔 속으로만 덧붙입니다. 양호까지 오시느라 애쓰셨습니다, 하고요. 물론 이 말은 화면이 아니라 진료실에서, 소리 내어 하려고 아껴 둡니다.
요즘은 환자가 자신의 기록을 열람하고 사본을 받는 일이 예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저는 이 방향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 기록의 주인은 결국 그분이니까요. 다만 그래서 더, 쓸 때 한 번 더 생각하게 됩니다. 이 문장을 본인이 읽는다면 어떻게 읽힐까. 의학의 언어는 종종 당사자에게 차갑게 읽힙니다. 병식이 부족함, 치료 순응도 낮음. 의사들끼리는 중립적인 업무 용어인데, 당사자가 읽으면 성적표의 낙제점처럼 보일 수 있는 말들입니다. 그렇다고 에둘러 쓰면 기록의 정확성이 무너지니, 저는 정확하게 쓰되 최소한 한 가지를 지키려 합니다. 화면에 적는 말과 진료실에서 하는 말이 다른 사람이 되지는 말자는 것. 기록이 차가운 만큼, 말은 그러지 않아야 수지가 맞습니다.
그래서 쓰다 지우는 문장들이 생깁니다.
증상 사이에 슬쩍 적고 싶어지는 문장들입니다. 이만큼 버틴 게 대단하다는 문장. 오늘 표정이 지난달보다 밝았다는 문장. 이 사람은 자기 병을 설명할 때 꼭 남 걱정부터 한다는 문장. 쓰고, 잠시 보고, 지웁니다. 기록은 공적인 문서이고, 감상은 문서의 자리가 아니니까요. 지우는 게 맞습니다. 맞는데, 지울 때마다 체 아래로 빠져나가는 것들의 목록이 조금씩 길어집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제가 기록이라는 제도를 원망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반대편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사실 저는 기록을 꽤 사랑하는 편입니다.
기록은 연속성입니다. 다음 진료의 저는 오늘의 저를 잊고, 그때의 기록이 저 대신 기억합니다. 삼 년 전 어떤 약이 안 맞았는지, 어느 계절마다 힘들어지는지. 제가 아니라 다른 의사가 이어받아도 치료가 끊기지 않는 것은 순전히 기록 덕분입니다. 그리고 기록은 보호입니다. 그 사람의 고통이 "언제부터,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공적으로 증언해 주는 문서는, 필요한 순간에 그 사람 편에 서는 몇 안 되는 종이이기도 합니다. 건조함은 이 보호의 조건입니다. 감정이 섞인 기록은 증언의 힘을 잃으니까요.
그러니까 이건 제도가 틀린 이야기가 아니라, 맞는 제도에도 그림자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좋은 도구일수록 무엇을 자르는지 알고 써야 한다는, 그 정도의 이야기입니다.
솔직한 고백을 하나 더 얹자면, 기록의 길이는 제 상태를 정확히 반영합니다. 여유 있는 날의 기록은 문장이 넉넉하고, 지친 날의 기록은 앙상합니다. 밀린 차트를 몰아 쓰는 저녁이면 저도 모르게 문장이 공장에서 나온 것처럼 비슷해집니다. 그런 날 화면을 보다가 문득 뜨끔합니다. 이 짧은 세 줄이 그분의 삼십 분이었는데, 하고요. 그래서 저는 가끔 일부러 한 문장을 더 답니다. 대단한 문장도 아닙니다. 지난번보다 잠이 나아졌다고 함, 뒤에 '표정도'까지 써 볼까 하다가 지우고, 대신 다음 진료 때 표정을 꼭 다시 볼 것, 하고 저에게 메모를 남기는 식입니다. 기록 문법의 테두리 안에서 부리는, 저만 아는 작은 사치입니다.
수련 시절의 저는 이 그림자를 잘 몰랐습니다. 오히려 반대였어요. 깔끔하게 요약된 차트가 자랑스러웠습니다. 긴 호소를 세 줄로 정리하는 걸 실력이라 여겼고, 실제로 그건 실력이 맞습니다. 다만 요령이 늘수록 요약이 빨라지고, 요약이 빨라지면 어느 순간부터는 듣기도 전에 요약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사람이 말하는 중인데 머릿속에서 이미 차트 문장이 완성되어 있는 것. 그게 편해질 때쯤이 제일 위험한 때라는 걸, 저는 시간이 꽤 지나서야 배웠습니다.
언젠가 동료들과 이런 농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운 문장만 모아도 책 한 권은 나오겠다고요. 웃자고 한 말인데 웃고 나서 다들 잠깐 조용해졌습니다. 아마 각자의 책을 떠올렸을 겁니다. 어느 직업에나 이런 책이 있겠지요. 교사에게는 생활기록부에 못 적은 문장들이, 기자에게는 기사에서 잘려 나간 문단들이 있을 겁니다. 공적인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은 두 개의 원고를 갖게 되는 모양입니다. 제출한 원고와, 제출하지 못한 원고.
요즘의 저는 두 개의 기록을 씁니다. 하나는 화면에, 규칙대로. 다른 하나는 어디에도 적히지 않는데, 굳이 말하자면 제 안에 남습니다. 지운 문장들이 가는 곳이 거기거든요.
신기하게도 지운 문장은 잘 사라지지 않습니다. 적힌 문장은 잊어도 됩니다, 차트가 기억하니까. 지운 문장은 차트가 모르니까 제가 기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기억의 이상한 경제학입니다. 저장한 것은 잊고, 저장하지 못한 것은 남습니다. 어쩌면 지운다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표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문장은 문서보다 오래 가야 하니 종이 말고 사람에게 적어 두자는. 그래서 다음 진료 때 문이 열리면, 화면의 기록을 읽어 내려가면서 동시에 적히지 않은 쪽도 같이 펼칩니다. 화분에 물은 여전히 주고 계시는지, 남 걱정부터 하는 버릇으로 자기 이야기를 또 뒤로 미루고 계신 건 아닌지. 어쩌면 진료실에서 오가는 것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두 기록 사이의 그 좁은 틈에서 오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이 글은 정보 제공용입니다. 진단과 치료는 반드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 상의하세요.
덧붙여 두자면, 이 글의 장면들은 특정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 해의 진료실에서 받은 인상들을, 아무도 자기 이야기라고 알아볼 수 없도록 뭉뚱그린 것입니다. 그렇게 뭉뚱그리는 일 역시, 생각해 보면 제가 이 글에서 말한 요약과 같은 종류의 일이라, 쓰는 내내 조심스러웠습니다.
이 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쓰면서 여러 문장을 지웠고, 지운 것 중 몇 개는 이 글보다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적히지 않는 쪽이 맞는 문장들이었습니다. 모든 글은 결국 남긴 문장과 지운 문장의 협업이고, 저는 이제 그 협업을 받아들이는 편입니다.
기록은 사람을 다 담지 못합니다. 그건 기록의 결함이 아니라 사람의 크기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저는 차트에는 정확한 문장을 남기고, 정확해서 담지 못한 문장은 지워서 간직하겠습니다. 적어서 지키는 것이 있고, 지워서 지키는 것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