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가 진료실에서 좀처럼 하지 못하는 말이 있습니다. "자, 이제 안 오셔도 됩니다."
우울증도, 조현병도, 양극성장애도 대개는 "줄여봅시다", "유지해봅시다", "재발 신호만 기억해두세요"로 끝납니다. 저희 사이트에도 회복은 완치와 다르다는 이야기를 따로 써 둔 적이 있고, 그건 지금도 대부분의 병에 대해 정직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딱 한 부류, 종결이 진짜 종결인 병이 있습니다. 특정공포증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써보려고 합니다. 개념 설명을 죽 늘어놓는 대신,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 이 글에 나오는 'K씨'는 실제 환자가 아닙니다. 비행공포로 오시는 분들에게서 반복적으로 마주쳤던 장면·대사·경과를 여러 사람 몫으로 뒤섞어 만든 가공의 인물입니다. 나이·직업·지역 등 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정보는 일부러 흐리거나 바꿨습니다. 치료 경과 역시 '이렇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예시일 뿐, 모든 사람이 이 궤적을 그리지는 않습니다. 그 이야기도 뒤에 따로 적어두었습니다.
첫 진료 — "회사에서 가라는데, 제가 비행기를 못 탑니다"
K씨는 예약 없이 왔습니다. 접수대에서 무슨 문제로 오셨느냐는 질문에 한참 말을 못 하다가, 진료실에 앉아서 첫 문장을 이렇게 뗐습니다.
"제가… 좀 웃긴 걸로 왔는데요."
정신과에서 "웃긴 걸로 왔다"는 말은 대개 웃기지 않습니다. 회사가 해외 사무소를 열면서 K씨에게 3년짜리 발령을 냈고, 수락 여부를 두 달 안에 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커리어 상 놓치기 아까운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K씨는 12년째 비행기를 타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탄 건 이십 대 중반, 난기류가 심했던 짧은 국내선이었다고 합니다. 그 뒤로 신혼여행은 국내로, 회사 워크숍은 기차로, 부모님 환갑 가족여행은 "일정이 안 돼서"로 넘겼습니다. 12년 동안 큰 불편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랬을 겁니다. 회피는 아주 잘 듣거든요. 그래서 지금까지 병원에 올 이유가 없었던 것이고요.
첫 시간에 제가 실제로 확인하는 것들
이 자리에서 제가 하는 일은 사실 진단명 붙이기가 아닙니다. 다른 병을 지우는 일이 절반 이상입니다. 순서대로 물어봅니다.
- 비행기 말고 다른 상황에서도 발작이 오나요? 지하철, 엘리베이터, 터널, 사람 많은 곳, 아무 이유 없이 새벽에. K씨는 전부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공황장애가 상당 부분 밀려납니다. 공황장애는 예기치 못한 발작이 반복되는 병이고, 특정공포증의 공포는 대상이 있을 때만 정확히 켜집니다.
- 무엇이 무서운가요? 이 질문의 답이 진단을 가릅니다. "비행기가 떨어질까 봐"면 특정공포증 쪽, "기내에서 발작이 와서 못 내릴까 봐"면 공황·광장공포 쪽, "옆 사람이 나를 이상하게 볼까 봐"면 사회불안장애 쪽입니다. K씨의 답은 "추락"이었습니다.
- 그 사고 이후 악몽, 재경험, 과각성이 있었나요? 없다면 PTSD 쪽은 아닙니다. 난기류 경험이 계기가 되긴 했지만, 계기가 있다고 다 외상후스트레스는 아닙니다.
- 술은요? 이건 반드시 묻습니다. 비행공포가 있는 분들 중 상당수가 '탑승 전 두어 잔' 전략을 쓰고 있고, 그게 이미 다른 문제로 번진 경우가 있습니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 안 하게 된 일의 목록. 이게 진단기준의 '기능 손상'을 실제로 재는 방법입니다. K씨의 목록은 길었습니다. 해외여행, 국제 학회, 처가 쪽 결혼식, 그리고 이제는 발령까지.
여기까지 오면 진단은 거의 정해집니다. 비행에 대한 특정공포증(상황형).
특정공포증이라는 병 — 흔한데, 거의 안 오는
잠깐 K씨를 두고 병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DSM-5-TR의 기준은 단순합니다. 특정 대상·상황에 대한 뚜렷한 공포가 6개월 이상 지속되고, 그 대상을 마주치면 거의 매번 즉각 공포가 일고, 적극적으로 피하거나 극심한 불안 속에 견디며, 그 공포가 실제 위험에 비해 과도하고, 그로 인해 뚜렷한 고통이나 기능 손상이 있을 것1.
유형은 다섯 갈래로 나눕니다.
| 유형 | 예 | 임상에서의 특징 |
|---|---|---|
| 동물형 | 개, 거미, 뱀, 벌레, 비둘기 | 가장 흔하고 가장 일찍 시작 |
| 자연환경형 | 높은 곳, 물, 천둥·번개, 어둠 | 고소공포가 대표. VR 연구가 가장 많은 영역 |
| 혈액·주사·상해형 | 채혈, 주사, 피, 상처, 치과 | 유일하게 실신 쪽으로 가는 유형. 치료법이 다릅니다 |
| 상황형 | 비행기, 엘리베이터, 터널, 밀폐 공간 | 시작 연령이 늦은 편, 공황장애와 헷갈리기 쉬움 |
| 기타 | 질식, 구토, 소리 등 | 어린이에서 특히 다양 |
22개국을 아우른 세계정신건강조사(World Mental Health Surveys)에서 특정공포증의 평생유병률은 7.4%(여성 9.8%, 남성 4.9%), 일년유병률 5.5%였습니다. 하위 유형별 평생유병률은 동물 3.8%, 혈액·주사·상해 3.0%, 높은 곳 2.8%, 물·날씨 2.3%, 밀폐 공간 2.2%, 그리고 비행 1.3% 로 비행이 가장 낮았습니다2.
이 논문에서 제가 매번 밑줄을 긋는 숫자는 따로 있습니다.
- 발병 연령 중앙값 8세. 정신과 질환 중 가장 이른 축입니다.
- 평생 진단자 중 74.2%가 지난 1년에도 여전히 증상이 있었습니다. 저절로 낫는 병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 일년 유병자 중 치료를 받은 사람은 23.1%. 저소득 국가에서는 9.6%까지 떨어집니다.
여덟 살에 시작해서, 저절로 안 낫고, 네 명 중 세 명은 평생 치료를 안 받습니다. Lancet Psychiatry의 종설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특정공포증이 있는 사람 중 실제로 치료를 받는 비율은 10~25% 정도이고, 그 이유는 아마 회피가 고통을 실제로 줄여주기 때문일 거라고요3.
핵심 — 특정공포증이 병원에 안 오는 이유는 안 괴로워서가 아닙니다. 피할 수 있어서입니다. 그리고 그 회피가 더는 통하지 않게 되는 순간, 그러니까 발령이 나거나 아이가 태어나거나 부모님이 아프거나 할 때 비로소 문을 두드립니다. K씨의 두 달짜리 데드라인이 정확히 그것이었습니다.
국내 사정은 더합니다. 2021년 정신건강실태조사에서 특정공포증 유병률은 2011년 4.9%, 2016년 4.5%를 거쳐 2021년 2.3% 로 계속 줄어드는 것으로 보고됐는데, 저는 이 감소를 곧이곧대로 "한국인이 공포증이 줄었다"로 읽지 않습니다. 같은 조사에서 정신장애 진단을 받은 사람 중 평생 한 번이라도 전문가의 도움을 받은 비율이 12.1% 였고, 불안장애의 1년 서비스 이용률은 9.1%였습니다. 미국(43.1%)·캐나다(46.5%)·호주(34.9%)와 나란히 놓고 보면 그림이 분명해집니다4. 병이 없는 게 아니라, 병으로 세지 않는 겁니다. 특히 특정공포증처럼 "그냥 안 타면 되는데"로 정리되는 병은요.
두 번째 시간 — 치료 계획을 설명하는 회기
K씨는 두 번째 방문 때 종이 한 장을 들고 왔습니다. 다른 병원에서 받아온 처방전이었습니다. 탑승 전에 먹으라고 준 항불안제.
"이거 먹고 그냥 타면 안 되나요? 3년 동안 몇 번만 타면 되는데."
솔직히, 이 질문은 합리적입니다. 저도 단 한 번 어쩔 수 없이 타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렇게 하시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K씨의 상황이 '한 번'이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벤조디아제핀을 먹고 타는 것이 다음 비행을 더 어렵게 만든다는 연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할 때 저는 늘 같은 논문을 꺼냅니다. 비행공포가 있는 여성 28명을 일주일 간격으로 두 번 비행시키면서, 절반에게는 첫 비행 90분 전에 알프라졸람 1mg을, 절반에게는 위약을 이중맹검으로 준 실험입니다.
- 첫 비행에서 약을 먹은 쪽은 주관적 불안이 낮았습니다(5.0 대 7.4). 여기까지는 예상대로입니다.
- 그런데 몸은 반대였습니다. 약을 먹은 쪽의 심박수가 오히려 높았고(114 대 105회/분), 호흡수도 빨랐습니다(22.7 대 18.3회/분).
- 일주일 뒤 두 번째 비행, 이번엔 둘 다 약 없이. 약을 먹었던 쪽이 오히려 더 불안했고(8.5 대 5.6), 공황발작을 겪은 비율이 첫 비행 7%에서 두 번째 비행 71%로 뛰었습니다.
저자들의 결론은 짧습니다. 알프라졸람은 급성 스트레스 상황에서 생리적 각성을 오히려 올리고, 비행공포에서 노출의 치료 효과를 방해한다5.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는 노출치료 글에서 다룬 억제학습의 언어로 설명하면 간단합니다. 노출이 하는 일은 "예상했던 나쁜 일이 안 일어났다"를 뇌에 기록하는 것인데, 약을 먹고 무사히 도착하면 뇌가 공을 비행기가 아니라 약에 돌립니다. "약이 있어서 괜찮았던 거야." 그러면 다음번엔 약 없이는 더 못 탑니다. 임상에서 말하는 안전행동이 약의 형태를 쓴 경우죠. 알프라졸람 글에도 적어두었지만, 이 약은 불을 끄는 데는 탁월하고 집을 다시 짓는 데는 쓰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K씨에게 제안한 계획은 이랬습니다.
- 약은 이번 치료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특정공포증은 정신과 질환 중 드물게, 1차 치료가 약이 아니라 심리치료인 병입니다. 공식적으로 이 병에 승인된 약도 사실상 없습니다.
- 주 1회, 8~10회기 정도의 노출 중심 인지행동치료. 상황에 따라 더 짧아질 수도 있습니다.
- 목표는 '안 무서워지는 것'이 아니라 '무서워도 타는 것'. 이 문장을 첫날 못 박아 두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아직 안 무서워지지 않았는데요"에서 치료가 멈춥니다.
왜 노출인가 — 숫자로
말로만 하면 잘 안 믿으시니 근거를 같이 봅니다.
33개 무작위 연구를 모은 고전적 메타분석에서, 노출치료는 대기 대조군에 비해 큰 효과크기, 위약 대조군에 비해 중간 효과크기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실제 대상과 직접 접촉하는 실제노출(in vivo)이 상상 노출·VR 등 다른 방식보다 치료 직후 성적이 좋았습니다(다만 추적 시점에는 차이가 사라졌습니다). 흥미롭게도 효과크기는 공포증 유형에 따라 달라지지 않았습니다6.
그리고 이 병의 가장 놀라운 대목, 단일 회기 치료입니다.
잠깐 옆길 — 한 번에 끝내는 치료가 진짜 있습니다
1989년, 스웨덴의 라르스-예란 외스트(Lars-Göran Öst)는 특정공포증 환자 20명을 평균 2.1시간, 단 한 번의 회기로 치료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실제노출과 치료자의 시범(모델링)을 결합한 방식이었고, 4년 뒤 추적에서 90%가 크게 호전되었거나 완전히 회복한 상태였습니다7.
이 방식은 뒤에 단일회기 치료(One-Session Treatment, OST) 라는 이름으로 정리됩니다. 최대 3시간짜리 한 회기 안에 노출, 치료자 모델링, 인지적 도전, 강화를 몰아넣고, 환자가 자기 위계표의 계단을 치료자가 이끄는 '행동 실험' 형태로 하나씩 밟게 하는 구조입니다8.
정말 그런가. 최근 자료가 꽤 단단합니다.
- 메타분석(단일회기 55편, 다회기 30편, 총 1,758명): 두 형식 모두 치료 전후 큰 효과를 보였고, 효과크기에 차이가 있다는 근거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총 치료 시간은 단일회기 쪽이 45% 적었습니다9.
- 영국 13개 기관 다기관 비열등성 무작위시험(ASPECT): 7~16세 아동·청소년 268명을 단일회기 치료와 통상적인 다회기 CBT에 무작위 배정했습니다. 6개월 뒤 행동회피검사에서 두 군의 차이는 비열등성 한계(0.4) 안에 들어왔고, 단일회기 쪽이 1인당 평균 303파운드 저렴했습니다10.
다만 균형을 위해 덧붙이자면, 앞서 본 2008년 메타분석에서는 다회기가 공포증 특이 설문 지표에서 단일회기보다 근소하게 앞섰고, 회기 수가 많을수록 결과가 좋다는 조절효과도 관찰됐습니다. 그러니 "무조건 한 번이면 된다"가 아니라, "이 병은 한 번으로도 될 만큼 반응이 좋다" 정도로 읽는 게 정확합니다.
저는 K씨에게 단일회기를 권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거미나 비둘기와 달리 비행기는 진료실 옆방에 없거든요. 계단을 밟으려면 공항까지 가야 하고, 그건 한 번에 몰아넣기 어렵습니다. 실무에서 단일회기 치료가 잘 굴러가는 건 대상을 가져올 수 있는 공포증들, 그러니까 동물·주사·좁은 공간 쪽입니다.
세 번째 시간 — 위계표를 만든 날
이 회기는 대체로 지루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지루한 회기가 치료 전체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방법은 노출치료 글에서 설명한 그대로입니다. 0에서 100까지 불안 점수를 붙이고, 20~30점대부터 시작해 계단을 잘게 쪼갭니다. 그리고 각 줄 옆에 반드시 한 칸을 더 만듭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 예상하는가." 이 칸이 없으면 나중에 어긋났다는 걸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K씨와 함께 만든 표는 대략 이런 모양이었습니다.
| 점수 | 계단 | 예상: 무슨 일이 일어날까 |
|---|---|---|
| 25 | 항공사 좌석배치도와 기내 사진 10분 보기 | 별일 없을 듯, 좀 답답할 것 |
| 35 | 이륙 영상을 소리 켜고 끝까지 보기 | 심장이 뛰어서 못 볼 것 |
| 45 | 난기류 영상 보기 · 항공 사고 통계 자료 읽기 | 더 무서워질 것 |
| 55 | 공항 출국장까지 가서 30분 앉아 있기 | 발이 안 떨어질 것 |
| 65 | 전망대에서 이착륙 30분 보기 | 울렁거려서 나올 것 |
| 75 | 항공권을 실제로 결제하기 | 결제 버튼을 못 누를 것 |
| 85 | VR 기내·이륙·난기류 시나리오 | 헤드셋을 벗어던질 것 |
| 95 | 국내선 편도 1시간 탑승 | 기내에서 통제를 잃고 소리를 지를 것 |
여기서 K씨가 웃으면서 한 말이 있습니다. "25점짜리는 좀 유치한데요." 좋은 신호입니다. 환자분이 '이건 좀 시시한데요' 하고 웃는 지점이 대개 정확한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이 회기에는 한 가지가 더 들어갑니다. 안전행동의 목록을 만들고, 각각을 언제 버릴지 미리 정하는 것. K씨의 목록은 이랬습니다. 탑승 전 술 두 잔, 주머니 속 항불안제, 창가 절대 안 앉기, 이륙 내내 좌석 손잡이 꽉 쥐기, 승무원 표정 계속 관찰하기.
마지막 항목이 특히 중요합니다. 많은 분들이 "승무원이 태연하면 안전한 거다"라는 규칙으로 버팁니다. 그럴듯하지만 이건 확인 행동입니다. 승무원 표정이 안전을 보증한다고 믿는 한, 승무원이 잠깐 굳은 얼굴을 하는 그 순간에 다시 무너집니다.
네 번째부터 일곱 번째 —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여기서부터는 장면으로 적겠습니다.
4회기. 진료실에서 노트북으로 이륙 영상을 켰습니다. K씨가 시작 전 불안을 40이라고 했습니다. 재생 12초 만에 65. 엔진 소리가 커지는 구간에서 손이 무릎으로 갔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 3분쯤 지나 55, 7분쯤에 45. 영상이 끝날 무렵 K씨가 한 말이 정확히 이랬습니다. "어… 좀 지루한데요."
이 지루함이 회기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날 마지막에 물은 건 불안 점수가 아니었습니다. "아까 시작하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고 하셨죠?" "심장이 뛰어서 못 볼 거라고요." "실제로는요?" "…봤네요."
5회기. 공항. 이 회기는 진료실 밖에서 합니다. 출국장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 K씨는 계속 전광판을 보지 않으려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지적했습니다. 회피는 안 가는 것만이 아니라 가서 안 보는 것도 포함되니까요. 눈을 전광판에 두고 15분. 불안 70에서 시작해 45에서 그쳤습니다. 안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그날은 성공한 회기입니다. 예상했던 "발이 안 떨어질 것"이 어긋났으니까요.
6회기 — 숙제를 못 해온 주. 그 주 숙제는 전망대에서 이착륙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K씨는 안 했습니다.
예전의 저라면 "왜 못 하셨어요?"라고 물었을 겁니다. 그러면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바빠서요." 그리고 그다음 주에는 아예 안 옵니다. 지금은 이렇게 묻습니다. "몇 번쯤 하려다 마셨어요?"
K씨의 답은 "토요일에 차까지 탔다가 돌아왔어요"였습니다. 이건 0이 아닙니다. 차 안에서 무슨 생각이 지나갔는지, 그때 불안이 몇 점이었는지, 돌아서고 나서 얼마나 편해졌는지를 물어보면 그 자체가 좋은 재료가 됩니다. 그리고 대개 결론은 하나입니다. 제가 계단을 너무 높게 잡았습니다.
그래서 그 주에는 계단을 내렸습니다. 전망대 30분이 아니라, 집 근처에서 지나가는 비행기를 10분 올려다보기. 우스울 만큼 낮게. 성공 확률이 90% 넘어 보이는 숙제만 내주는 게 제 기준입니다. 노출치료에서 가장 아껴야 할 자원은 용기가 아니라 성공 경험의 재고입니다.
7회기 — VR. 실물 노출이 어려운 구간에 VR을 끼워 넣었습니다. 여기에도 근거가 있습니다. VR 노출과 실제노출을 직접 비교한 무작위시험들을 모은 메타분석에서, 특정공포증 4개 시험(153명)의 효과크기는 VR g=0.68, 실제노출 g=0.72였고 둘 사이 차이는 g=-0.15로 유의하지 않았습니다. 저자들의 표현으로는 "VR 노출이 실제노출보다 유의하게 열등하다는 근거를 찾지 못했다"11.
비행공포는 VR 근거가 특히 두터운 영역입니다. 비행공포 83명을 VR 노출·실제 공항에서의 노출·대기군에 무작위 배정한 시험에서, 두 치료군 모두 대기군보다 우월했고 서로는 대등했습니다. 치료 직후 '비행할 의향'이 두 치료군 모두 76%(대기군 20%)였고, 6개월·12개월 추적에서 두 군 모두 70% 넘는 응답자가 계속 비행하고 있었습니다12.
접근성 이야기도 덧붙일 만합니다. 인터넷 기반 비행공포 노출 프로그램(NO-FEAR Airlines)을 검증한 무작위시험에서, 치료자 안내가 있는 형태와 혼자 하는 형태 모두 대기군보다 유의하게 효과적이었고 둘 사이에 유의한 차이가 없었으며, 3개월·12개월 추적에서 효과가 유지됐습니다13. 치료자가 옆에 없어도 되는 공포증이 있다는 뜻입니다. 다만 이건 비행공포처럼 대상이 뚜렷하고 위험이 낮은 경우에 한한 이야기라는 점은 분명히 해두겠습니다.
여덟 번째 — 실제로 탄 날
항공권은 7회기와 8회기 사이에 결제했습니다. 위계표에서 75점짜리 계단이었는데, K씨는 이 계단이 제일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실제 탑승보다 결제가 더 무서웠다는 말, 저는 여러 번 들었습니다. 결제는 되돌릴 수 없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회피의 문이 닫히는 순간입니다.
편도 1시간짜리 국내선. 저는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전날 회기에서 세 가지를 정리했습니다.
- 버릴 안전행동: 술, 항불안제, 승무원 표정 관찰. 셋 다 두고 가기로 했습니다.
- 자리: 창가. 통로가 아니라 창가입니다. 회피의 반대편으로.
- 불안이 올라올 때 할 일: 아무것도 안 하기. 세는 것도, 주문 외우는 것도, 음악으로 덮는 것도 전부 미세한 회피가 됩니다. 그냥 창밖을 보고, 불안이 몇 점인지 속으로 기록만 하기.
돌아와서 K씨가 보고한 곡선은 이랬습니다. 탑승 대기 중 80. 문이 닫힐 때 90. 이륙 활주 중 95. 그리고 순항에 들어간 지 10분쯤에 60. 착륙 무렵 45. 내려서 40.
95를 찍었습니다. 하나도 안 편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성공한 노출입니다. 예상했던 "통제를 잃고 소리를 지를 것"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걸 몸으로 확인했으니까요. 노출은 안 무서운 상태를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무서운 채로도 끝까지 있어보는 경험을 만드는 기술입니다.
아홉 번째 — 종결 회기
이 회기가 이 글을 쓴 이유입니다.
종결 회기에서 제가 하는 일은 축하가 아닙니다. 축하는 5분이면 됩니다. 나머지 시간은 재발 대비에 씁니다. 순서는 이렇습니다.
첫째, 무엇이 효과가 있었는지를 환자 본인의 말로 정리하게 합니다. "선생님이 시켜서" 말고, "제가 그때 뭘 해서 뭐가 달라졌는지"로요. 이걸 종이에 적어 가져가게 합니다. 6개월 뒤 흔들릴 때 이 종이가 치료자 역할을 합니다.
둘째, 언제 다시 나빠질지를 미리 예측합니다. 특정공포증에서 되돌아옴은 대개 세 가지 상황에서 옵니다. 오래 안 탔을 때, 나쁜 경험을 했을 때(심한 난기류나 회항), 그리고 인생의 다른 부분이 힘들 때. 마지막 항목이 의외로 큽니다. 수면이 무너지고 스트레스가 높은 시기에는 공포도 같이 고개를 듭니다.
셋째, 유지 계획. K씨의 경우는 "6개월에 최소 한 번은 탄다"였습니다. 안 타는 기간이 길어지면 회피의 회로가 다시 살아납니다. 그리고 한 번 되돌아왔다고 처음부터 다시 하는 게 아니라, 위계표에서 두 칸 아래로 내려가 다시 올라오면 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위계표는 버리지 말고 보관하라고 합니다.
넷째, 다시 올 조건을 명시합니다. "다시 무서우면 오세요"는 너무 막연합니다.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위계표에서 두 칸 내려가 혼자 해봤는데 3주 안에 안 되면, 그때 오세요." 기준이 있어야 사람이 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문장을 합니다. 정신과에서 자주 못 하는 말.
"자, 오늘로 끝입니다."
그 뒤 — 6개월 후
K씨는 발령을 수락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글에서 미화하고 싶지 않은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K씨가 6개월 뒤 남긴 메시지의 요지는 "이제 비행이 아무렇지도 않다"가 아니었습니다. 이랬습니다.
"탑니다. 그런데 이륙할 때는 아직도 좀 그래요."
이게 정직한 결말입니다. 그리고 이 결말이 왜 성공인지를 다음 절에서 이야기하겠습니다.
⚠️ 여기서 반드시 갈라져야 하는 길 — 혈액·주사·상해 공포
지금까지 쓴 내용을 혈액·주사·상해형 공포증에 그대로 적용하면 안 됩니다. 이 유형만 몸의 반응이 정반대로 갑니다.
보통의 공포는 교감신경이 켜지면서 심박과 혈압이 올라가고, 그 상태가 유지되다가 서서히 내려옵니다. 그런데 혈액·주사·상해 공포에서는 약 75%에서 처음의 교감신경 각성 뒤에 곧바로 혈관미주신경 반응이 따라붙습니다. 혈압과 심박이 급격히 떨어지고, 메스꺼움과 시야 흐림 같은 실신 전조가 오고, 실제로 쓰러집니다. 이걸 이상성(diphasic) 반응이라고 부릅니다14.
문제가 보이시나요. 표준 노출은 "그 자리에 머물러 불안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인데, 이 유형에서는 그 자리에서 기다리다 쓰러집니다. 쓰러지는 경험은 학습을 만들기는커녕 "역시 위험했다"를 못 박습니다. 게다가 넘어지면서 다칠 수도 있고요.
그래서 이 유형에는 긴장 적용(applied tension) 이라는 별도 기법을 씁니다. 1980년대에 외스트와 스테르너가 개발한 방법으로, 원리는 단순합니다. 큰 근육을 힘껏 조여 혈압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려 실신을 막고, 그 상태에서 노출을 진행하는 것.
실제 절차는 이렇습니다.
- 다리와 엉덩이 근육을 15~20초 힘껏 조입니다. 얼굴이 약간 달아오르는 정도까지.
- 20초 정도 힘을 뺍니다. 완전히 이완하는 게 아니라 평소 상태로 돌아가는 정도.
- 이어서 팔과 손 근육으로 같은 것을 반복합니다.
- 실신 전조(메스꺼움, 귀 먹먹함, 시야가 좁아짐, 식은땀)가 느껴지는 순간 이걸 바로 시작합니다.
효과는 꽤 인상적입니다. 혈액공포 환자 30명을 긴장 적용(AT)·실제노출 단독(E)·긴장만(T) 세 군에 배정해 5회기씩 치료한 고전적 연구에서, 엄격한 기준으로 임상적 호전을 본 비율은 AT 90%, T 80%, E 40% 였습니다. 1년 추적에서는 각각 100%, 90%, 50%. 저자들의 결론은 명확합니다. 혈액공포에서는 긴장 적용 또는 긴장만이 선택 치료가 되어야 한다고요(Öst LG, Fellenius J, Sterner U. Behav Res Ther. 1991;29:561-574 — ScienceDirect).
그리고 이것도 한 번으로 됩니다. 혈액공포 환자 30명을 긴장 적용 5회기·긴장 적용 1회기(최대 2시간)·긴장만 1회기로 나눈 연구에서, 세 군 모두 유의하게 호전했고 1년 추적에서 임상적 호전율은 각각 60%, 70%, 60% 였습니다15.
최근의 대규모 집단 단일회기 시행에서도, 참가자의 55%가 치료 전 채혈 중 실신 병력을 갖고 있었는데 치료 후 70%가 채혈을 무사히 마쳤고, 7개월 추적에서 주관적 공포 감소가 크거나 매우 컸습니다(Cohen's d 1.19~1.62).
핵심 — 채혈이나 주사 앞에서 쓰러진 적이 있다면, 인터넷에서 본 "그냥 견뎌라" 식 노출을 혼자 따라 하지 마세요.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참는 기술이 아니라 혈압을 올리는 기술입니다. 헌혈이나 예방접종 전에 근육을 조이는 것만으로도 실신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은 공포증이 없는 사람에게도 적용됩니다.
"완치"라는 단어를 어디까지 써도 되나
이 글의 제목에 "치료가 끝난다"고 써 놓았으니, 그 말의 범위를 정확히 그어야겠습니다.
사라지는 것:
- 회피. 이게 핵심입니다. 안 하던 일을 다시 합니다. 비행기를 탑니다. 채혈을 받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탑니다.
- 예기불안의 크기. 두 달 전부터 잠을 설치던 것이 전날 조금 신경 쓰이는 정도로 줄어듭니다.
- 진단. 기능 손상이 없어지면 진단기준을 더는 충족하지 않습니다. 이건 수사가 아니라 정의상 그렇습니다.
- 삶의 반경 제한. 안 하게 된 일의 목록이 짧아집니다.
남는 것:
- 그 상황에서의 불편감. K씨의 "이륙할 때는 아직도 좀 그래요"가 이겁니다. 그리고 사실 비행기 이륙할 때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그렇게 많지도 않습니다.
- 옛 기억. 노출은 공포 기억을 지우지 않습니다. 그 위에 "안전하다"는 새 학습을 덮어씁니다. 옛 기억은 그대로 있고, 조건이 맞으면 다시 튀어나올 수 있습니다. 이 구조는 노출치료 글에서 자세히 다뤘습니다.
- 되돌아올 가능성. 특히 오래 안 하면. 그래서 유지 계획이 종결 회기의 절반을 차지합니다.
그러니 정확한 표현은 이렇습니다. "공포가 사라졌다"가 아니라 "공포가 더는 결정권을 갖지 않는다." 이게 특정공포증에서 말할 수 있는 완치의 실제 모양이고, 저는 이 정도면 충분히 완치라고 부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불안장애와 비교하면 왜 이 병만 이렇게 말할 수 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 특정공포증 | 공황장애 | 사회불안장애 | 범불안장애 | |
|---|---|---|---|---|
| 공포의 대상 | 하나로 뚜렷함 | 몸의 감각·발작 자체 | 평가받는 상황 전반 | 대상이 계속 옮겨 다님 |
| 노출할 것을 정하기 | 쉽다 | 중간(내부감각) | 어렵다 | 매우 어렵다 |
| 1차 치료 | 노출(약은 보조도 아님) | SSRI + CBT | CBT 우선, SSRI 병행 | CBT + SSRI |
| 치료 기간 | 1회기~10회기 | 수개월~1년 이상 | 수개월 이상 | 장기 |
| 종결이라는 말 | 쓸 수 있다 | 조심스럽게 | 조심스럽게 | 잘 안 쓴다 |
차이의 핵심은 "피하면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는가" 입니다. 비행기는 가리킬 수 있습니다. 범불안장애의 걱정은 오늘은 건강, 내일은 돈, 모레는 아이로 옮겨 다닙니다. 가리킬 대상이 하나면 치료가 짧아집니다. 그래서 특정공포증은 정신과에서 가장 다루기 쉬운 병에 속합니다. 문제는, 앞서 봤듯 그 쉬운 병을 네 명 중 세 명이 평생 안 고치고 산다는 것이죠.
모두가 K씨처럼 되지는 않습니다
이 글은 잘 풀린 경과를 예시로 썼습니다. 그러니 균형을 위해 안 풀리는 경우도 적겠습니다.
- 중간에 그만두는 분들이 있습니다. 노출치료 전반에서 중도 탈락은 드물지 않습니다. 저는 이걸 대개 치료자 쪽 문제로 읽습니다. 계단을 너무 높게 잡았거나, 왜 이걸 하는지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거나.
- 다른 병이 같이 있으면 훨씬 복잡해집니다. 세계정신건강조사에서 특정공포증 평생 진단자의 60.5%가 다른 정신질환을 동반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70~90%대)에서 특정공포증이 먼저 왔습니다. 우울이 깊거나 술 문제가 있으면 그쪽을 먼저 정리해야 노출이 굴러갑니다.
- 대상이 여럿인 경우. 공포 대상이 하나가 아닌 사람이 오히려 흔합니다(다른 자료에서는 특정공포증이 있는 사람의 약 75%가 다른 대상도 두려워한다고 봅니다). 대상 수가 많을수록 기능 손상도 크고, 치료도 길어집니다.
- 원하는 만큼 좋아지지 않는 분들. 계단은 다 올랐는데 여전히 "탈 수는 있지만 여전히 지옥"인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저는 회기를 늘리기보다 맥락을 늘립니다. 다른 항공사, 다른 시간대, 다른 좌석, 다른 날씨. 한 맥락에서만 배운 안전은 그 맥락에 갇히거든요.
진료실에서 자주 나오는 질문들
Q. 그냥 평생 안 타면 안 되나요? 됩니다. 실제로 그렇게 사는 분들 많고, 그 선택이 틀렸다고 말할 생각도 없습니다. 다만 계산은 정직하게 하셨으면 합니다. 이 병의 값은 발작이 아니라 포기한 일들의 목록으로 청구되거든요. 12년 뒤 그 목록이 어디까지 길어져 있을지를 한번 적어보시면 답이 꽤 빨리 나옵니다.
Q. 약으로는 안 되나요? 특정공포증에는 1차 약물치료가 없다시피 합니다. 승인된 약도 사실상 없고요. 게다가 앞에서 본 것처럼 탑승 전 항불안제는 다음번을 더 어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울증이나 다른 불안장애가 같이 있어서 노출의 첫 계단조차 올라설 힘이 없다면 그때는 약이 다리를 놓아줄 수 있지만, 그건 특정공포증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치료를 시작할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Q. 딱 한 번만 타면 되는데, 그때도 안 되나요? 평생 다시 탈 일이 정말 없다면 저도 약을 씁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문제는 "딱 한 번"이라고 하셨던 분이 3년 뒤 다시 오시는 경우가 꽤 많다는 것이고, 그때는 시작점이 처음보다 뒤로 물러나 있다는 것입니다.
Q. 아이가 개를 너무 무서워합니다. 크면 나아질까요? 동물형은 발병이 이르고 아이에서 특히 흔합니다. 상당수는 자연히 옅어집니다. 다만 놀이터를 피하고 산책을 못 나가고 친구 집에 못 가는 수준이면 기다릴 일이 아닙니다. 아동·청소년에서도 단일회기 치료의 근거가 좋습니다. 앞서 본 ASPECT 시험이 정확히 7~16세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요.
Q. 채혈할 때 쓰러집니다. 이것도 공포증인가요? 쓰러진다고 다 공포증은 아닙니다. 실신 자체는 공포증 없이도 흔합니다. 진단은 회피와 손상으로 갈립니다. 건강검진을 미루고, 필요한 검사를 안 받고, 임신 중 정기검사가 두려워지는 수준이면 다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유형은 앞서 말한 대로 표준 노출이 아니라 긴장 적용입니다. 병원에 가시면 "저는 채혈 때 실신한 적이 있습니다"라고 먼저 말씀하세요. 눕혀서 하는 것만으로도 사고를 크게 줄입니다.
Q. 유튜브 보고 혼자 해도 될까요? 가벼운 경우라면 해볼 만합니다. 실제로 인터넷 기반 프로그램이 치료자 안내 없이도 효과를 보인 시험이 있었죠.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위계표를 실제로 종이에 만들 것, 안전행동을 목록으로 적을 것, 그리고 3주 안에 진전이 없으면 혼자 하기를 그만둘 것. 그리고 실신하는 유형·트라우마가 얽힌 경우·공황이 함께 있는 경우는 혼자 하지 마세요.
Q. 치료가 끝나면 정말 안 와도 되나요? 네. 그런데 저는 종결 회기에 늘 조건을 하나 걸어둡니다. "위계표에서 두 칸 내려가 혼자 해봤는데 3주 안에 안 되면 오세요." 다시 오는 게 실패가 아니라는 것도 그때 미리 말해둡니다. 옛 기억이 먼저 인출된 것뿐이고, 덮어쓰기를 한 번 더 하면 됩니다.
💬 전문의 한마디
저는 특정공포증 환자분들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이 병은 정신과에서 가장 확실하게 고칠 수 있는 병 중 하나인데, 정작 우리가 가장 적게 이야기하는 병이기 때문입니다. 학회에서도, 언론에서도, 심지어 진료실에서도요. 우울과 조현병과 중독을 이야기하느라 "개가 무서워서 산책을 못 나갑니다" 같은 문제는 늘 뒤로 밀립니다. 정작 그런 문제로 20년을 잃은 분들이 실제로 계신데도요.
그래서 저는 이 병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당신이 잃은 건 용기가 아니라 기회입니다." 12년 동안 비행기를 안 탄 사람은 겁쟁이가 아닙니다. 회피가 워낙 잘 듣는 응급처치라서 그걸 계속 써왔을 뿐이고, 그건 사람 뇌가 원래 그렇게 만들어져 있어서입니다. 문제는 응급처치가 12년째 계속되면 그건 더 이상 응급처치가 아니라 삶의 구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저는 "안 무서워지게 해주세요"라는 요청을 들어드린 적이 없습니다. 대신 늘 이렇게 바꿔 제안합니다. "무서운 채로 타는 법을 같이 익힙시다." 처음엔 다들 실망하십니다. 그런데 몇 회기 지나면 이게 훨씬 좋은 거래라는 걸 알게 되십니다. 안 무서워지기를 기다리는 건 끝이 없는 일이고, 무서운 채로 하는 건 다음 주에 당장 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마지막으로, 종결 회기에서 "이제 안 오셔도 됩니다"라고 말할 때의 기분에 대해. 이 문장을 할 수 있는 병이 몇 없어서, 저는 이 말을 할 때마다 조금 즐겁습니다. 혹시 지금 무언가를 20년째 피해 오고 계신다면, 그 20년이 아직 30년이 되기 전에 한 번만 물어봐 주셨으면 합니다. 생각보다 훨씬 짧게 끝나는 일일 수 있습니다.
K씨의 위계표는 지금도 그의 서랍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저는 종결할 때마다 그 종이를 버리지 말라고 합니다. 다시 쓸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다시 쓸 일이 생겼을 때 처음부터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게 이 치료의 마지막 선물이거든요.
그리고 사실 저는, 그 종이가 서랍에 그냥 있는 채로 잊히는 쪽이 제일 좋습니다.
이 글은 정보 제공용입니다. 등장하는 사례는 가공의 인물이며, 진단과 치료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 상의하세요. 처음 병원에 가시는 분은 정신과 첫 진료, 무엇을 하나요도 함께 보시면 좋겠습니다.
함께 보면 좋은 자료
- 특정공포증의 국제 역학(22개국, 평생유병률 7.4%·발병 중앙연령 8세·치료율 23.1%), Wardenaar KJ 등, Psychological Medicine 2017: PMC
- 특정공포증 종설(유병률·경과·치료 격차·치료법), Eaton WW 등, Lancet Psychiatry 2018: PMC 전문
- DSM-5-TR 진단기준과 임상 개요: Merck Manual Professional
- 특정공포증 심리치료 메타분석(33개 무작위 연구), Wolitzky-Taylor KB 등, Clin Psychol Rev 2008: PubMed
- 단일회기 치료의 원형(20명·평균 2.1시간·4년 뒤 90% 호전), Öst LG, Behav Res Ther 1989: PubMed
- 단일회기 치료(OST) 방법 기술과 효능 리뷰, Zlomke K, Davis TE 3rd, Behavior Therapy 2008: PubMed
- 단일회기 vs 다회기 노출 메타분석(85편·1,758명, 시간은 45% 적고 효과는 대등), Odgers K 등, Behav Res Ther 2022: PubMed
- 아동·청소년 단일회기 치료 비열등성 무작위시험(ASPECT, 268명), Wright B 등, J Child Psychol Psychiatry 2023: PMC
- 비행공포에서 알프라졸람이 노출 효과를 방해함, Wilhelm FH, Roth WT, Behav Res Ther 1997: PubMed
- VR 노출 vs 실제노출 직접 비교 메타분석, Wechsler TF 등, Front Psychol 2019: PMC
- 비행공포 VR 노출·실제노출·대기군 무작위시험(12개월 추적), Rothbaum BO 등, Behavior Therapy 2006: PubMed
- 인터넷 기반 비행공포 노출(NO-FEAR Airlines) 무작위시험, Campos D 등, BMC Psychiatry 2019: PubMed
- 혈액공포에서 긴장 적용 vs 실제노출 vs 긴장만, Öst LG, Fellenius J, Sterner U, Behav Res Ther 1991: ScienceDirect
- 긴장 적용 1회기 vs 5회기, Hellström K 등, Behav Res Ther 1996: PubMed
- 이상성 반응과 긴장 적용 절차, 대규모 집단 단일회기 실행 연구, Wannemueller A 등, Front Psychol 2018: 원문
- 국내 유병률과 정신건강서비스 이용률, 보건복지부 2021년 정신건강실태조사: 보도자료
관련 글: 노출치료는 무서운 걸 참는 게 아닙니다 · 공황발작을 겪었다고 곧 공황장애는 아닙니다 · 사회불안장애는 남들 앞이 아니라 '남들의 눈'이 무서운 병입니다
참고문헌
- Merck Manual Professional, Specific Phobias ↩
- Wardenaar KJ 등, Psychological Medicine 2017;47(10):1744-1760 ↩
- Eaton WW 등, Lancet Psychiatry 2018;5(8):678-686 — 전문 PMC ↩
- 보건복지부, 2021년 정신건강실태조사 결과 발표 ↩
- Wilhelm FH, Roth WT. Behav Res Ther. 1997;35(9):831-841 ↩
- Wolitzky-Taylor KB 등, Clin Psychol Rev. 2008;28(6):1021-1037 ↩
- Öst LG. Behav Res Ther. 1989;27(1):1-7 ↩
- Zlomke K, Davis TE 3rd. Behavior Therapy. 2008;39(3):207-223 ↩
- Odgers K 등, Behav Res Ther. 2022;159:104203 ↩
- Wright B 등, J Child Psychol Psychiatry. 2023;64(1):39-49 ↩
- Wechsler TF 등, Front Psychol. 2019;10:1758 ↩
- Rothbaum BO 등, Behavior Therapy. 2006;37:80-90 ↩
- Campos D 등, BMC Psychiatry. 2019;19:86 ↩
- Wannemueller A 등, Front Psychol. 2018;9:1534 ↩
- Hellström K, Fellenius J, Öst LG. Behav Res Ther. 1996;34(2):10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