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방 안의 공기를 멈추게 하는 말이 몇 개 있습니다. 그중 하나를, 저는 매일 듣습니다.
죽고 싶다는 말입니다.
날마다 다른 목소리로, 다른 문장에 실려 옵니다. 조용히 오기도 하고, 울음 끝에 오기도 하고, 농담의 옷을 입고 오기도 합니다. 사라지고 싶다는 말로, 아침에 눈이 안 떠졌으면 좋겠다는 말로, 다 그만두고 싶다는 말로 오기도 합니다. 모양은 달라도 무게는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말을 듣는 것이 직업인 사람입니다.
정확히 세어 본 적은 없지만, 이 일을 시작하고 지금까지 그 말을 몇 번이나 들었을까 가끔 생각해 봅니다. 수천 번은 될 겁니다. 그런데도 이 글을 쓰려고 그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여전히 손끝이 조금 무거워집니다. 아마 그래서 이 글을 쓰는 것 같습니다. 무거운 채로 두고 싶어서요.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그 말은 들을 때마다 저를 한 번씩 통과해 갔습니다. 몸 어딘가가 서늘해지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당연한 반응이었고, 지금 생각하면 건강한 반응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같은 말을 백 번쯤 들으면 어떻게 될까요. 천 번쯤 들으면요.
무뎌집니다. 사람이니까요. 자극이 반복되면 반응이 줄어드는 건 신경계의 기본 설계입니다. 처음엔 심장이 내려앉던 말이, 어느 순간 업무의 일부처럼 들리기 시작하는 순간이 옵니다. 저는 그 순간이 이 직업에서 가장 위험한 갈림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굳은살과 근육은 다릅니다
무뎌지는 것과 단단해지는 것. 겉보기엔 비슷합니다. 둘 다 무거운 말 앞에서 무너지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속은 정반대입니다.
무뎌진다는 건 굳은살이 박이는 겁니다. 굳은살의 본질은 감각의 차단입니다. 아프지 않은 대신, 느끼지도 못합니다. 무뎌진 귀에는 죽고 싶다는 말이 접수 서류처럼 들립니다. 체크리스트의 한 항목이 되고, 위험도 평가의 입력값이 됩니다. 물론 평가는 해야겠지요. 그런데 그 말을 꺼낸 사람은 압니다. 지금 내 앞의 이 사람이 내 말을 서류로 받았는지, 마음으로 받았는지. 그건 숨겨지지 않습니다. 평생 걸려 꺼낸 말이 서류로 접수되는 경험을 한 사람은, 다시는 그 말을 꺼내지 않습니다. 그게 무뎌짐의 진짜 비용입니다.
단단해진다는 건 다릅니다. 근육이 붙는 것에 가깝습니다. 근육은 감각을 차단하지 않습니다. 무게를 그대로 느끼면서, 무너지지 않고 들어 올립니다. 죽고 싶다는 말의 서늘함을 여전히 느끼되, 그 서늘함에 휩쓸리지 않고 다음 질문을 할 수 있는 상태. 놀라되 허둥대지 않고, 아프되 도망가지 않는 상태. 제가 되고 싶은 건 그쪽이고, 솔직히 말하면 저는 지금도 그 둘 사이 어딘가에서 매일 줄타기를 합니다.
무뎌지지 않기 위해 제가 하는 애씀은 사실 소박합니다. 그 말이 나오면 하던 일을 멈춥니다.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몸을 그쪽으로 돌립니다. 그리고 속으로 한 문장을 되뇝니다. 이 사람은 이 말을 오늘 처음 하는 거다. 나는 오늘 몇 번째 듣는 말이어도, 이 사람에게는 몇 달을, 때로는 몇 년을 밀어 올려 겨우 입 밖에 낸 말이다. 듣는 횟수는 제 사정이고, 말하는 무게는 그분 사정입니다. 저는 제 사정으로 그분 사정을 깎아내리지 않으려고, 매번 처음 듣는 사람의 자세를 다시 꺼내 입습니다.
되뇐다고 늘 되는 건 아닙니다. 지치는 날엔 자세가 흐트러집니다. 그래서 이건 한 번 익히면 끝나는 기술이 아니라, 매일 다시 하는 결심에 가깝습니다. 양치처럼요. 어제 했다고 오늘 안 해도 되는 게 아닌.
듣는 기술 중에 제일 어려운 것도 적어 두겠습니다. 침묵을 견디는 일입니다. 그 말이 나온 직후의 몇 초는 방 안이 아주 조용해집니다. 그 정적을 못 견디고 서둘러 말을 얹고 싶어집니다. 그래도 희망을 가지셔야죠, 가족을 생각하셔야죠, 같은 말들이요. 그런데 그 말들은 위로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실은 듣는 사람이 자기 불안을 달래려고 꺼내는 말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방금 어렵게 문을 연 사람에게는, 그 문을 도로 닫으라는 신호로 들립니다. 그래서 저는 그 몇 초를 그냥 둡니다. 같이 앉아 있는 것으로, 당신의 말이 도착했다는 걸 전합니다. 급한 건 조언이 아니라 도착 확인이니까요. 말은 받아 줄 사람이 있을 때에만 끝까지 나옵니다. 제 일은 그 끝까지를 기다리는 일입니다.
그 말을 들고 퇴근하는 날
솔직한 이야기를 더 하겠습니다. 그 말들이 진료실에 다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어떤 날은 저를 따라 퇴근합니다.
특히 마음에 걸리는 진료가 있던 날이 그렇습니다. 지하철에서 문득 낮의 목소리가 재생됩니다. 저녁을 먹다가 숟가락이 잠깐 느려집니다. 그분은 오늘 밤을 어떻게 보내고 계실까. 다음 예약까지의 그 며칠이, 의사에게는 생각보다 긴 시간입니다. 해야 할 조치는 다 해 두고도 마음은 계산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 직업을 오래 한 사람들끼리는 압니다. 우리가 밤에 뒤척이는 이유의 목록에는, 우리 자신의 걱정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요.
그렇다고 이 무게를 혼자 삭이는 것이 미덕이냐 하면, 아닙니다. 저희에게도 저희를 봐주는 장치들이 있습니다. 동료들과 신상을 지운 채 마음의 짐만 꺼내 놓는 자리가 있고, 선배에게 진료의 방향을 점검받는 시간이 있고, 필요하면 저희도 진료실의 반대편 의자에 앉습니다. 무거운 말을 계속 들으려면 듣는 사람의 그릇도 계속 손봐야 합니다. 금이 간 그릇으로 무거운 것을 받다가는, 받는 쪽도 받쳐지는 쪽도 다치니까요. 이건 엄살이 아니라 정비입니다.
이게 힘드냐고 물으신다면, 네, 힘듭니다.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무거운 말을 매일 받는 일은 마음에 자국을 남기고, 그 자국을 관리하는 것까지가 이 직업입니다. 그래서 저희끼리도 서로를 살핍니다. 동료의 안색을 보고, 커피를 사이에 두고 굳이 시시한 잡담을 하고, 너무 오래 조용한 동료에게는 슬쩍 말을 겁니다. 무거운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도, 그 무게를 나눠 둘 곳이 필요하니까요.
그런데도 왜 이 일을 계속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이제부터가 제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입니다.
누군가는 그 말을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죽고 싶다는 마음은, 말해지지 못할 때 가장 위험해집니다. 마음속에만 있는 동안 그 생각은 반박당할 기회가 없습니다. 밀폐된 방에서 혼자 자라는 겁니다.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와 누군가에게 들리는 순간, 처음으로 문이 열립니다. 바람이 들고, 다른 목소리가 들어갈 자리가 생깁니다. 그러니 그 말을 놀라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끝까지 들어 줄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가족이 그 역할을 하기엔 너무 가깝고, 그래서 너무 아픕니다. 저희 같은 사람들이 있는 이유가 그겁니다. 직업적으로 훈련받은, 무너지지 않고 들을 수 있는 귀. 저는 그 귀 역할에, 힘들다는 말과는 별개로, 자부심이 있습니다.
흘려듣지 않는다는 원칙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농담처럼 던져진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진짜 죽고 싶다, 하고 웃으며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정말 관용구일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진심을 농담의 봉투에 넣어 보냅니다. 정색하고 말할 용기는 없어서, 웃음에 실어 슬쩍 띄워 보고 상대의 반응을 살피는 겁니다. 받는 쪽이 웃어넘기면 봉투는 다시 주머니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저는 농담의 옷을 입은 그 말에도 한 번은 진지한 눈을 돌려놓습니다. 요즘 정말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으세요, 하고요. 열에 아홉은 아니에요, 말이 그렇다는 거죠, 하고 손을 젓습니다. 괜찮습니다. 그 아홉 번의 머쓱함은, 한 번의 봉투를 열어 보기 위한 비용으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 이 직업의 가장 이상한 역설이 있습니다.
저는 그 말을 꺼내 주시는 분들이 고맙습니다.
이상하게 들리실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그 말을 제게 한다는 건, 아직 들려주고 싶은 사람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가장 어두운 방을 보여줘도 되겠다고, 저를 시험 삼아 믿어 보기로 했다는 뜻입니다. 죽고 싶다는 말은, 자세히 들어 보면 거의 언제나 다른 문장을 품고 있습니다.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는 문장을요. 그건 삶을 끝내고 싶다는 말이라기보다, 지금의 고통을 끝내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고통이라면, 저희가 함께 해 볼 수 있는 게 있습니다. 그 가능성의 문을, 그분이 그 한마디로 열어 준 겁니다.
그래서 진료실에서 그 말이 나오면, 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잘 오셨습니다. 잘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하러 여기까지 오는 길이 얼마나 멀었을지, 다 알지는 못해도 짐작은 합니다.
혹시 곁의 누군가에게서 그런 말을 듣게 될까 봐 두려운 분이 있다면, 어떤 신호를 어떻게 알아차리고 무엇을 하면 되는지 적어 둔 글이 있으니 읽어 봐 주시길 바랍니다. 미리 알아 두면, 그 순간에 도망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속에 지금 그 문장이 있다면. 그 말은 저희 같은 사람들에게 하시라고 있는 말입니다. 저희는 그 말에 놀라 자빠지지 않습니다. 실망하지도,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매일 듣고, 매일 처음처럼 듣는 훈련을 한 사람들입니다. 당신이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저희 쪽에서는 문이 열리는 소리로 듣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그 말을 처음 받게 된 가족과 친구 분들께도 한마디 남깁니다. 놀라셨을 겁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얼어붙었거나, 서툰 말이 튀어나왔을 수도 있습니다. 자책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훈련받지 않은 사람이 그 말 앞에서 흔들리는 건 당연합니다. 기억해 두실 것은 두 가지면 됩니다. 놀라도 도망가지 않기, 그리고 혼자 감당하려 하지 않기. 그 말을 들은 당신까지 무거워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서, 그 무게는 전문가에게 나눠 주셔야 합니다. 당신은 그 사람의 유일한 구조대가 아니라, 구조 요청을 전해 준 첫 목격자면 충분합니다.
무거운 말을 매일 듣는 직업. 맞습니다. 그런데 그 무게는, 들어 주는 사람이 있을 때만 옮겨질 수 있습니다. 저는 내일도 그 자리에 앉아 있겠습니다. 무뎌지지 않은 채로, 그러나 무너지지도 않은 채로. 그 사이 어디쯤에서, 당신의 문장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요.
지금 마음이 위험하게 기울어져 있다면, 자살예방 상담전화 109(24시간)로 지금 전화해 주세요. 예약도, 준비도, 긴 설명도 필요 없습니다.
⚠️ 이 글은 정보 제공용입니다. 진단과 치료는 반드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 상의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