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바펜틴은 참 여기저기 쓰입니다. 불안하다고 하면 나오고, 잠을 못 잔다고 해도 나오고, 신경통에도, 술을 끊는 데도 등장하죠. 벤조디아제핀보다 순하고 중독도 없다는 이미지 덕에, 이런저런 증상에 '일단 한번 써보자'는 식으로 널리 처방돼 왔습니다.
그런데 이 '순한 만능 신경안정제'라는 평판을 하나씩 뜯어보면, 생각보다 허술한 구석이 많습니다. 어떤 쓰임새는 근거가 탄탄한데 어떤 쓰임새는 거의 없다시피 하고, 그 '만능' 이미지의 상당 부분은 놀랍게도 과학이 아니라 한때의 불법 마케팅이 만든 것이었거든요.
이름부터가 오해를 부른다
먼저 흔한 오해 하나. 이름이 '가바(GABA)펜틴'이니 뇌의 진정 물질인 GABA에 작용하겠거니 싶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바펜틴은 GABA 수용체에 직접 작용하지 않아요. 대신 신경세포의 전압작동칼슘채널에 있는 α2δ라는 소단위에 달라붙어, 흥분성 신호전달물질이 과하게 나오는 것을 줄입니다1. 이름과 실제 기전이 어긋나는 셈이죠.
원래 이 약은 1990년대에 뇌전증 보조 치료제로 나왔고, 이후 대상포진 후 신경통 같은 신경병성 통증에 정식 적응증을 얻었습니다. 정신과에서 쓰는 불안·불면·금단 같은 용도는 대부분 허가 외, 즉 오프라벨 사용입니다.
근거는 쓰임새마다 천차만별
여기가 핵심입니다. '만능'처럼 쓰이지만, 실제 근거는 적응증마다 극과 극입니다.
가장 근거가 탄탄한 정신과적 쓰임새는 의외로 알코올입니다. 알코올 의존 환자 150명을 대상으로 한 무작위 대조연구에서, 하루 1,800mg을 복용한 집단의 완전 금주율은 17.0%로 위약(4.1%)보다 뚜렷하게 높았습니다. 과음을 하지 않은 비율도 44.7% 대 22.5%로 위약을 앞섰고요2. 불면·불쾌감·갈망 같은 금단 관련 증상도 함께 줄었습니다. 이 영역에서는 가바펜틴이 제 몫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6년 뒤에 나온 후속 시험이 이 그림을 훨씬 쓸모 있게 다듬어 줍니다. 이번엔 대상을 좁혀, 술을 끊은 지 3일 된 알코올 사용장애 환자 중 '금단 증상을 겪은' 사람 96명만 모아 하루 최대 1,200mg을 16주간 위약과 겨뤘습니다. 폭음한 날이 하루도 없었던 비율은 27% 대 9%, 완전 금주는 18% 대 4%로 가바펜틴이 앞섰습니다. 여기까지는 앞의 연구와 비슷하죠. 진짜 대목은 참가자를 금단 증상의 정도로 갈랐을 때 나옵니다. 금단 증상이 심했던 쪽에서는 효과가 뚜렷해서 한 명이 이득을 보게 하는 데 필요한 치료 인원이 3명 남짓이었던 반면, 금단 증상이 약했던 쪽에서는 위약과 차이가 없었습니다3.
이건 '듣느냐 안 듣느냐'가 아니라 '누구에게 듣느냐'의 문제라는 뜻입니다. 술을 줄이려는 사람 아무에게나 얹는 약이 아니라, 끊을 때 손이 떨리고 잠을 못 자고 불안이 치솟는 사람에게 겨냥해 쓰는 약에 가깝습니다.
반면 정작 가장 많이 처방되는 불안·불면 쪽은 근거가 훨씬 약합니다. 55개의 이중맹검 연구를 모은 2022년 체계적 문헌고찰의 결론이 이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there is moderate evidence of the efficacy of gabapentinoids in anxiety states, but minimal evidence in bipolar disorder and insomnia and they should be used for these disorders only with strong justification." (불안 상태에는 중등도의 효능 근거가 있으나, 양극성장애와 불면에는 근거가 미약하므로 이들 질환에는 강력한 정당화가 있을 때만 써야 한다.)
불안에서도 효과가 가장 뚜렷하게 재현된 건 정식 불안장애가 아니라 '수술 전 불안'이었고, 불면과 양극성에서는 근거가 거의 없다는 겁니다4. 사회공포증에서 가바펜틴이 위약보다 나았다는 초기 보고가 없지는 않지만5, 20년이 넘도록 그 뒤를 든든히 받쳐줄 시험이 충분히 쌓이지 않았다는 게 이 고찰의 요지입니다.
| 쓰임새 | 근거 수준 |
|---|---|
| 신경병성 통증(대상포진후 신경통 등) | 정식 적응증, 확립 |
| 알코올 사용장애·금단 | 있는 편 — 특히 금단 증상을 겪는 사람에 한해 |
| 불안 (특히 수술 전 불안) | 중등도, 일관되지만 보편적이진 않음 |
| 불면 | 근거 약함 |
| 양극성장애 | 근거 부실 |
'만능약' 이미지는 마케팅이 만들었다
그렇다면 왜 근거도 약한 곳에까지 이렇게 널리 쓰이게 됐을까요. 여기에 씁쓸한 사연이 있습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 뉴론틴을 팔던 제약사(파크-데이비스, 이후 화이자)는 이 약을 승인받지도 않은 여러 용도, 그러니까 양극성·편두통·통증 등에 조직적으로 부풀려 판촉했습니다. 결국 내부고발로 이어진 소송에서 회사는 2004년 유죄를 인정하고 약 4억 3천만 달러를 물어냈습니다6. 근거 없는 오프라벨 판촉을 처벌한 대표적 사례로 남았죠. 지금 우리가 가진 '가바펜틴은 이것저것 다 되는 순한 약'이라는 인상의 뿌리에는, 이렇게 과학이 아니라 판매 전략이 상당 부분 깔려 있습니다.
핵심 — 가바펜틴의 '순한 만능 신경안정제' 이미지는 상당 부분 과학이 아니라 마케팅이 만든 착시입니다. 자리를 잘 찾으면 쓸모가 분명하지만, 불면과 양극성에는 근거가 약하고, 뒤에서 볼 안전 문제도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마냥 순한 약도 아니다
'중독 없는 안전한 약'이라는 이미지도 절반만 맞습니다.
약리부터 좀 특이합니다. 가바펜틴은 용량을 올릴수록 흡수가 비례해서 늘지 않고 포화됩니다. 즉 두 배를 먹어도 몸에 흡수되는 양은 두 배가 안 되는, 비선형 흡수를 보입니다7. 또 대사되지 않고 신장으로 배설되기 때문에 콩팥 기능이 떨어진 사람은 용량을 줄여야 합니다. 흔한 부작용으로는 졸음과 어지럼, 실조, 다리 부종, 체중 증가, 인지 둔화가 있습니다.
더 중요한 건 오남용과 의존입니다. 가바펜틴과 사촌 격인 프레가발린을 묶어 가바펜티노이드라고 부르는데, 이들의 오남용이 최근 크게 늘었습니다. 특히 오피오이드를 남용하는 집단에서 남용률이 두드러졌고요8. 그리고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위험이 하나 있습니다. 오피오이드와 함께 복용하면 사망 위험이 올라간다는 겁니다. 온타리오의 대규모 연구에서 가바펜틴을 병용한 경우 오피오이드 관련 사망 위험이 약 1.5배 높았습니다9. 이런 오남용 우려 때문에 영국은 2019년 가바펜틴과 프레가발린을 규제 약물로 재분류하기도 했습니다. 갑자기 끊으면 불안·불면·발한 같은 금단 증상이 올 수 있어, 뺄 때도 천천히 줄여야 합니다.
2025년에 붙은 새 물음표 — 인지와 치매
최근에는 장기 복용과 인지 문제를 두고 논쟁이 하나 더 붙었습니다. 만성 요통 환자 기록을 성향점수로 짝지어 26,416명을 비교한 후향적 연구에서, 가바펜틴을 6회 이상 처방받은 사람은 이후 치매 발생이 1.29배, 경도인지장애가 1.85배 많았습니다. 처방이 12회를 넘으면 치매는 1.40배로 더 올라갔고, 뜻밖에도 이 신호는 18~64세 성인에서 더 뚜렷했습니다(치매 2.10배, 경도인지장애 2.50배)10.
숫자만 보면 겁이 나지만, 읽는 법을 함께 알아야 합니다. 이건 무작위 배정 시험이 아니라 진료 기록을 뒤로 훑은 관찰연구입니다. 가바펜틴을 오래 처방받은 사람은 통증이 더 심하고 활동량이 적으며 다른 약과 병이 많을 수 있는데, 그런 요인들이 치매 위험과도 얽혀 있습니다. 또 인지가 흐려지기 시작한 사람이 통증을 더 호소해 약을 더 받았을 가능성도 남습니다. 그래서 이 결과는 '가바펜틴이 치매를 일으킨다'는 결론이 아니라, 확인이 필요한 신호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실용적인 함의는 있습니다. 근거가 탄탄한 자리(신경병성 통증, 금단 증상이 있는 알코올 사용장애)라면 이 신호 때문에 좋은 치료를 접을 이유는 없습니다. 반대로 근거가 얇은 자리 — 이를테면 잠이 안 온다고 몇 년째 이어 쓰는 경우 — 라면, 저울의 반대쪽에 얹을 무게가 하나 늘어난 셈입니다.
전문의 한마디
가바펜틴은 자리를 잘 찾으면 쓸모가 분명한 약입니다. 대상포진 후 신경통이나 알코올 금단 보조에서는 근거도 있고, 실제로 도움이 됩니다. 다만 '순한 만능 신경안정제'라는 이미지는 상당 부분 근거가 아니라 마케팅이 만든 착시라는 걸 알아두면 좋겠습니다. 불면이나 양극성에는 근거가 약하고, 무엇보다 중독이 아예 없는 약도 아닙니다. 특히 알코올이나 진통제를 함께 쓰는 분이라면 더 조심해야 하고요. 벤조디아제핀 대신이라고 마냥 방심할 약은 아니라는 것, 그게 제가 이 약에 대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