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저는 소진이라는 단어를 하루에 몇 번씩 발음했습니다. 요즘 많이 지치셨죠. 그건 게으른 게 아니라 소진된 겁니다. 쉬는 것도 치료입니다. 이런 문장들을요. 진심이었고, 지금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 문장들을 발음하던 시기의 제가, 정확히 그 상태였다는 겁니다. 그리고 저만 그걸 몰랐습니다.
미리 말해 두면 이 글은 무용담이 아닙니다. 위기를 극적으로 알아차리고 훌륭하게 회복했다는 이야기였다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늦게 알아차렸고 지금도 관리 중이라는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그래도 쓰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 시절의 저 같은 사람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 확률이 꽤 높다고 생각해서요. 그리고 그 사람은 아마, 이게 자기 이야기라는 걸 마지막 문단쯤에야 인정할 겁니다. 제가 그랬듯이요.
돌아보면 신호는 다 있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게 아니라 눈을 뜨는 일과 협상을 하고 있었고, 진료가 끝난 저녁에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말이라는 걸 하루치 다 써 버린 사람처럼요. 좋아하던 것들이 시들해졌고, 주말이 와도 충전이 안 됐습니다. 방전된 배터리가 아니라 수명이 다 된 배터리처럼, 꽂아 놔도 숫자가 안 올라갔습니다.
만약 진료실에서 누가 저 문장들을 그대로 말했다면, 저는 십 분 안에 알아들었을 겁니다. 어쩌면 오 분. 체크리스트가 머릿속에 있으니까요. 그런데 제 것에는 다른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냥 좀 피곤한 거다. 이번 달만 지나면 나아진다. 다들 이러고 산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 일이지요. 남의 마음에는 진단명을 붙이는 사람이 자기 마음에는 "그냥"이라는 접두사를 붙이고 있었으니까요. "그냥 피곤한 거야"의 그냥은, 지금 와서 보면 들여다보기 싫다는 뜻이었습니다.
의사들이 자기 증상 앞에서 얼마나 창의적인지는 업계의 오래된 농담거리이기도 합니다. 남의 피로에는 진단명을 붙이고, 자기 피로에는 계절 탓과 날씨 탓과 원래 그런 성격 탓을 붙입니다. 아는 게 많으면 자기한테 더 정확해질 것 같지만, 실제로는 반대에 가깝습니다. 아는 게 많을수록 자기를 예외 처리할 논리도 많아지거든요. 저도 그 논리들을 부지런히 썼습니다. 지식이 통찰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저는 남의 사례가 아니라 제 사례로 배웠습니다.
남의 소진은 잘 보입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변명을 하자면 이 직업의 구조 자체에 함정이 하나 있습니다.
마음을 돌보는 일은 마음을 씁니다. 당연한 말인데, 이 당연한 말의 청구서는 조용히 옵니다. 진료실에서 저는 하루 종일 다른 사람의 감정 앞에 앉아 있습니다. 무너지는 이야기, 버티는 이야기, 버티다 무너지는 이야기. 그 이야기들을 제대로 들으려면 마음의 일부를 계속 내어 줘야 합니다. 공감은 다행히 재생되는 자원이지만, 재생 속도보다 빨리 쓰면 잔고가 비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계좌에는 잔고 알림 문자가 안 옵니다.
여기에 함정이 하나 더 겹칩니다. 돌보는 사람은 자기가 무너지면 안 된다고 믿기 쉽습니다. 내가 흔들리면 저 사람들은 어디에 기대나. 이 생각은 언뜻 책임감처럼 생겼지만, 오래 데리고 살면 정체가 드러납니다. 자기를 돌보는 일을 무한정 뒤로 미루게 만드는 핑계입니다. 그럴듯하게 생긴 핑계일수록 오래갑니다.
하나 더 고백하면, 알아차린 뒤에도 한동안 말을 못 했습니다. 마음을 진료하는 사람이 마음이 지쳤다고 하면 자격이 없어 보일까 봐요. 헬스 트레이너가 허리를 다치면 숨기고 싶어지는 것과 비슷한 심리인데,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걱정입니다. 요리사도 감기에 걸리고, 치과의사도 충치가 생깁니다. 직업은 면역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을 많이 쓰는 직업일수록 마음이 닳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데, 저는 그 자연스러운 일을 오래 부끄러워했습니다. 부끄러움이야말로 치료가 늦어지는 가장 흔한 이유라고 진료실에서 매주 말하는 사람이 말입니다.
그 시절 제 진료가 엉망이었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할 일은 했습니다. 다만 지금의 제가 그때의 저를 평가하자면, 듣고는 있는데 조금 멀리서 듣는 의사였습니다. 마음이 비어 가는 사람의 특징이 있거든요. 냉소가 늘어납니다. 감동하는 데 힘이 드니까 심드렁한 게 효율적이어지는 겁니다. 냉소는 소진의 향수 같은 거라서, 본인만 자기한테서 그 냄새가 나는 걸 모릅니다. 저도 몰랐습니다.
지금 와서 제일 아프게 기억나는 신호는 따로 있습니다. 진료가 즐겁지 않아진 것. 저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이 일이 좋아서 이 과를 택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의 저는 하루의 진료를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 통과해야 하는 일로 대하고 있었습니다. 출근길에 오늘 하루의 두께를 가늠하며 한숨이 먼저 나오던 아침들. 좋아서 시작한 일이 견디는 일로 바뀌는 것, 그게 소진의 가장 정확한 정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번아웃이 정확히 무엇이고 우울증과는 어떻게 다른지는 따로 정리한 글이 있으니, 여기서는 개념 설명은 넘어가겠습니다.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개념이 아니라, 그걸 매일 설명하던 사람이 어떻게 자기 것만 못 봤는가 하는 이야기니까요.
바꾼 것들, 그리고 못 바꾼 것들
알아차린 계기를 극적으로 쓰고 싶은데, 사실 극적인 순간은 없었습니다. 벼락같은 깨달음보다는, 어느 날 제가 환자분들께 하는 조언을 문득 제삼자의 귀로 듣게 된 쪽에 가깝습니다. 쉬는 것도 치료라고 말하는 제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 처방을 정작 한 사람에게만 안 내리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한 사람이 처방전을 쓰는 사람이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고요.
그 뒤로 바꾼 것들이 있습니다. 대단한 건 없습니다. 일정에 여백을 만들었습니다. 빈틈없이 짜인 하루는 성실해 보이지만, 사실은 사고가 나기를 기다리는 시간표라는 걸 인정했습니다. 잠을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잠을 줄여서 버티는 건 버티는 게 아니라 무너지는 걸 할부로 바꾸는 것뿐이더군요. 혼자 삼키던 것들을 동료와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직업의 무게는 같은 무게를 들어 본 사람과 나눌 때 가장 확실하게 가벼워집니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면 도움을 받는다는 원칙을, 저 자신에게도 적용하기로 했습니다. 환자분들께는 늘 하던 말인데, 저에게 적용하는 데 그렇게 오래 걸렸습니다.
작은 의식도 하나 생겼습니다. 진료와 진료 사이에 잠깐 창밖을 보거나 물을 한 잔 마시는, 일 분이 안 되는 의식입니다. 앞사람의 이야기를 다음 사람에게 묻혀 가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환기이기도 하고, 제 숨을 한 번 고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별것 아닌 것 같지요. 그런데 하루 스무 번의 일 분은 생각보다 큽니다. 소진은 대개 큰 사건이 아니라 환기 없는 날들이 쌓여서 오는 것이라, 회복도 환기의 축적으로 옵니다. 극적인 긴 휴식보다 매일의 일 분이 저를 더 많이 살렸습니다.
휴가도 계획에서 예약으로 바꿨습니다. "언젠가 쉬어야지"는 제 경험상 한 번도 실행된 적이 없는 문장입니다. 날짜가 박히지 않은 휴식은 휴식이 아니라 희망 사항이더군요. 그래서 이제는 달력에 먼저 적습니다. 환자분들께 운동을 권할 때 "시간 나면 하세요"라고 하지 않고 요일과 시간을 정하자고 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자기한테 같은 처방을 내리는 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렸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좋아하던 것의 목록도 다시 썼습니다. 소진의 시절에 제일 먼저 버려지는 게 이 목록입니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하나씩 지우다 보면, 어느 날 일과 잠만 남은 일정표가 완성됩니다. 문제는 그 지운 목록이 사실 연료 탱크였다는 겁니다. 버리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채웠습니다. 거창한 것들이 아닙니다. 걷기, 음악,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는 저녁. 효율로 따지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시간들인데, 이 비생산적인 시간들이 나머지 전부를 지탱하고 있었다는 걸 이제는 압니다.
정직하게 덧붙이면, 지금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여백을 만들어 놓고 그 여백에 일을 채워 넣는 저를 여전히 발견하고, 바쁜 계절이 오면 잠부터 깎으려는 오래된 버릇이 고개를 듭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계기판을 자주 본다는 것 정도입니다. 요즘 냉소가 늘었나. 저녁에 말할 힘이 남아 있나. 좋아하던 게 여전히 좋은가. 이 세 개가 제 연료 경고등입니다. 불이 들어오면, 예전처럼 "그냥 피곤한 거야"라고 하지 않고 속도를 줄입니다. 대개는요. 가끔은 경고등을 보고도 조금 더 달립니다. 사람은 잘 안 바뀝니다. 정신과 의사도 사람이고요.
이 글을 여기까지 읽으신 분 중에는 누군가를 돌보고 있는 분이 적지 않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아픈 가족 곁을 지키는 분, 아이를 키우는 분, 남의 마음을 듣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분. 그런 분들이 진료실에 오시면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다들 자기 이야기를 하다가 꼭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래도 제가 힘들다고 하면 안 되죠, 저보다 힘든 사람이 있는데.
이 문장의 문법을 저는 잘 압니다. 저도 오래 썼거든요. "저보다 힘든 사람"은 언제나 있습니다. 그건 지구가 둥근 것처럼 항상 참이어서, 이 논리를 따라가면 지구에서 딱 한 사람을 빼고는 아무도 힘들다고 말할 수 없게 됩니다. 고통은 순위를 매겨서 배급하는 게 아닌데, 돌보는 사람들은 유독 자기 몫의 배급을 맨 뒤로 미룹니다.
그 말에 제가 요즘 드리는 대답을, 여기에도 적어 두겠습니다. 돌보는 사람의 연료가 비면 결국 두 사람이 넘어집니다. 그러니 자기를 돌보는 건 이기적인 게 아니라 돌봄의 일부입니다. 비행기 안내방송이 산소마스크를 본인 먼저 쓰라고 하는 건, 항공사가 이기주의를 권장해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혹시 지금, 쉬어도 쉰 것 같지 않은 상태가 몇 달째 이어지고 있다면, 그건 의지나 체력의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혼자 이름 붙이지 마시고 한번 들여다봐 주세요. 남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게 직업인 저도, 제 것은 남에게 보여주고 나서야 제대로 봤습니다.
돌보는 사람일수록 돌봄이 필요합니다. 이 문장을 저는 오래 남에게만 팔았습니다. 이제는 저도 삽니다. 가끔 할인해서 사려는 게 여전한 문제이긴 합니다만, 장바구니에 넣는 것과 계산까지 하는 것의 차이는 이제 압니다. 당신의 장바구니에도, 당신 몫의 돌봄이 하나쯤 담겨 있기를 바랍니다.
⚠️ 이 글은 정보 제공용입니다. 진단과 치료는 반드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 상의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