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강박장애 하면 SSRI를 먼저 떠올리지만, 그 문을 처음 연 약은 따로 있습니다. 클로미프라민, 국내 상품명은 그로민캡슐입니다(명인제약, 10mg·25mg). 해외에서는 아나프라닐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고요. SSRI가 나오기도 전인 시절, 강박이라는 난공불락의 병에 처음으로 효과를 증명해낸 약이죠. 미국에서 1989년, 강박장애 치료제로 처음 승인받은 것도 이 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원조는 요즘 진료실에서 좀 특이한 대접을 받습니다. 효능은 여전히 최고 수준인데, 정작 처음부터 꺼내지는 않거든요. 강하지만 조심스러운 약, 그래서 필요할 때를 위해 아껴 두는 카드. 왜 그렇게 됐는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강박장애 약물치료의 원조

클로미프라민은 삼환계 항우울제(TCA)입니다. 오래된 계열이죠. 그런데 이 약이 특별한 건, 같은 TCA 중에서도 세로토닌 재흡수를 억제하는 힘이 유독 강하다는 점입니다. 강박장애 치료의 핵심이 바로 세로토닌 계통에 작용하는 것이라, 이 약이 강박에 잘 들었던 겁니다.

그 효능을 증명한 고전적 연구가 1991년에 나왔습니다. 21개 기관에서 강박장애 환자 약 520명을 모아 진행한 대규모 이중맹검 연구였는데, 결과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강박 증상을 재는 Y-BOCS 점수가 클로미프라민 복용군에서는 38%와 44%(두 개의 연구)만큼 떨어진 반면, 위약군은 고작 3~5% 감소에 그쳤습니다1. 그전까지 마땅한 약이 없던 강박장애에 처음으로 확실한 무기가 생긴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SSRI보다 세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흔한 오해를 하나 짚어야 합니다. "원조이고 효능이 강하다니, 그럼 SSRI보다 센 약 아니야?" 아닙니다.

강박장애 치료법을 총망라한 2016년 네트워크 메타분석이 이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54개 시험, 6천여 명을 분석한 결과 "클로미프라민이 SSRI보다 낫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2. 효능은 서로 대등하다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왜 SSRI를 먼저 쓸까요. 답은 효과가 아니라 부작용과 안전에 있습니다. 효능이 비슷하다면, 견디기 편하고 더 안전한 쪽을 먼저 쓰는 게 당연하니까요.

같은 분석에서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이 나옵니다. 약보다 노출·반응방지(EX/RP)라는 심리치료의 효과가 더 컸다는 겁니다. 이걸 직접 비교한 연구를 볼까요.

강박장애 12주 치료반응률
노출·반응방지(EX/RP) 심리치료62%
클로미프라민42%
둘을 병합70%
위약8%

노출치료 단독이 약 단독보다 반응률이 높았고, 둘을 합쳤을 때가 가장 좋았습니다3. 강박장애에서 약은 중요한 도구이지만, 약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얼마씩 쓰나

용량 이야기를 조금 해두는 게 좋겠습니다. 이 약은 "적게 시작해 천천히 올린다"가 사실상 전부라고 해도 될 만큼, 올리는 속도가 중요한 약이라서요.

국내 허가사항에 적힌 성인 용법은 이렇습니다. 1일 10mg으로 시작해 점차 1일 30~150mg까지 올립니다. 나눠 먹거나, 익숙해진 다음에는 잠들기 전 한 번에 몰아 먹기도 합니다. 유지 용량은 1일 30~50mg 정도로 잡습니다. 고령자는 더 조심스럽게, 1일 10mg으로 시작해 30~50mg까지만 올리도록 적혀 있고, 성인 유지 용량의 절반만으로도 충분한 반응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는 문구까지 라벨에 들어 있습니다4.

그런데 강박장애 이야기로 넘어오면 숫자가 한 단계 올라갑니다. 앞에서 본 1991년 대규모 연구는 하루 최대 300mg까지, 2005년 노출치료 비교 연구는 하루 최대 250mg까지 썼습니다. 미국 허가사항도 강박장애에 대해 1일 25mg으로 시작해 첫 2주에 걸쳐 100mg까지(위장 부담을 줄이려 식사와 함께 나눠서), 이후 몇 주에 걸쳐 최대 250mg까지 올리도록 적어두고 있습니다5. 강박에 쓸 때는 우울증에 쓸 때보다 용량이 높아지는 게 일반적 이라는 뜻입니다. 국내 라벨은 효능·효과에 '강박상태'를 두고 있지만 강박에만 해당하는 용량을 따로 떼어 적지는 않았습니다.

어디에 적힌 숫자인가하루 용량
국내 허가 — 성인10mg으로 시작 → 30~150mg, 유지 30~50mg
국내 허가 — 고령자10mg으로 시작 → 30~50mg
미국 허가 — 강박장애 성인25mg으로 시작 → 2주에 100mg → 최대 250mg
강박 임상연구에서 실제로 쓴 용량최대 250~300mg (10~12주)

한 가지 더 알아두면 좋은 게 있습니다. 용량을 바꾼 뒤 몸속 약물 농도가 자리를 잡는 데 2~3주가 걸립니다. 그래서 미국 허가사항은 용량을 다시 조절하기 전에 2~3주를 두라고 권합니다. "2주 먹어봤는데 별로던데요"가 이 약에서는 이른 판단일 수 있는 이유죠. 그리고 이렇게 굳이 느리게 올리는 이유가, 바로 다음 이야기입니다.

위 숫자는 허가사항과 임상연구에 적힌 범위입니다. 실제 용량은 나이·체중·다른 약·간 기능 같은 것에 따라 달라지니, 스스로 올리거나 줄이는 기준으로 쓰지 마시고 처방한 의사와 상의하세요.

왜 부작용이 많을까

클로미프라민이 후순위로 밀린 결정적 이유는 부작용입니다. 그리고 그 부작용에는 구조적인 이유가 있어요. 이 약은 세로토닌과 노르에피네프린 재흡수만 막는 게 아니라, 아세틸콜린·히스타민·아드레날린 수용체까지 함께 차단합니다. 이 '곁다리' 작용들이 고스란히 부작용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흔한 것이 항콜린 계열 증상입니다. 입이 마르고, 변비가 생기고, 시야가 흐려지고, 소변보기가 불편해지죠. 여기에 진정과 졸음, 체중 증가, 성기능 저하, 그리고 일어설 때 어지러운 기립성 저혈압이 더해집니다. 발작 역치를 낮춰 경련 위험을 높이기도 합니다. SSRI라면 대개 없거나 훨씬 가벼운 부담들이, 이 약에서는 한꺼번에 몰려올 수 있는 겁니다.

무엇보다, 안전이 걸린 약

부작용이 불편함의 문제라면, 그다음은 생명의 문제입니다. 삼환계 항우울제의 가장 무서운 특징은 과량 복용 시 심장에 치명적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많은 양을 한꺼번에 삼키면 심장의 전기 신호가 교란돼 치명적인 부정맥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TCA 과량은 응급의학에서 오래 경계해온 위험입니다.

핵심 — 클로미프라민은 효능만 보면 최신 약에 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요즘 먼저 꺼내지 않는 이유는 딱 하나, 안전입니다. 과량 복용 시 심장에 치명적일 수 있어서, '강하지만 조심스러운 약'으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이 약을 쓸 때 임상의는 몇 가지를 챙깁니다. 필요하면 심전도(ECG)를 확인하고, 자살 위험이 높은 환자에게 다량을 한꺼번에 처방하는 것을 특히 조심합니다. 우울과 강박이 심한 사람일수록 과량의 위험도 함께 커지기 때문이죠. 또 우울증 치료에 쓰이는 MAOI 계열 약과는 절대 함께 쓰지 않습니다. 세로토닌증후군이라는 위험한 반응이 생길 수 있거든요. 갑자기 끊으면 반동 증상이 올 수 있어, 뺄 때도 천천히 줄여야 합니다.

강박 말고도 쓰이는 곳

클로미프라민의 무대가 강박장애만은 아닙니다. 국내 허가사항의 효능·효과를 그대로 옮기면 "진정이 요구되는 우울증, 강박상태, 공포상태, 수면발작과 관련된 급발작"입니다. 원래 항우울제인 만큼 우울장애에 쓰이고, 불안·공포가 앞서는 상태에도 씁니다.

흥미로운 건 마지막 항목입니다. '수면발작과 관련된 급발작', 즉 기면증에서 감정이 북받칠 때 갑자기 힘이 풀리는 탈력발작이 국내에서는 정식 허가된 용도로 들어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대개 우울증보다 낮은 용량을 씁니다. 재미있는 건 나라마다 다르다는 점인데, 미국 허가사항은 오히려 강박장애 하나만 적어두고 있어서 그쪽에서는 탈력발작이 허가 외 사용이 됩니다. 같은 약인데 나라별로 인정된 무대가 다른 셈입니다.

어른만의 약이 아닙니다 — 소아·청소년 강박

강박장애는 어릴 때 시작되는 경우가 많은데, 클로미프라민은 이 나이대에서도 일찍 근거를 쌓은 약입니다. 강박이 있는 아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8주 다기관 이중맹검 연구에서, 클로미프라민을 복용한 쪽은 강박 점수(Y-BOCS)가 약 37% 줄어든 반면 위약군은 8% 감소에 그쳤습니다6. 어른에게서 보이던 효과가 아이에게서도 재현된 셈입니다. 실제로 클로미프라민은 미국에서 10세 이상 소아의 강박장애에 허가된, 이 병에 쓸 수 있는 첫 약이기도 했습니다.

용량도 어른과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미국 허가사항은 10세 이상에서 1일 25mg으로 시작해, 첫 2주 동안 체중 1kg당 3mg 또는 1일 100mg 중 더 적은 쪽 까지 올리고, 이후 몇 주에 걸쳐 체중 1kg당 3mg 또는 1일 200mg 중 더 적은 쪽 까지 올리도록 적어두었습니다. 어른의 상한(250mg)보다 낮게 묶어둔 셈이고, 체중이라는 천장이 하나 더 걸려 있는 것이죠. 30kg인 아이라면 하루 90mg이 그 천장입니다.

다만 아이라고 부작용까지 순해지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자라는 심장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소아에서는 어른보다 더 조심스럽게 접근합니다. 치료 전과 용량을 올릴 때 심전도와 맥박·혈압을 확인하는 것이 권장되고, 요즘 소아 강박의 1차 치료가 약보다 인지행동치료(특히 노출·반응방지)인 것도 이런 안전상의 무게를 반영합니다. 약이 필요할 때도 대개 SSRI를 먼저 고려하고 클로미프라민은 그다음 카드로 두는 흐름은, 아이에게서 더 뚜렷합니다.

전문의 한마디

클로미프라민은 강박장애 치료의 원조이자, 지금도 SSRI가 듣지 않을 때 임상의가 믿고 꺼내는 카드입니다. 효능만 보면 최신 약에 결코 밀리지 않아요. 다만 입마름·변비·어지럼 같은 부담이 크고, 무엇보다 과량 시 심장에 치명적일 수 있어 '강하지만 조심스러운 약'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SSRI를 먼저 쓰고, 그다음 카드로 아껴 둡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강박장애는 약만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 노출·반응방지 치료를 병행할 때 가장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사실을, 이 약을 이야기할 때마다 함께 강조하고 싶습니다.

참고문헌

  1. Clomipramine Collaborative Study Group, 1991
  2. Skapinakis 등, 2016
  3. Foa 등, 2005
  4. 그로민캡슐 허가사항
  5. 미국 허가사항, DailyMed
  6. DeVeaugh-Geiss 등,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