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글을 상실의 한가운데서 열었다면, 먼저 이것부터. 자살예방 상담전화 109는 유가족의 전화도 받습니다. 24시간, 익명으로요. 글은 천천히 읽으셔도 됩니다.

어떤 장례식장에는 특유의 침묵이 있습니다. 조문객들은 사인을 묻지 않고, 상주는 말하지 않습니다. "갑자기 그렇게 됐어요"라는 문장이 오가고, 다들 더 캐묻지 않는 것으로 예의를 지킵니다. 위로의 말들이 오가지만 정작 가장 큰 이야기는 그 방에서 발화되지 않습니다. 남겨진 가족은 장례 첫날부터 배웁니다 — 이 죽음은 말해지지 않는 죽음이라는 것을.

자살 사별은 그렇게, 애도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다른 애도와 갈라집니다. 오늘은 그 갈라진 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위로만으로 채운 글이 아니라, 이 애도가 실제로 어떻게 다르고 무엇이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글입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닿는 범위

먼저 이 일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일인지부터. 오랫동안 "자살 한 건당 유족 여섯 명"이라는 어림값이 인용됐는데, 이 숫자를 실제로 재본 연구가 있습니다. 성인 1,736명을 무작위로 조사해 자살로 아는 사람을 잃은 경험을 물었더니, 자살 한 건이 평균 135명의 삶에 닿는다는 계산이 나왔습니다1. 가족만이 아니라 친구, 동창, 직장 동료, 이웃 — '그 사람을 알던 모든 사람'의 원이 그만큼 넓다는 뜻입니다.

한국에서 한 해 만 명 넘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사실에 이 배수를 곱해 보면, 자살 사별은 소수의 특수한 경험이 아니라 말해지지 않을 뿐 도처에 있는 경험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지금 이 글을 자기 이야기로 읽는 분이 통계적으로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애도는 무엇이 다른가

애도는 원래 무겁습니다. 그런데 자살 사별에는 다른 사별에 잘 없는 짐이 몇 개 더 얹힙니다. 진료실에서 유가족들을 만나며 반복해서 확인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왜"가 끝나지 않습니다. 병사에는 병명이, 사고사에는 사고 경위가 있어 "왜"가 언젠가 닫힙니다. 자살 사별의 "왜 그랬을까, 왜 몰랐을까, 왜 그날"은 답이 나올 수 없는 질문이라 닫히지 않고, 닫히지 않는 질문은 반추가 됩니다. 마지막 통화, 마지막 표정, 놓친 신호를 수백 번 되감는 것 — 유가족 대부분이 겪는, 이 애도의 표준 경로입니다.

죄책감이 애도 위에 겹쳐집니다. "내가 알아챘어야 했다"는 생각은 거의 보편적입니다. 여기서 하나만 짚어두겠습니다. 신호를 알아채는 법을 다룬 글이 있지만, 그 글의 존재가 "그러니 못 알아챈 사람의 잘못"을 뜻하지 않습니다. 신호는 대개 돌아본 뒤에야 신호로 보입니다. 위기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이 그것을 숨기는 데 얼마나 능한지, 그리고 그 순간의 결정이 얼마나 병의 논리 안에서 일어나는지를 아는 임상가로서 말할 수 있습니다 — 알아채지 못한 것은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낙인이 애도를 고립시킵니다. 장례식의 그 침묵이 이후의 삶으로 이어집니다. 사인을 말하면 상대가 어색해할까 봐, 고인이 판단당할까 봐, 가족이 수군거림의 대상이 될까 봐 말을 삼키고 — 말하지 못하는 애도는 위로받을 통로도 잃습니다. 다른 사별에서는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사회적 애도 장치(추모, 회고, "그 사람 참 좋았지"의 대화)가 여기서는 멈춰버립니다.

남겨진 사람 자신이 위험해집니다

이 무게들이 쌓인 결과는 통계에 나타납니다. 영국에서 가까운 이를 잃은 젊은 성인 3,432명을 조사했더니, 자살로 사별한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자연사로 사별한 사람들보다 본인의 자살 시도 위험이 1.65배 높았습니다2. 우울과 자살 사고도 더 흔했고, 도움을 덜 받고 있었습니다.

이 숫자를 두려움이 아니라 자격으로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자살 유가족은 "슬프지만 시간이 해결해줄 사람"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돌봄과 치료가 필요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 즉 도움을 청하는 일이 유난이 아니라 정당하다는 뜻입니다. 유가족의 우울, 무너진 잠, 끝나지 않는 반추, 그리고 "따라가고 싶다"는 마음까지도 — 전부 진료실에서 다뤄지는, 이름 있는 문제들입니다. 그 마음이 스치는 밤에는 글머리의 109가 유가족의 번호이기도 하다는 것을 기억해 주세요.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들

말할 수 있는 자리를 하나 만드는 것. 모든 사람에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 한 곳 — 판단 없이 사인까지 말할 수 있는 자리 — 이 있느냐 없느냐가 이 애도의 경로를 가릅니다. 자살 유가족 자조모임이 전국에서 열리고 있고(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이 지역별 모임을 안내합니다), 같은 상실을 겪은 사람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말이 되는" 경험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정신건강복지센터와 유가족 지원 프로그램도 무료로 연결됩니다.

애도에 시간표를 강요하지 않는 것. "이제 그만 잊어야지"는 이 애도에서 특히 무력한 말입니다. 목표는 잊는 게 아니라, 고인을 기억하면서도 삶이 다시 굴러가는 상태입니다. 몇 달이 지나도 일상이 시작되지 않고, 반추가 하루를 다 먹고, 잠과 식사가 계속 무너져 있다면 — 그건 시간이 부족한 게 아니라 치료가 필요한 애도일 수 있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이라면. 사인을 아는 사이라면, 피하지 않아도 됩니다. 유가족들이 가장 아프다고 말하는 건 서툰 위로가 아니라 사라지는 사람들 —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연락을 끊는 주변 — 입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네 생각이 나서 연락했어"면 충분합니다. 고인의 이름을 불러도 됩니다. 유가족은 그 이름을 잊은 적이 없어서, 불러주는 사람이 오히려 귀합니다.

위태로운 사람의 곁에 있는 분들을 위한 이야기는 \"혹시 죽고 싶은 생각까지 들어?\" — 이 질문, 해도 됩니다에서, 그리고 이 죽음들을 줄이기 위한 사회의 숙제는 청소년 자살률 절반 공약을 읽다에서 이어집니다.

참고문헌

  1. Cerel 등, 2019
  2. Pitman 등,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