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어쩌면 검색창에 차마 다 적지 못한 몇 글자를 지나 여기까지 오셨을 한 사람을 생각하며 씁니다. 가족을 자살로 잃는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저는 다 안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진료실에서 그 시간을 지나는 분들을 오래 만나 왔고, 그분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것들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 이 글은 정보 제공용입니다. 진단과 치료는 반드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 상의하세요. 지금 마음이 위태로우시다면 자살예방 상담전화 109(24시간)로 먼저 연락해 주세요.
이 애도는 다른 애도와 결이 다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은 언제나 무겁지만, 자살로 잃는 일에는 다른 죽음에는 없는 짐이 몇 개 더 얹힙니다.
첫째는 '왜'라는 질문입니다. 병으로 떠난 사람에게는 병명이라는 답이 있고, 사고로 떠난 사람에게는 사고 경위라는 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에는 끝내 완성되지 않는 물음표가 남습니다. 마지막 통화를 되감고, 며칠 전 표정을 되감고, 몇 년 전 대화까지 되감으면서 답을 찾으려는 밤이 이어집니다. 유족 연구들은 이 반복되는 질문 자체가 자살 사별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말합니다.
둘째는 죄책감입니다. '내가 그때 전화를 받았더라면', '그 말을 흘려듣지 않았더라면'. 이 문장들은 유족의 마음속에서 거의 예외 없이 재생됩니다.
셋째는 입을 다물게 만드는 시선입니다. 다른 죽음 앞에서는 조문이 오고 위로가 오는데, 이 죽음 앞에서는 사람들이 말을 고르다 멀어지고, 유족은 사인을 얼버무리게 되고, 그렇게 애도가 숨어듭니다. 자살 사별에 관한 연구 57편을 모아 검토한 결과에서도, 자살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다른 죽음으로 잃은 사람들보다 거절감과 수치심을 더 많이 겪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1.
여기에 하나 더, 이 애도에는 충격의 층이 겹쳐 있습니다. 예고 없이, 준비할 시간 없이 닥친 상실이라서 마음은 슬픔과 동시에 충격 반응을 함께 치릅니다. 그래서 유족들은 슬픔만이 아니라 멍함을 호소합니다. 장례를 어떻게 치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고, 몇 주가 안개 속처럼 지나가고, 잠들면 같은 장면이 반복되고, 전화벨 소리에 심장이 내려앉습니다. 몸도 함께 앓아서 불면과 소화 문제, 이유 없는 통증이 따라오는 일이 흔합니다. 혹시 지금 그런 상태라면, 그것은 이상해진 것이 아니라 큰 충격을 받은 마음이 보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는 것을 알아 두세요.
가족 안에서도 애도의 속도와 모양은 서로 다릅니다. 한 사람은 매일 이야기하고 싶어 하고, 다른 사람은 입에 올리는 것조차 힘들어합니다. 한 사람은 일에 파묻히고, 다른 사람은 아무것도 못 합니다. 그 차이를 두고 '당신은 슬프지도 않냐', '언제까지 그럴 거냐'는 말이 오가며 남은 가족끼리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생깁니다. 애도에 올바른 한 가지 방식은 없습니다. 서로의 속도가 다르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 두 번째 상처의 상당 부분은 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짐들은 마음의 건강을 실제로 깎아냅니다. 덴마크에서 성인 인구 전체의 기록을 수십 년에 걸쳐 추적한 연구가 있습니다. 배우자를 자살로 잃은 사람이 1만 5천 명 넘게 포함된 자료였는데, 이들은 사별 후 5년 안에 우울증 같은 정신건강 문제를 새로 진단받을 위험이 일반 인구의 두 배 가까이였고, 다른 원인으로 배우자를 잃은 사람들과 비교해도 더 높았습니다2. 앞의 검토 연구에서는 자녀를 잃은 부모, 부모를 잃은 자녀에게서도 각기 다른 모양의 위험이 확인됐습니다.
이 숫자들을 적는 이유는 겁을 드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반대입니다. 지금 당신이 무너져 있는 것은 당신이 약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종류의 상실을 통과하는 중이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이것이 개인의 의지 문제가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상태라는 것이 연구로 확인된 사실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막을 수 있었다"는 생각의 함정
유족을 가장 오래 붙잡는 문장은 아마 이것일 겁니다. '나는 막을 수 있었다.'
이 문장이 왜 그렇게 그럴듯하게 느껴지는지부터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심리학에서 사후 확신 편향이라고 부르는 마음의 습관이 있습니다. 결과를 알고 난 뒤에 과거를 돌아보면, 그 결과로 이어지는 단서들만 굵은 글씨처럼 도드라져 보이는 현상입니다. 지나고 나서 보면 모든 것이 신호였던 것 같고, 그래서 '그걸 못 본 나'가 유죄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를 알고 난 뒤에만 그릴 수 있는 지도입니다. 그날의 당신은 지금 당신이 아는 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위로의 말이 아니라 이 분야의 정직한 결론이기도 합니다. 훈련받은 전문가들이 온갖 정보를 갖고도 한 사람의 마지막 선택을 미리 짚어내는 일은 지독하게 어렵다는 것이 반복 연구의 결과입니다. 전문가도 못 하는 예측을 해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재판에 세우는 것은, 공정한 재판이 아닙니다.
죄책감은 사랑의 다른 얼굴이라서 아마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그 무게가 삶을 계속 누르고 있다면, 그것을 혼자 짊어지는 것이 고인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하지는 말아 주세요.
죄책감 옆에는 종종 말하기 더 어려운 감정이 하나 숨어 있습니다. 고인에 대한 분노입니다. 어떻게 나를 두고, 아이들을 두고, 아무 말도 없이. 이 분노가 올라올 때 유족들은 그런 마음을 품은 자신을 다시 벌합니다. 죽은 사람에게 화를 내다니 내가 나쁜 사람인가 하고요. 아닙니다. 사랑하던 사람에게 남겨진 사람이 분노를 느끼는 것은 애도의 정상적인 일부이고, 분노와 그리움은 한 마음 안에 얼마든지 공존합니다. 그 감정이 올라온다고 해서 사랑이 거짓이 되는 것도, 애도가 잘못 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왜'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한마디 보태고 싶습니다. 그 질문은 아마 오래 당신 곁에 머물 겁니다. 그런데 자살은 대개 한 가지 이유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오래 앓아 온 마음의 병, 그 병이 생각을 좁혀 놓는 방식, 겹친 사정들. 여러 갈래가 한 지점에 모인 결과라서, 한 문장짜리 답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언젠가, 완성된 답 대신 질문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되더라도 그것을 포기라고 여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많은 유족이 결국 그 지점에 닿았다고, 그리고 그래도 살아진다고 말합니다.
애도 초기의 실무적인 당부도 몇 가지 적어 둡니다. 가능하다면 큰 결정은 미루세요. 이사, 퇴직, 유품 정리 같은 되돌리기 어려운 결정은 마음이 충격 속에 있는 동안 내리기에 좋은 결정이 아닙니다. 유품은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몇 달이고 그대로 두었다가 준비가 되었을 때 정리해도 늦지 않고, 그 준비는 사람마다 몇 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몸을 챙기는 일을 사치라고 여기지 마세요. 하루 세 번은 아니어도 무언가를 먹는 것, 씻는 것, 잠자리에 드는 것. 애도의 시기에 이것들은 당연한 일이 아니라 매일의 과제이고, 해내고 있다면 이미 잘하고 계신 겁니다.
시간에 대해서도 미리 말씀드립니다. 애도는 직선으로 나아지지 않습니다. 괜찮아진 줄 알았다가 기일이나 생일, 명절, 고인이 좋아하던 계절 앞에서 다시 무너지는 날이 옵니다. 그 매듭의 날들은 원래 그렇습니다. 미리 달력을 보고, 그날은 혼자 있지 않을 계획을 세워 두는 것이 실제로 도움이 됩니다.
곁에 있는 분들께도 몇 가지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유족 앞에서 하기 쉬운 실수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원인을 캐묻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대?", "혹시 짐작 가는 게 있어?" 같은 질문은 호기심에게는 자연스러워도 유족에게는 심문이 됩니다. 다른 하나는 정반대로, 어색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인의 이름을 꺼내면 상처가 될까 봐 피하는 침묵은, 유족에게는 '그 사람의 존재가 지워지는 일'로 겪어집니다. 필요한 것은 설명도 침묵도 아니고, 고인을 평범하게 기억해 주는 말과 오래 곁에 있어 주는 일입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래도 네 곁에 있고 싶어"라는 서툰 고백이, 잘 고른 위로의 문장보다 낫습니다. 밥을 한 끼 같이 먹자고 하고, 장을 대신 봐 주고, 아이 하원을 맡아 주는 구체적인 손이 말보다 멀리 갑니다. 그리고 "요즘 어떻게 지내"라는 안부를 석 달 뒤에도, 일 년 뒤에도 물어봐 주는 사람이 유족에게는 가장 귀합니다. 조문객이 다 돌아간 뒤의 시간이 진짜 긴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집에 아이가 있다면, 아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말할지도 무거운 숙제가 됩니다. 원칙만 말씀드리면, 아이의 나이에 맞는 말로, 거짓말은 하지 않되 자세한 경위는 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죽음을 숨기거나 꾸며낸 설명으로 덮으면 아이는 언젠가 다른 경로로 알게 되고, 그때 어른에 대한 신뢰까지 함께 잃습니다. "많이 아팠던 마음의 병 때문에 돌아가셨어" 정도의 정직하고 단순한 문장에서 시작해, 아이가 묻는 만큼만 답해 가면 됩니다. 그리고 아이에게도 분명히 말해 주세요. 네 잘못이 아니라고. 아이들은 어른이 상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자기를 탓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혼자 견디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구호가 아니라 실제로 갈 곳이 있다는 뜻입니다. 같은 상실을 겪은 사람들이 모이는 유족 자조모임이 있습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꺼낼 수 없던 이야기를 처음으로 소리 내어 말해 본 곳이 그 자리였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무 설명 없이도 서로를 이해하는 사람들 곁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숨이 쉬어진다고들 합니다. 준비가 되기 전에는 말하지 않고 듣기만 해도 됩니다.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와 자살예방센터를 통해 유족 상담과 모임을 안내받을 수 있고, 자살예방 상담전화 109는 유족에게도 24시간 열려 있습니다. 애도가 길어지며 잠, 식사, 일상이 무너지고 있다면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는 것도 미루지 마세요. 슬픔은 치료의 대상이 아니지만, 슬픔이 병이 되어가는 길목은 치료가 막아줄 수 있습니다. 몇 달이 지나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이어질 때, 술이 조금씩 늘고 있을 때, 그리고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스칠 때. 그때가 미루지 말아야 할 때입니다. 위기의 신호를 알아보는 법은 자살 경고신호와 도움받는 법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위로랍시고 건네지는 말들에 대해서도 미리 방패를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이제 그만 잊어", "네가 정신 차려야지". 이런 말들에 베인 상처를 안고 진료실에 오는 유족이 많습니다. 그 말들은 대개 악의가 아니라 무지에서 나오지만, 상처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말을 들은 날, 그 말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계시면 됩니다. 애도는 잊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고, 당신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통과하는 중입니다. 말의 화살이 날아올 자리마다 이 문장을 세워 두세요.
마지막으로 당부를 남깁니다. 애도에는 정해진 속도도, 통과해야 할 관문도 없습니다. 어느 날 웃었다고 죄스러워하지 마시고, 어느 날 다시 무너졌다고 후퇴라고 여기지 마세요. 그 사람을 잊는 것이 회복이 아니라, 그 사람을 기억한 채로 살아지는 날이 하루씩 늘어나는 것이 회복입니다. 좋은 기억이 아픔보다 먼저 떠오르는 날도, 아주 천천히, 옵니다. 부디 오래 걸리셔도 됩니다. 다만 혼자는 마세요. 이 글이 그 긴 길의 어느 하루에, 작은 손잡이 하나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