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만큼 성숙해진다." "죽지 않을 만큼의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위로의 자리에서 흔히 오가는 말입니다. 노래 가사에도 있고, 졸업 축사에도 있고, 병문안 자리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정작 큰일을 겪은 당사자 앞에서 하면, 공기가 싸늘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러니까 이 고통에 감사하라는 거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말한 사람은 희망을 건넸다고 생각하고, 들은 사람은 숙제를 받았다고 느끼는, 위로 중에서도 유독 어긋나기 쉬운 말입니다.

이 통념은 어제오늘의 것이 아닙니다. 니체의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부터, 고난이 인격을 단련한다는 각종 종교 전통의 가르침까지,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고통에 교육적 의미를 부여해 왔습니다. 어쩌면 그래야 견딜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흥미로운 것은, 심리학이 이 오래된 통념을 정말로 저울에 올려봤다는 점입니다. 상처가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말은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 폭력이 되는가. 이 질문에는 30년 가까이 쌓인 연구가 있고, 답은 생각보다 섬세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말은 절반만 맞고, 그 절반마저 쓰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약이 되기도 독이 되기도 합니다.

⚠️ 이 글은 정보 제공용입니다. 진단과 치료는 반드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 상의하세요.

'성장'은 감상이 아니라 측정의 대상이 됐습니다

1996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 샬럿 캠퍼스의 심리학자 리처드 테데스키와 로렌스 칼훈은 이 통념에 이름과 자를 만들어 붙였습니다. 이름은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 PTG), 자는 21개 문항짜리 외상 후 성장 척도(PTGI)입니다1.

두 사람이 이 개념에 이르게 된 경위가 흥미롭습니다. 사별한 사람들, 큰 사고와 병을 겪은 사람들을 오래 면담하다 보니, 고통을 호소하는 이야기 사이사이에 이상한 문장들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 일이 없었다면 몰랐을 것들을 알게 됐다"는 류의 문장들입니다. 사건 자체를 다행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일이 없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누구든 돌아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일과 씨름한 시간이 자신을 어딘가 바꿔놓았다고들 했습니다. 두 심리학자는 이 반복되는 목소리에 이름이 필요하다고 봤고, 그것이 재어질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이 척도는 사람들이 큰일을 겪은 뒤 보고하는 긍정적 변화를 다섯 갈래로 나눕니다.

1. 새로운 가능성: 예전에는 없던 길이 보인다. 삶의 우선순위가 재편된다. 2. 대인관계의 깊어짐: 누가 진짜 내 사람인지 알게 됐다. 타인의 고통에 더 공감하게 됐다. 3. 개인적 강인함: 이걸 겪어냈으니 웬만한 일은 감당할 수 있겠다는 감각. 4. 영적·실존적 변화: 삶과 죽음, 의미에 대한 질문이 깊어진다. 5. 삶에 대한 감사: 평범한 하루의 값어치가 달라진다.

문항은 이런 식입니다.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내가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루하루를 더 감사히 여기게 됐다." 응답자는 각 문장에 대해 그 사건의 결과로 자신이 얼마나 변했는지를 매깁니다.

개발 연구에서 이미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실제로 큰 사건을 겪은 사람들이 겪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많은 긍정적 변화를 보고했고, 여성이 남성보다 성장을 더 많이 보고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즉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은 적어도 완전한 허구는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스스로의 입으로, 상처 이후의 성장을 이야기합니다.

오해를 막기 위해 분명히 해둘 것이 있습니다. 외상 후 성장이라는 개념은 사건이 좋은 일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장의 출처는 사건이 아니라, 사건이 무너뜨린 세계를 다시 세우려는 그 사람의 씨름입니다. 지진이 도시를 부순 뒤 더 튼튼한 건물이 올라갔다면, 공은 지진이 아니라 다시 지은 사람들에게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여기서 단어 하나를 정확히 짚고 가야 합니다. 이 척도가 재는 것은 성장 그 자체가 아니라 "성장했다고 스스로 느끼는 정도"입니다. 본인의 보고와 실제 변화 사이에 틈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이 분야 연구자들 스스로 인정하는 한계입니다. 사람의 기억은 '그때의 나'를 실제보다 못났던 것으로 그려서 지금의 변화를 크게 느끼게 만들기도 하고, 반대로 정말 달라진 사람이 그 변화를 당연하게 여겨 낮게 매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외상 후 성장 연구는 "사람은 고통으로 단련된다"는 증명이라기보다, "많은 사람이 고통 이후 자기와 세상을 다시 쓰게 된다"는 관찰에 가깝습니다. 저는 이 구분이 오히려 이 개념을 더 쓸모 있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증명이 아니라 관찰이기에, 누구에게도 의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성장을 말할까요

그렇다면 큰일을 겪은 사람 가운데 몇이나 의미 있는 수준의 성장을 보고할까요. 중국 중난대학 연구진이 이 질문에 대한 연구 26편을 모아 합산한 결과가 있습니다2.

합쳐 보니, 외상적 사건을 경험한 사람 100명 중 52~53명이 중간 이상 수준의 외상 후 성장을 보고했습니다. 대략 절반입니다. 다만 연구마다 편차가 컸습니다. 낮게는 100명 중 10명, 높게는 100명 중 77명까지, 어떤 사람들을 어떤 시점에 조사했느냐에 따라 크게 출렁였습니다. 이 메타분석에서는 60세보다 젊은 사람, 사건을 직접 겪은 사람, 소방관이나 참전 군인처럼 위험을 업으로 마주하는 직군에서 성장 보고가 더 많은 경향이 관찰됐습니다.

편차가 크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답이기도 합니다. 성장은 사건의 종류, 겪은 지 얼마나 됐는지, 그 사람이 어떤 자원과 관계 속에 있는지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조건이 많이 붙는 현상이라는 뜻입니다. 겪은 직후의 조사와 몇 년 뒤의 조사가 같은 그림을 보여줄 리 없고, 병을 이겨내는 과정과 재난에서 살아남은 과정이 같은 성장을 낳을 리도 없습니다. "고통은 사람을 성장시킨다"라고 한 문장으로 눌러 담기에는, 실제 데이터가 훨씬 다채롭습니다.

이 숫자들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두 가지가 동시에 참입니다.

첫째, 성장은 예외적인 미담이 아닙니다. 절반가량이 보고할 만큼 흔한, 인간의 꽤 보편적인 반응입니다. 상처 이후에 삶이 더 깊어졌다고 느끼는 분이 있다면, 그것은 부정도 착각도 아니라 잘 기록된 현상입니다.

둘째, 성장은 보편적 법칙도 아닙니다. 절반가량은 그런 변화를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큰일을 겪고도 성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역시 절반의 사람들이 걷는 평범한 경로입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가 틀리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아픔은 성숙의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고통과 성장은 시소가 아니라 동행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습니다. 성장을 보고하는 사람들은 고통이 끝난 사람들일까요. 성장했다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증상은 없어야 할까요.

호주 퀸즐랜드공과대학 연구진이 이 관계를 다룬 연구 42편, 총 11,469명의 자료를 합산해 분석했습니다3. 결과는 통념을 두 번 뒤집습니다.

우선, 외상 후 성장과 PTSD 증상은 서로 반대말이 아니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성장한 사람일수록 증상이 적어야 할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오히려 성장을 많이 보고하는 사람들이 고통도 함께 겪고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둘의 관계는 단순한 직선보다 곡선으로 그렸을 때 더 잘 들어맞았습니다. 고통이 늘어나는 만큼 성장이 비례해서 늘어나는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연구진의 결론은 명확합니다. 외상 이후의 긍정적 결과와 부정적 결과는 공존할 수 있으며, 치료자가 증상에만 초점을 맞추면 회복을 늦추고 성장의 가능성을 가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고통과 성장이 함께 갈까요. 이론가들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성장이 일어나려면 먼저 기존의 세계관이 흔들려야 합니다. '세상은 대체로 안전하다', '성실하면 나쁜 일은 비껴간다' 같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딛고 서 있던 가정들이 무너져야, 그것을 다시 짓는 작업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세계관이 흔들리는 경험이 바로 고통의 정체이기도 합니다. 같은 지진이 무너뜨리기도 하고 다시 짓게도 하는 셈이라, 둘은 한 뿌리에서 나옵니다. 흔들림이 전혀 없으면 다시 지을 것도 없고, 흔들림이 감당할 수준을 넘으면 다시 지을 힘이 남지 않습니다. 성장의 이야기가 대개 '무너짐의 이야기'와 한 몸인 이유입니다.

이 결과는 진료실의 감각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상실이나 사고를 겪은 분들을 만나다 보면, 삶이 깊어졌다는 말과 여전히 밤마다 무너진다는 말이 한 사람의 입에서 같은 날 나오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 성장은 고통이 걷힌 자리에 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씨름하는 과정 그 자체에서 자라나는 것에 가깝습니다. 애초에 테데스키와 칼훈이 말한 성장도 '고통의 부재'가 아니라 '흔들린 세계관을 다시 짓는 작업의 부산물'이었습니다.

같은 이유로, 외상 후 성장은 PTSD와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PTSD 진단을 받고 치료 중인 사람이 동시에 깊은 성장을 보고할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성장했다면서 왜 아직도 아프냐"는 질문과 "아직도 아픈데 무슨 성장이냐"는 질문은 둘 다 같은 오해, 즉 고통과 성장을 시소의 양 끝으로 보는 오해에서 나옵니다. 데이터가 보여주는 그림은 시소가 아니라, 같은 길을 함께 걷는 두 동행입니다.

그래서 '성장 강요'가 문제가 됩니다. 아직 무너져 있는 사람에게 "이 일로 더 강해질 거야", "다 뜻이 있어서 겪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위로의 모양을 한 숙제 부과입니다. 듣는 사람은 고통에 더해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까지 떠안게 됩니다. 진료실에서도 이런 이중의 무게를 지고 오는 분들을 만납니다. 힘든 것도 힘든데, 이만큼 겪었으면 뭔가 깨달아야 하는 것 아니냐며 스스로를 다그치는 분들이지요. 그 다그침은 회복에 보태지는 것이 없습니다.

주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오히려 단순합니다.

  • 성장을 예언하지 않기. "더 강해질 거야" 대신 "지금 많이 힘들겠다"로 충분합니다.
  • 의미를 대신 찾아주지 않기. 의미는 본인이, 본인의 속도로 찾는 것입니다.
  • 성장이 보이더라도 채점하지 않기. "거봐, 그 일 덕분에 이렇게 컸잖아"는 사건을 미화하는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 그냥 곁에 있기. 외상 후 성장 연구에서 성장의 갈래 중 하나가 '관계의 깊어짐'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곁에 있어 주는 일은 생각보다 큰일입니다.

절반의 사람들은 성장을 보고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성장을 보고하는 사람들조차 고통과 함께 그 길을 걷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우리가 건넬 수 있는 더 정직한 말은 이런 것입니다. "그 일을 겪고도 오늘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 충분하다."

치료와의 관계도 같은 원리입니다. 심리치료는 성장을 목표로 내걸지 않습니다. 치료의 과녁은 증상을 덜고 일상을 되찾는 것이고, 성장은 그 과정에서 따라오기도 하고 안 오기도 하는 부산물입니다. 목표로 삼는 순간 성장은 또 하나의 성취 압박이 되고, 압박은 외상 회복의 가장 나쁜 동반자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지금 상처의 한가운데에 계시다면, 성장은 목표 목록에서 지우셔도 됩니다. 그것은 애쓴다고 오는 것도, 안 온다고 실패인 것도 아니고, 온다면 대개 한참 뒤에 뒤돌아봤을 때에야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의 할 일은 성숙이 아니라 그저 오늘을 넘기는 것이고,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장은 고통의 보상이 아니라, 살아낸 시간의 흔적입니다.

참고문헌

  1. Tedeschi & Calhoun, Journal of Traumatic Stress, 1996
  2. Wu 등, Journal of Affective Disorders, 2019
  3. Shakespeare-Finch & Lurie-Beck, Journal of Anxiety Disorders,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