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의 부엌을 상상해 보겠습니다. 낮에는 샐러드와 닭가슴살로 완벽하게 버텼습니다. 저녁도 반 공기만 먹고 잘 넘겼어요. 그런데 지금, 불도 안 켠 부엌에서 냉장고 문을 열고 서 있습니다. 그다음 30분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빵, 시리얼, 어제 남은 치킨, 아이스크림. 배가 아플 때까지 먹고 나서야 멈추고, 그다음에 오는 건 포만감이 아니라 수치심입니다. 내일은 더 독하게 굶어야지.

이 장면을 들고 진료실에 오시는 분들은 거의 예외 없이 같은 말을 합니다. "제가 의지가 너무 약해서요." 오늘은 이 문장이 왜 틀렸는지를, 그리고 이 문장이 틀렸다는 걸 아는 것이 왜 치료의 절반인지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굶긴 뇌는 반드시 반격합니다 — 80년 전에 확인된 사실

절식이 폭식을 만든다는 건 이론이 아니라 실험으로 확인된 사실입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에요.

1944년 미국 미네소타 대학에서, 건강한 젊은 남성 36명에게 6개월 동안 먹는 양을 절반 가까이 줄이는 실험을 했습니다. 전쟁 후 기아 구호를 설계하기 위한 연구였죠. 결과는 연구진의 예상을 벗어났습니다. 참가자들은 단순히 마르기만 한 게 아니라, 음식에 사로잡혔습니다. 하루 종일 요리책을 읽고, 레시피를 수집하고, 식사 시간이 다가오면 안절부절못했습니다. 그리고 제한이 풀리자 상당수가 배가 터질 듯이 먹고도 허기가 가시지 않는, 통제를 잃은 폭식을 겪었습니다. 멀쩡하던 사람들이요.

이 실험이 보여주는 건 단순합니다. 뇌는 절식을 '다이어트'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기근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기근에 대한 뇌의 대응은 정해져 있습니다 — 음식 생각을 늘리고, 먹을 기회가 오면 최대한 밀어 넣게 만드는 것. 낮에 독하게 굶은 날일수록 밤의 폭식이 거센 건 의지가 무너진 게 아니라, 생존 프로그램이 예정대로 작동한 겁니다.

그래서 폭식 뒤에 "내일은 더 굶어야지"라고 결심하는 순간이 사실 가장 위험합니다. 그 결심이 다음 폭식의 예약이거든요. 절식 → 폭식 → 수치심 → 더 독한 절식. 이 바퀴는 의지로 멈추는 게 아니라, 절식이라는 축을 빼야 멈춥니다.

가장 흔한 섭식장애인데, 가장 늦게 병원에 옵니다

폭식장애라는 진단명이 낯설게 들리실 수 있습니다. 거식증이나 폭식 후 토하는 신경성 폭식증은 들어봤어도요. 그런데 숫자로 보면 순서가 뒤집힙니다.

미국에서 9,282명을 면접 조사한 전국 연구에서, 평생 폭식장애를 겪는 비율은 여성 100명 중 3~4명, 남성 100명 중 2명이었습니다. 거식증(여성 100명 중 1명 미만)의 서너 배, 신경성 폭식증의 두 배가 넘는, 섭식장애 중 가장 흔한 진단입니다1. 남성 비율이 상당하다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섭식장애를 '마른 몸을 원하는 젊은 여성의 병'으로만 그리는 통념과 달리, 폭식장애는 성별과 나이를 훨씬 덜 가립니다.

그런데 가장 흔한 이 병이 진료실에는 가장 늦게 도착합니다. 이유는 두 겹입니다. 하나는 본인이 이걸 병이 아니라 성격 결함으로 여기기 때문이고 — "먹는 걸 못 참는 게 무슨 병이에요" — 다른 하나는 토하거나 심하게 마르는 것 같은 겉으로 보이는 신호가 없어서 주변도 모르고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수년, 길게는 십수 년을 혼자 앓다가, 폭식이 아니라 우울이나 불면으로 진료실에 와서야 뒤늦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식과 폭식장애는 어디서 갈리나

명절에 배 터지게 먹는 것, 스트레스 받은 날 치킨 한 마리를 해치우는 것 — 이건 폭식장애가 아닙니다. 갈림길은 양이 아니라 통제감과 괴로움에 있습니다.

  • 먹는 동안 멈출 수 없다는 느낌이 든다 — 배가 불러도, 아파도 계속 먹는다
  • 남들 앞에서는 안 먹고, 혼자 있을 때 빠른 속도로 먹는다
  • 먹고 나서 심한 자기혐오·우울·죄책감이 따라온다
  • 이런 일이 주 1회 이상, 몇 달째 반복된다
  • 토하거나 변비약을 쓰지는 않는다 (쓴다면 신경성 폭식증 쪽을 봐야 합니다)

핵심은 세 번째와 네 번째입니다. 즐거워서 많이 먹는 사람은 폭식장애가 아닙니다. 괴로운데 반복되고, 그 괴로움이 삶을 잠식하고 있다면 — 그때는 식습관 문제가 아니라 치료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치료는 "덜 먹기"가 아니라 "거르지 않기"에서 시작합니다

여기가 가장 직관에 반하는 대목입니다. 폭식 치료의 표준인 인지행동치료가 첫 단계에서 시키는 일은 식사량 줄이기가 아니라 규칙적으로 먹기입니다. 아침을 거르지 않고, 서너 시간 간격으로 하루 세 끼와 간식을 계획해서 먹는 것. 폭식하는 사람에게 더 먹으라니 이상하게 들리지만, 위에서 본 미네소타 실험을 떠올리면 논리가 보입니다. 폭식의 연료가 굶주림이라면, 연료 공급을 끊는 방법은 굶지 않는 것뿐입니다. 실제로 규칙적인 식사가 자리 잡는 것만으로 폭식 빈도가 뚝 떨어지는 분들이 많습니다.

약물 선택지도 있습니다. 성인 폭식장애 환자 255명을 대상으로 한 무작위 시험에서, 리스덱스암페타민을 복용한 쪽은 4주간 폭식이 완전히 멈춘 비율이 절반이었고, 가짜약을 받은 쪽은 다섯 중 하나였습니다2. 이 약은 폭식장애에 대해 미국 FDA 승인을 받은 유일한 약입니다. 다만 각성제 계열이라 아무에게나 쓰는 약은 아니고, 우울이나 불안이 폭식의 방아쇠 역할을 하고 있다면 그쪽을 함께 다루는 게 순서입니다.

그리고 진료실에서 제가 가장 공들이는 건 사실 약도 식사 계획표도 아닙니다. "의지가 약해서"라는 문장을 내려놓게 하는 일입니다. 이 문장을 쥐고 있는 한 폭식은 매번 도덕적 실패가 되고, 실패의 수치심은 다음 폭식의 가장 확실한 방아쇠거든요. 굶긴 뇌의 정상 반응이었다는 걸 받아들이는 순간, 수치심 칸이 비고 그 자리에 계획이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밤 해볼 수 있는 것 하나

거창한 결심 대신 하나만 제안하겠습니다. 내일 아침을 거르지 마세요. 어젯밤에 폭식했더라도, 아니 폭식했다면 더더욱요. "어제 그렇게 먹었으니 오늘은 굶어야지"가 바퀴를 다시 돌리는 페달이라는 것, 그게 오늘 글에서 하나만 가져가실 문장입니다.

그리고 위의 갈림길 목록에서 서너 개가 몇 달째 해당된다면, 이건 혼자 식단으로 씨름할 일이 아니라 진료실에서 다룰 일입니다. 섭식장애가 왜 그냥 두면 안 되는 병인지는 섭식장애는 다이어트의 연장이 아닙니다에서 이어집니다.

참고문헌

  1. Hudson 등, 2007
  2. McElroy 등,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