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점수는 "병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전문가가 한 번 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답은 "네, 가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인데, 그 이유가 점수가 곧 진단이어서가 아니라는 점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가검사는 체온계가 아니라 그물입니다. PHQ-9 우울 검사나 GAD-7 불안 검사는 진료실에서도 실제로 쓰는 검사지만, 용도는 '놓치지 않기'입니다. 우울증이 있는 사람을 최대한 걸러내도록 설계돼 있어서, 실제로는 우울증이 아닌 사람도 꽤 걸립니다. 몸이 아프거나, 며칠 잠을 못 잤거나, 큰일을 겪은 직후에는 누구나 점수가 올라갑니다. 반대로 점수가 낮다고 병이 없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상태의 우울은 문항에 잘 잡히지 않습니다. 성인 ADHD 자가검사는 특히 그렇습니다. 불안, 우울, 수면 부족, 번아웃이 모두 주의력 문제로 나타나기 때문에, 양성이 나온 사람 중 실제 ADHD로 진단되는 비율은 생각보다 낮습니다. 자가진단 양성이 뜻하는 것에 자세히 적어 두었습니다.
그럼 병원에서는 무엇을 더 보나요. 점수 뒤에 있는 이야기를 봅니다. 언제부터였는지, 계기가 있었는지, 예전에도 그랬는지, 잠과 식사와 일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갑상선 같은 몸의 문제는 없는지, 술이나 다른 약은 없는지. 같은 15점이라도 3주째 이어지는 15점과 어제 실연당한 15점은 다른 문제이고, 그 구분이 진료의 일입니다. 그래서 자가검사 결과를 들고 오시는 것은 진료에 도움이 됩니다. "어디가 힘든지" 대신 문항 단위로 이야기가 시작되니까요.
점수보다 먼저 봐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울 검사의 마지막 문항, 죽고 싶다는 생각에 관한 항목입니다. 다른 문항이 어떻든 이 문항에 체크했다면 총점과 무관하게 빨리 진료를 받으시길 권합니다. 지금 위태롭다면 병원 예약보다 먼저 자살예방 상담전화 109(24시간)로 연락하세요.
"이 정도로 병원에 가도 되나"라는 망설임에 대해. 진료실에서 가장 자주 듣는 말 중 하나가 "제가 올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입니다. 자가검사 점수가 높아서 왔다는 것은 충분한 이유이고, 와서 "아직은 지켜봐도 됩니다"라는 말을 듣고 가는 것도 진료의 정상적인 결과입니다. 그 말을 들으러 오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다. 첫 정신과 방문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미리 알고 가시면 문턱이 조금 낮아집니다.
점수가 높은데 병원은 아직 망설여진다면, 2주 뒤에 같은 검사를 한 번 더 해 보세요. 그대로이거나 올라갔다면 그때는 미루지 않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검사 결과를 화면 캡처해 두시면 두 시점을 비교할 수 있고, 진료 때 그 두 장을 보여 주시는 것만으로 "언제부터, 얼마나"라는 질문의 절반이 답해집니다. 온라인에 도는 이름 모를 검사보다 진료실에서 실제로 쓰는 검사지를 고르시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 사이트의 검사들은 모두 그 기준으로 골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