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연을 당한 친구가 애써 태연하게 말합니다. "어차피 걔랑은 안 맞았어." 회사에서 상사에게 잔뜩 깨진 사람이 집에 와 별일 아닌 일로 가족에게 짜증을 냅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붓거나 일에 쏟아붓는 사람도 있고요. 이 장면들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견디기 힘든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대개 스스로도 알아채지 못하는 마음의 움직임이라는 것.

정신의학과 심리학은 이것을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라고 부릅니다. 정신분석이라는 오래된 사상에서 나온 개념인데,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정신분석이 내놓은 수많은 이론 대부분은 훗날 과학적 검증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걸러졌지만, 이 방어기제만큼은 살아남았다는 점입니다. 새로 여는 이 섹션의 첫 이야기로, 그 '살아남은 개념'을 골라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정신분석에서 나왔지만, 정신분석과 운명을 달리한 개념

방어기제라는 발상은 프로이트에게서 출발해, 그의 딸 안나 프로이트가 체계적으로 목록화했습니다. 마음이 감당하기 힘든 불안이나 갈등에 부딪혔을 때, 그것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자동으로 작동하는 심리적 장치라는 개념이죠.

여기서 이 섹션의 태도를 미리 밝혀두겠습니다. 정신분석의 많은 주장(이를테면 성격이 유아기 성적 발달 단계로 결정된다는 식의 이론들)은 경험적으로 뒷받침되지 않아 오늘날 대부분 폐기됐습니다. 그런데 방어기제는 왜 살아남았을까요. 답은 단순합니다. 이건 관찰하고, 측정하고, 검증할 수 있는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변이 아니라 데이터의 시험대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죠. 이 글의 뒷부분에서 바로 그 근거를 볼 겁니다.

흔한 방어기제들

먼저 개념부터 익혀보죠. 방어기제는 거짓말이나 계산된 조종과는 다릅니다. 그런 건 의식적으로 하는 일이지만, 방어기제는 대개 자기도 모르게 일어납니다. 그리고 누구나 씁니다. 병이 아니라 마음의 기본 작동 방식에 가깝습니다.

방어기제무엇인가일상의 예
부정불편한 현실을 아예 인정하지 않음진단을 받고도 "검사가 잘못됐을 것"
억압고통스러운 기억·감정을 의식 밖으로 밀어냄힘들었던 시기가 잘 기억나지 않음
투사내 안의 감정을 남에게 있는 것으로 돌림내가 그를 싫어하면서 "쟤가 날 싫어해"
합리화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상황을 정당화떨어진 시험을 "사실 별로 원하지도 않았어"
전치감정을 원래 대상이 아닌 만만한 곳에 풂상사에게 난 화를 가족에게
반동형성속마음과 정반대로 행동좋아하는 아이를 유독 괴롭힘
승화충동을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활동으로 전환공격성을 격투기나 예술로
유머고통을 웃음으로 견딜 만하게 만듦힘든 상황을 농담으로 넘김

유명한 사례로 이해하기

개념만 늘어놓으면 손에 잘 잡히지 않으니, 정신분석 초기의 유명한 두 사례를 빌려오겠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당시의 해석에 무리한 대목이 적지 않지만, 방어기제라는 '현상' 자체를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 자주 인용됩니다.

꼬마 한스와 전치(Displacement)의 방어기제. 1909년 프로이트가 보고한 다섯 살 소년(별명 '꼬마 한스')은 어느 날부터 말을 심하게 무서워해 밖에 나가기를 거부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이 공포의 뿌리를, 아이가 아버지에게 품은 두려움과 적대감이 차마 아버지를 향할 수 없어 '말'이라는 만만하고 안전한 대상으로 옮겨간 것으로 풀이했습니다. 감정을 원래의 대상이 아닌 다른 곳으로 돌리는 전치(Displacement), 그 교과서적 예시죠. 물론 이 사례를 오이디푸스 이론의 증거로 삼던 당시 해석을 오늘날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다만 '두려운 진짜 대상 대신 애먼 데로 감정이 향한다'는 그 현상만큼은, 상사에게 난 화를 집에서 가족에게 푸는 우리 모습과 정확히 겹칩니다.

안나 O.와 억압(Repression)의 방어기제. 정신분석의 출발점이 된 사례입니다. 브로이어가 치료한 이 여성 환자(본명 베르타 파펜하임)는 원인 모를 마비와 언어장애 같은 여러 신체 증상에 시달렸는데, 잊고 지내던 괴로운 기억과 감정을 떠올려 말로 쏟아내고 나면 증상이 누그러지곤 했습니다. 환자 자신은 이를 '굴뚝 청소', 혹은 '대화 치료(talking cure)'라고 불렀고, 이것이 훗날 정신분석의 씨앗이 됩니다. 견디기 힘든 기억과 감정을 의식 밖으로 밀어내는 억압(Repression), 그리고 그 억눌린 것이 사라지지 않고 다른 형태로 새어 나온다는 발상이 여기서 싹텄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실제 이 환자의 회복은 전해지는 이야기만큼 극적이지도 깔끔하지도 않았다는 점 또한 기억해 둘 만합니다.

두 사례가 보여주듯, 방어기제는 진료실에서만 벌어지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누구의 마음에서나 매일 일어나는 일입니다.

모든 방어가 똑같지는 않다

여기까지는 옛 개념의 소개입니다.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입니다. 20세기 후반의 연구자들은 방어기제를 그냥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성숙도'라는 축으로 줄 세웠습니다.

한쪽 끝에는 미성숙한 방어가 있습니다. 부정, 투사, 행동화처럼 현실을 심하게 왜곡하는 것들이죠. 가운데에는 신경증적 방어(억압, 전치, 지식화 등)가, 그리고 반대쪽 끝에는 성숙한 방어가 있습니다. 승화, 유머, 이타주의, 그리고 감정을 부정하지 않되 적절한 때까지 미뤄두는 억제 같은 것들입니다. 같은 '방어'라도 어떤 것은 삶을 갉아먹고, 어떤 것은 오히려 삶을 떠받친다는 통찰입니다.

핵심. 방어기제를 '없애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방어 없이 사는 건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관건은 미성숙한 방어에서 성숙한 방어 쪽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거는

이제 이 개념이 왜 살아남았는지를 보여줄 차례입니다. 세 갈래의 근거가 있습니다.

첫째, 성숙한 방어를 쓰는 사람은 실제로 더 잘 지냅니다. 수십 년에 걸친 종단 연구를 종합한 연구에서, 이타주의·유머·승화 같은 성숙한 방어를 습관적으로 쓰는 사람들은 더 행복하고, 일과 관계에 더 만족하며, 정신적으로 더 건강했습니다1. 방어기제가 그럴듯한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현실의 삶을 예측한다는 뜻입니다.

둘째, 측정할 수 있습니다. 훈련된 평가자가 30가지 방어를 성숙도 위계에 따라 평정하는 도구(방어기제 평정척도)가 개발됐고, 이 위계는 경험적으로 견고하고 임상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이 확인됐습니다2. 프로이트의 사변이 계량 가능한 개념으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셋째,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한데, 방어는 바뀝니다. 그리고 좋은 정신치료가 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5년에 걸친 장기 정신치료를 추적한 연구에서, 환자들은 미성숙한 방어에서 신경증적 방어를 거쳐 성숙한 방어로 서서히 올라갔고, 이 변화가 이후의 증상과 기능 호전을 예측했습니다3. 즉 방어가 성숙해지는 것과 나아지는 것이 함께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내 방어를 알아차린다는 것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방어기제는 정신분석이라는 낡은 배가 가라앉는 와중에도 스스로 검증의 물살을 헤치고 살아남은 드문 구명보트입니다. 다만 이 하나가 살아남았다고 해서 정신분석 전체가 옳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이 섹션이 취하려는 태도는, 옛 개념을 낭만화하지도 싸잡아 무시하지도 않고 '검증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입니다. 그렇게 봤을 때 방어기제는 잣대를 통과했고, 나머지 많은 것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걸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거창하지 않습니다. 힘든 순간에 내가 습관적으로 어떤 방어를 꺼내 드는지를, 자책 없이 가만히 알아차려 보는 것. "아, 지금 내가 합리화를 하고 있구나", "화를 엉뚱한 데 풀고 있구나" 하고요. 그 알아차림 자체가, 조금 더 유연하고 성숙한 방어로 옮겨가는 첫걸음이 되곤 합니다. 마음이 자신을 지키는 방식을 이해하는 일은, 결국 자신을 더 잘 돌보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참고 자료

  • 성숙한 방어기제와 정신건강, 종단 연구 종합 (Vaillant, Am Psychol 2000): PubMed
  • 방어기제 위계의 경험적 타당성과 측정 (Di Giuseppe·Perry, Am J Psychother 2021): PubMed
  • 장기 정신치료 중 방어기제 변화와 5년 경과 (Perry·Bond, Am J Psychiatry 2012): PubMed

참고문헌

  1. Vaillant, 2000
  2. Di Giuseppe·Perry, 2021
  3. Perry·Bond,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