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에서 가끔 이런 표정을 봅니다. "신경통약"이나 "진통제" 라고 알려진 약의 이름을 처방전에서 발견한 분의 당혹감. 리리카가 딱 그런 약입니다. 이름을 검색해 보면 당뇨병성 신경통, 대상포진 후 통증, 섬유근육통. 온통 통증 이야기뿐이니까요. 그러니 이렇게 묻게 됩니다. "나는 불안해서 왔는데 왜 통증약을?"
답부터 드리자면, 리리카는 통증약이자 불안약입니다. 게다가 어떤 상황에서는 흔히 쓰는 우울증 계열 약보다 빠르게 듣기까지 하고요. 다만 그 편리함 뒤에는 의존과 규제라는 꽤 무거운 이면이 따라붙습니다. 이 약의 두 얼굴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보여드리겠습니다.
핵심 정보 한눈에
- 상품명: 리리카(Lyrica). 원개발 화이자, 현재 국내는 비아트리스코리아·제일약품이 판매. 제네릭(가비카 등) 다수
- 성분명: 프레가발린(Pregabalin)
- 분류: 신경의 흥분을 가라앉히는 약(가바펜티노이드 계열)
- 국내 허가 용도: 신경이 손상돼 생기는 통증, 섬유근육통, 뇌전증 보조 치료
- 핵심 반전: 유럽에서는 '걱정이 끊이지 않는 불안장애' 치료제로 정식 허가. 미국·한국에서는 불안에 쓸 때 허가 범위 밖 처방이 됨
- 강점: 불안에 대해 우울증 약보다 효과가 빨리 느껴짐, 다른 약과 부딪히는 일이 매우 적음
- 최대 주의점: 의존·오남용 가능. 영국은 2019년 마약류로 지정. 마약성 진통제와 함께 쓰면 위험하고, 미국 식품의약국은 2019년 호흡이 약해질 수 있다는 경고를 붙였음
- 가장 큰 오해: "이름이 가바(GABA)랑 비슷하니 가바 약이겠지". 아닙니다(뒤에서 설명)
- 복용 시간: 하루 2~3회 나눠서. 어지럼·졸림이 초기에 흔해 저녁 몫을 크게 잡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식사와는 무관합니다.
- 듣는 시간: 먹고 1시간이면 농도가 최고가 되고, 몸에서 절반이 빠지는 데 약 6시간이라 하루 2~3회로 나눕니다. 불안에 대한 효과는 항우울제보다 빨라 첫 주 안에 체감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이 약의 특징입니다
⚠️ 이 글은 정보 제공용입니다. 약의 시작·변경·중단은 반드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 상의하세요.
이름은 GABA인데, GABA 약이 아닙니다
가장 흔한 오해부터 걷어내겠습니다. 프레가발린은 우리 뇌의 대표적 '진정 신호' 물질인 GABA와 화학 구조가 닮았습니다. 그래서 이름만 보고 "GABA를 늘려 진정시키는 약이겠거니" 짐작하게 되죠. 그런데 실제로는 GABA와 거의 상관이 없습니다.
프레가발린은 가바가 붙는 자리에 붙지도 않고, 몸속에서 가바로 바뀌지도 않습니다1. 진짜 작동 지점은 엉뚱한 곳에 있어요. 신경세포에 달린 어떤 통로의 부품에 달라붙어, 신경이 흥분할 때 쏟아내는 신호 물질의 양을 줄입니다.
저는 이 약을 설명할 때 과하게 울리는 신경의 '볼륨'을 낮추는 스위치라고 표현하곤 합니다. 통증 신호든 불안 신호든, 지나치게 흥분한 신경을 진정시키는 것이죠. 원리가 하나라서, 통증과 불안 양쪽에 듣는 이유도 자연스럽게 설명됩니다.
왜 정신과에서 쓰나, 불안에 대한 효과
바로 그 "신경의 볼륨을 낮추는" 작용 덕분에, 프레가발린은 불안, 그중에서도 걱정이 끊이지 않는 쪽의 불안장애에 효과를 냅니다. 공황장애와 달리 특별한 계기 없이 온갖 것에 대한 걱정이 몇 달씩 이어지는 상태인데, 여기에 이 약이 손을 보탭니다.
인상만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임상시험 8건·환자 2,299명을 모아 다시 계산한 분석에서 프레가발린은 가짜약보다 불안을 뚜렷하게 줄였습니다2. 중간에 그만둔 사람의 비율은 가짜약과 차이가 없었고, 벤조디아제핀과 견주면 효과는 비슷하면서 그만두는 사람은 더 적었습니다. 연구들 사이에 결과가 엇갈리는 정도도 거의 0에 가까워, 이 결론은 꽤 단단한 편입니다. 그래서 세계생물정신의학회의 불안장애 지침은 프레가발린을 흔히 쓰는 우울증 계열 약들과 나란히 첫 번째 선택지로 올려두고 있습니다.
게다가 '빠릅니다'
이 약의 진짜 매력을 하나만 꼽으라면 속도입니다.
렉사프로 같은 우울증 약을 불안에 쓸 때 가장 답답한 대목은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보통 2~4주가 걸린다는 점입니다. 불안으로 하루하루가 버거운 분에게 이 몇 주는 정말 깁니다. 반면 프레가발린은 며칠에서 1주 안에 효과가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건 인상이 아니라 실제로 재본 이야기입니다. 환자 421명을 네 무리로 나눠 6주간 진행한 시험에서, 프레가발린을 받은 두 무리는 1주째부터 불안 점수가 뚜렷하게 내려갔습니다. 같은 시험에서 비교약으로 쓰인 벤라팍신은 2주째부터였고요.
| 언제부터 뚜렷하게 좋아졌나 | 부작용 때문에 그만둔 사람 | |
|---|---|---|
| 프레가발린 400mg | 1주째 | 100명 중 6명 |
| 프레가발린 600mg | 1주째 | 100명 중 14명 |
| 벤라팍신 75mg | 2주째 | 100명 중 20명 |
| 가짜약 | — | 100명 중 10명 |
표에서 하나만 더 짚겠습니다. 용량을 600mg까지 올린 쪽이 400mg보다 나은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6주 뒤 모든 지표에서 성적이 좋았던 건 400mg 쪽이었고, 그만두는 사람만 두 배 넘게 늘었습니다. 이 약에서 "더 많이 = 더 좋게"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뒤에 나올 의존 이야기와도 곧장 이어지는 대목입니다.
벤조디아제핀만큼 의존 위험을 짊어지지 않으면서도 초기 불안을 빨리 눌러야 할 때, 이 빠른 반응이 프레가발린을 꽤 솔깃한 선택지로 만듭니다.
같은 약, 나라마다 다른 신분
재미있는 건, 이 약이 나라마다 '공식 신분'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 지역 | 불안장애 치료제로 허가됐나 | 마약류로 관리하나 |
|---|---|---|
| 유럽 | 정식 허가, 불안장애 치료제 | — |
| 미국 | 허가 없음(통증·뇌전증만) | 마약류로 관리(가장 낮은 등급) |
| 영국 | 허가 없음 | 2019년 마약류로 지정 |
| 한국 | 허가 없음 → 불안에는 허가 범위 밖 처방 | 아직 마약류로 지정되지 않음 |
유럽에서는 엄연한 불안약, 국내에서는 통증약으로 허가돼 있어 불안 때문에 쓰면 허가 범위 밖 처방이 됩니다. 이 말에 놀랄 필요는 없어요. 근거가 충분하면 의사의 판단으로 흔히 이뤄지는 일입니다. 다만 이 지역별 온도차는, 곧 볼 '규제'의 이유와 맞물려 있습니다.
무거운 이면: 의존·오남용, 그리고 마약성 진통제
이 글에서 가장 힘주어 읽어주셨으면 하는 대목입니다. 프레가발린은 "순한 신경통약"이라는 인상과 달리, 의존과 오남용의 위험이 있는 약입니다.
- 이 계열 약을 함부로 쓰는 사람은 일반 인구에서는 100명 중 두 명이 채 안 되지만, 마약성 진통제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조사에 따라 100명 중 3명에서 68명까지 치솟습니다3. 용량을 왕창 올려 붕 뜨는 기분을 노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 특히 조심해야 할 조합이 있습니다. 마약성 진통제와 함께 먹으면 그 진통제로 인한 사망 위험이 1.5배 가까이 높아졌습니다4. 두 약 모두 숨 쉬는 힘을 누르는 쪽으로 작용해, 겹치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 이런 근거가 쌓이면서 영국은 2019년 4월부터 프레가발린을 마약류로 다시 분류해, 처방 없이 갖고 있거나 파는 것을 불법으로 만들었습니다5. 미국도 마약류 가운데 가장 낮은 등급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핵심 — 프레가발린은 "순한 약"이 아닙니다. 의존·오남용 위험이 있고, 특히 마약성 진통제나 술과 함께 쓰면 위험합니다. 정해진 용량을 지키고, 다른 진정·마약성 약을 함께 드신다면 반드시 알리세요. 처방받은 대로, 혼자 용량을 올리지 않는 것. 이 약을 안전하게 쓰는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균형을 하나 잡아 두겠습니다. 이 위험은 대체로 고용량 남용이나 위험한 병용에서 커집니다. 의사의 관리 아래 정량으로 쓰는 대다수 환자에게 이 약은 유용하고 비교적 안전합니다. 겁을 먹고 필요한 치료를 피할 이유는 아니되, 만만하게 볼 약도 아니라는 뜻이에요.
규제기관이 실제로 경고한 것 — 숨 쉬는 문제
의존 이야기 옆에 반드시 붙어야 할 경고가 하나 더 있습니다. 국내 설명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데, 미국 식품의약국이 2019년 12월에 이 계열 약 전체에 붙인 경고입니다. 숨 쉬는 힘이 약해질 수 있다는 것.
근거는 이렇습니다. 2012년부터 2017년까지 보고된 호흡 억제 사례가 49건이었고 그중 12명이 사망했는데, 사망자 전원이 아래 위험 요인을 하나 이상 갖고 있었습니다.
- 65세 이상
- 폐 기능이 이미 떨어져 있는 경우(만성 폐질환 등)
- 다른 진정 계열 약을 함께 쓰는 경우 — 마약성 진통제, 수면제·안정제, 일부 항우울제, 졸린 알레르기약까지
바꿔 말하면 젊고 폐가 건강하고 다른 진정 약을 안 쓰는 사람에게 이 약이 갑자기 숨을 멎게 하는 일은 사실상 보고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위험은 조건부입니다. 그런데 그 조건이 생각보다 흔합니다.
사망 통계가 말해주는 것
영국에서 2004년부터 2020년까지 이 계열 약이 검출된 사망 사례를 모은 조사가 그 조건의 정체를 정확히 보여줍니다. 총 3,051건이었고 그중 프레가발린이 2,322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숫자는 따로 있습니다.
| 숫자 | |
|---|---|
| 마약성 진통제가 함께 검출된 비율 | 100건 중 92건 |
| 이 계열 약 하나만으로 사망한 사례 | 3,051건 중 2건 |
핵심 — 이 약이 사람을 해치는 방식은 '이 약 하나'가 아니라 '겹침'입니다. 3,000건이 넘는 죽음 중 이 약만으로 설명되는 건 두 건뿐이었고, 열에 아홉은 마약성 진통제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글에서 기억하실 것도 하나로 줄어듭니다 — 겁내야 할 대상은 이 약의 존재가 아니라 이 약과 겹치는 다른 약입니다. 진통 클리닉, 정형외과, 정신과에서 각각 약을 받고 계신다면, 그 목록을 한 곳에 모아 보여드리는 일이 이 약을 안전하게 쓰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흔한 부작용
- 어지러움·졸림: 가장 흔합니다(10명 중 1명 이상). 약을 중단하는 가장 흔한 이유이기도 하고요. 대개 시작 초기에 심하다가 적응됩니다.
- 부종(붓기): 발·다리가 붓는 말초 부종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 체중 증가: 용량이 높을수록 잘 나타납니다.
- 머리가 멍한 느낌·집중이 안 되는 것, 시야 흐림, 입마름
- 보행 불안정: 특히 고령자는 어지럼과 겹쳐 낙상 위험이 있으니 조심합니다.
콩팥이 관건, 다른 약과는 잘 안 부딪힘
프레가발린에는 실용적인 장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 약은 간에서 거의 분해되지 않고, 대부분 그대로 소변으로 빠져나갑니다. 덕분에 다른 약과 부딪히는 일이 매우 적습니다. 여러 약을 함께 드는 분에게는 꽤 반가운 특성이죠1. (익셀(밀나시프란)이 신장으로 배출돼 상호작용이 적은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대신 소변으로 나가는 약이라, 콩팥 기능이 떨어진 분은 반드시 용량을 줄여야 합니다. 신장이 약을 제때 못 내보내면 몸에 쌓이고, 그만큼 부작용도 커지니까요.
끊을 때는?
프레가발린도 갑자기 끊으면 몸이 요동칠 수 있습니다. 불면, 메스꺼움, 두통, 불안, 신경과민, 땀 같은 것들이요. 그래서 최소 1주 이상에 걸쳐 천천히 줄이는 것이 원칙입니다. 뇌전증 때문에 드시던 경우라면 갑자기 끊는 것이 경련 위험까지 부르니 더 신중해야 하고요. 혼자 끊지 마시고, 감량 계획은 꼭 함께 짜세요.
비슷한 약과의 관계
- 가바펜틴(뉴론틴): 프레가발린의 형뻘 되는 오래된 같은 계열 약입니다. 작동 원리는 같지만, 프레가발린이 몸에 흡수되는 양이 더 일정해 용량 조절이 수월한 편입니다.
- 벤조디아제핀(자낙스·리보트릴 등): 불안에 빠르게 듣는 점은 비슷하지만 작동 방식이 다릅니다. 프레가발린은 벤조만큼 인지·기억에 영향을 덜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의존 위험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는 점은 나란히 기억해 두는 게 좋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A)
Q. 저는 불안 때문에 왔는데 왜 신경통약을 주죠? 프레가발린은 통증약이자 불안약입니다. 유럽에서는 아예 불안장애 치료제로 허가돼 있어요. "신경의 흥분을 낮추는" 작용이 통증과 불안 양쪽에 듣기 때문입니다. 진단이 바뀐 게 아니라, 불안에 맞는 약을 고른 것입니다.
Q. 리리카는 중독되는 약인가요? 함부로 쓰면 의존이 생길 수 있는 약은 맞습니다. 그래서 영국과 미국은 이 약을 마약류로 관리하죠. 하지만 의사가 정해준 용량을 지키고, 마약성 진통제나 술과 함께 쓰지 않으면 대다수에게 유용하고 비교적 안전합니다. 스스로 용량을 올리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Q. 우울증 약보다 빨리 듣는다는 게 사실인가요? 불안에 대해서는 대체로 그렇습니다. 421명을 견준 시험에서 프레가발린은 1주째부터, 비교약이었던 벤라팍신은 2주째부터 뚜렷한 호전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초기 불안을 빨리 잡아야 할 때 유용합니다.
Q. 살이 찌나요? 용량이 높으면 체중이 늘 수 있고 붓기(부종)도 생길 수 있습니다. 변화가 크면 알려주세요.
Q. 다른 약이랑 같이 먹어도 되나요? 프레가발린은 다른 약과 잘 부딪히지 않는 편이라 대체로 괜찮습니다. 단, 마약성 진통제·수면제·술처럼 사람을 처지게 하는 것들과 겹치면 위험하니 반드시 알리세요. 특히 연세가 있거나 폐가 약한 분은 숨 쉬는 힘까지 눌릴 수 있습니다.
💬 전문의 한마디
저는 프레가발린을 "빠르고 유용하지만, 예의를 갖춰 다뤄야 하는 약" 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안이 심해 하루가 급한 분에게, SSRI가 자리 잡기까지의 몇 주를 이 약이 메워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벤조디아제핀을 쓰기 조심스러운 분께 대안이 되기도 하고요. 잘 쓰면 참 고마운 약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약을 시작할 때 "순한 신경통약"이라는 인상을 일부러 깨뜨립니다. 실제로 영국은 이 약을 마약류로 지정했고, 마약성 진통제와 함께 쓰면 위험하다는 자료도 분명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두 가지를 꼭 확인합니다. 과거에 약물·알코올 문제가 있었는지, 그리고 마약성 진통제를 함께 드시는지. 이 두 가지가 없다면 대부분 안심하고 쓸 수 있습니다.
환자분께 드리는 당부는 짧습니다. 처방된 용량을 지키세요. 스스로 올리지 마세요. 술·마약성 진통제와 겹치지 마세요. 이 세 가지만 지키면, 프레가발린은 빠르고 든든한 도우미가 됩니다. 무서워할 필요는 없지만 만만하게 볼 필요도 없다 — 딱 그 사이의 태도가 이 약에는 맞습니다.
리리카는 "통증약의 얼굴을 한 항불안제" 입니다. 이름은 가바를 닮았어도 가바 약은 아니고, 신경의 과한 흥분을 낮춰 통증과 불안을 함께 다스립니다. 우울증 계열 약보다 빠르게 듣는 매력이 있는 한편, 의존과 규제라는 무게도 나란히 지고 있죠.
좋은 약이냐 위험한 약이냐, 이 이분법은 이 약에는 잘 맞지 않습니다. 누가, 어떤 용량으로, 무엇과 함께 쓰느냐가 거의 전부인 약이니까요. 그 원칙만 지켜진다면, 리리카는 불안과 통증이 겹친 순간에 꽤 빠르게 손을 내밀어 줍니다.



